로베르트 발저 <산책자>에 부쳐
나는 흘러가는 노트 속의 산책자
내 기록들의 방관적 수취인
(...)
나는 말랐다 젖었다
써졌다 지워지며
아무 데도 닿지 않아요
- 강성은,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창비(2009), '혼자 있는 교실' 일부
코로나 이후 산책이 일상이 되었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동네 탄천을 따라 걷는다. 걷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것들. 무수한 존재들과 마주치고 그들의 이름을 찾아보고 사진에 담고 입밖으로 불러본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1년 넘게 이토록 꾸준히 매일 무언가를 해본 적이 있었나.
내가 마주친 것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조팝나무, 스타티스(미스티 블루), 명자나무(산당화), 에크메아 파시아타, 죽단화(겹황매화), 자산홍, 덜꿩나무, 고광나무, 애기똥풀, 토끼풀, 병꽃나무, 박태기나무, 서양수수꽃다리(라일락), 수레국화(물수레국화), 등나무, 루핀(루피너스), 칠엽수, 붉은토끼풀, 마로니에, 금계국, 작약, 분홍 달맞이꽃, 층층나무, 겹벚꽃나무 등등...... 늘 거기에 있었으나 나로 인해 새롭게 발견된 존재들.
아무 데도 닿지 않고 시간을 흘려버렸다고 생각했다. 닿고 싶은 데를 목적한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조금 우습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생각조차 우습기는 마찬가지. 나는 무수히 많은 것을 했고, 무수히 많은 것을 보았고, 무수히 많은 것을 반복했다. 산책은 그 중의 하나. 어쩌면 산책은 아무 데도 닿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의 표상인지도 모른다.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를 읽는다. 오래 묵혀 두었던 책이 이제야 손에 잡힌다. '아무 데도 닿지 않는 것'으로서의 산책이 이렇듯 텍스트로 발현될 수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란다. 이 책을 번역한 소설가 배수아의 말처럼 "텍스트는 자신의 궁극의 지점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로, 대본 없는 낭송, 즉흥의 산책을 이어나가는 듯하다."
말을 하면서도 그 다음에 올 말이 무엇인지 발화자 자신도 모르는 말. 이건 마치 홍상수 감독이 자신의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인물들의 입을 빌어 말하는 "정말로 모르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나는 이 영화를 사랑한다!) 무계획, 무의미, 무의도. 대신 '매번 발견하는 것'. 그 발견의 과정이 중요할 뿐이다.
무의도성과 우연성은 홍상수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이기도 한데, 나는 발저의 스타일에서도 비슷한 것을 읽는다. 다만 발저의 글이 보다 산만하고, 훨씬 종잡을 수 없다는 것. 배수아는 번역 과정에서 얻은 인상을 이렇게 적었다.
"이 책의 거의 모든 문장은 다음에 올 문장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한다.
"스스로의 흔적을 끊임없이 지우며 모퉁이를 돌아버린다. 그는 돌연하고 불연속적이다."
'인과성과 연속성의 끈을 놓아버리는 돌연하고 뜻밖인 결말들' 앞에서 역자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리며 매혹되고 만다.
"이런 것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어."
동의한다. 나 역시 이런 것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 배수아는 매혹당했다고 말했지만, 일반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비슷한 정도에서 '매혹'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놀라움을 다 매혹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정할 수 없는, 42편의, 짧거나 긴 글들 중 나는 '프리츠'와 '산책'에 매혹된다. 기이한 일이다. '프리츠'는 가정문이라는 형식의 반복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는 점에서("~했다면/아니었다면/없었더라면/않았더라면... ~내 인생은 좀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라는 문장의 반복)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형식미를 (그나마) 갖추고 있지만, '산책'은 말 그대로 종잡을 수 없는 화자의 산보에 초대되어 동행하는 기분이다. 어느 화창한 날 아침 산책에 나선 화자가 특별한 목적 없이 발 닫는 대로 길을 걸으며 그 여정을 우리에게 낱낱이 중계하는 형식이랄까. 무의미한 장소와 인물들이 지나가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산책이 화자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자못 깊고 진지하게 (꽤 긴 분량을 할애하여) 설파하기도 한다.
발저의 글 일부를 인용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어 보인다. 발저의 문체는 직접 읽어보아야만 느낄 수 있는 것. 42편의 글이 끝나고 책의 마지막에 실린 발저의 말만을 옮겨볼 뿐이다.
그 누구도 내가 되기를, 나는 원하지 않는다.
오직 나만이 나를 견뎌낼 수 있기에
그토록 많은 것을 알고, 그토록 많은 것을 보았으나
그토록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말이 없음이여.
- 로베르트 발저
아무것도 할 말이 없어서 그의 산책은 곧 글이 되었다.
걷기는 그의 스타일을 구축한 육체였다. 걷기를 통해서 "그는 어디서나 살았고, 그 어디에서도 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글 안에서 "하나의 내면이 되었고, 그렇게 내면을 산책했다."
- 로베르트 발저, <산책자>, 한겨레출판(2017), '옮긴이의 말' 중에서
나는 내 노트 속의 산책자, 내 기록들의 방관적인 수취인에 불과하다. 강성은의 시처럼 "말랐다 젖었다 써졌다 지워지며 아무 데도 닿지 않"는 것이, 그리하여 발저가 말한 것처럼 "그토록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말이 없"는 상태가 내가 지향하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할 말이 없어서 계속 말하는 것. 이것은 역설이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강성은과 홍상수와 로베르트 발저를 바라보며 나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비슷한 결론이지만).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 쓰고, 쓰면서 발견하고, 발견하는 과정에서 다시 알아차리는 것. 무엇을? 아무것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아무 데도 닿지 않는 산책자처럼 말이다.
(2021-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