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만의 역설에 대하여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 '굿 올드 네온'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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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는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를 번역하면서 펄쩍 뛰어오를 만큼 매혹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avid Foster Wallace, 이하 DFW 혹은 월리스라 부르겠다)의 책 <오블리비언 Oblivion>에 수록된 단편 ‘굿 올드 네온(Good Old Neon)’을 읽고 자세를 고쳐 앉을 만큼 매혹되었다. 펄쩍 뛰어오를 만큼은 아니었지만, 비스듬히 침대에 누워 읽다가 침대 헤드에 바짝 허리를 밀어넣고 앉아서 읽을 만큼. 이거 재미있는데, 라는 혼잣말을 작게 연발할 만큼. 머리맡 스탠드 하나만 켜놓은 채 희미한 불빛 아래서 읽다가 결국 침실을 빠져나와 서재로 돌아간 후 훤히 조명을 밝히고 읽을 만큼. 햐- 이것 봐라, 오- 이런 식이란 말이지, 따위의 감탄사를 곁들여가면서 읽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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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산문집 <재미있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이나 <끈이론> 같은 책을 읽다가 ‘재미있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번 다시 읽지 않을 책’이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린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라는 이름에 일단 떨떠름한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다. 이해한다. 충분히. 그렇더라도 이 알려지지 않은 소설집 <오블리비언>엔 한번 더 눈길을 주어도 좋지 않을까. 적어도 ‘굿 올드 네온’과 표제작 '오블리비언'은 일독을 권하고 싶다. 물론 모든 독자에게는 아니고.


표제작 '오블리비언'은 지독한 농담 같은 작품이다. 나의 느낌은 이렇다. 영화감독 우디 앨런이 자신의 특기를 백 배 살려 신랄하고 우스꽝스러운 부조리-코미디극을 만든다면, 그리고 그 극본을 소설로 각색한다면 딱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는. 성적 농담과 지적 대사를 쏟아내며 현대인의 강박과 불안에 천착한 우디 앨런 스타일(그의 모든 영화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을 좋아한다면, 혹은 연극 <대학살의 신>이나 이를 영화화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동명 작품을 재미있게 본 사람이라면 '오블리비언'을 추천한다. 흥미진진할 것이다.


'오블리비언'도 좋지만, 나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작품은 역시 '굿 올드 네온'이다. 읽다가 너무 흥미로운 나머지 남은 페이지를 세어보았을 정도니까. 얼마나 남았나. 보통 지루한 책을 읽다가 얼마 남았나 세어본 적은 있어도. 이것밖에 남지 않았다니 아쉽군,이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코드와 맞아떨어진 결과일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기만'이나 '위선'에 관해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을 보여왔으니까. 특히 '자기 기만'에 빠진 나를 견디기 어려워 20대까지 괴로워했으니까. 이 작품은 ‘자기기만’에 대한 생각에 오래 사로잡혀온, 적어도 붙들려온, 그래서 자기기만이 자기혐오로 이어진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오블리비언>을 읽기 전, DFW의 케니언 대학 졸업 축사를 책으로 담은 <이것은 물이다>를 워밍업으로 가볍게 읽어도 좋겠다. 무엇을 읽든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이 사람, 걸물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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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블리비언>은 DFW가 자살하기 전 출간된 마지막 소설집(국내엔 처음 선보인 픽션)이다. 그의 글쓰기 스타일을 '형식 과잉'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동의한다. 형식 과잉은 어쩌면 DFW의 자의식 과잉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월리스는 바로 그 '과잉' 때문에 명성과 악명을 동시에 얻었다. 그 형식 과잉이 어떤 작품에서는 그저 장광설이라는 악명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또 어떤 작품에서는 기가 막힌 그만의 스타일이라는 명성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듯하다. <재미있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그의 에세이 선집이나, 테니스에 관련된 글만 따로 모은 <끈이론> 같은 책들은 내게 악명으로 다가왔지만, 이 마지막 소설집 <오블리비언>은 명성에 걸맞은 작품이라고 꼽고 싶다. "기가 막히게 기발하다"는 타임 지의 코멘트는 적절하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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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를 수식할 수 있는, 그리고 내가 받은 인상을 적절히 표현해줄 수 있는 말을 나열해본다. 천재적 재능, 기발함, 명석함, 유머, 위트, 냉소, 통찰력, 철학적 사유, 지적 탐구심, 허무주의, 픽션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능수능란함, 장황한 듯 보이지만 촘촘하고 정교하며 집요한 문체, 그리고 숨길 수 없는 자의식 과잉.


<오블리비언>의 역자가 말했듯 월리스는 "독자가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 어떤 때는 따라오기 어려우라고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 엄청난 만연체와 지연 전략을 구사하는 작가"이다. 여덟 편의 단편을 무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번역했다고 하니 옮긴이의 노고가 짐작되고도 남는다. 역자 신지영의 무난한 번역으로 월리스의 이 난감한 글들을 큰 막힘 없이 유쾌하게 읽을 수 있었다. (역자에게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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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올드 네온'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평생을 기만적인 인간으로 살아왔다." 줄거리(라고 할 만한 것도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는 단순하다. 스물아홉의 나이로 광고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는 '나'는 행복하지 않고, 정신과 상담을 받았지만 별 효과가 없다. "다른 사람에게 나에 대한 특정한 인상을 심어주고 인정과 승인을 받기 위해 정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었"지만 진정한 자아와는 상관없기에 자신에게 넌더리가 나 있는 상황이다. 최면, 코카인, 지압, 교회, 조깅, 봉사, 명상, 상담 등 수많은 것들을 시도해보았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간 상태. 기만적 행동을 그만둘 수 없다. 마지막으로 시도한 정식 분석에서 닥터 G를 만나 자신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네 살부터 시작된 기만과 속임수의 사례들, 타인의 생각을 조종하고 이미지를 조작하는 계산적 능력과 연기, 이를 극복하고자 시도했던 일들의 실패담, 기만의 역설에 관한 논쟁 등)를 털어놓지만 그것 역시 '나'의 의도대로 의사의 생각과 행동을 유도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말하는 화자 '나'가 이미 자살한 자,라는 설정이 중간에서 밝혀질 즈음 흥미도는 더욱 상승한다. 온갖 기만적인 '제스처 놀이'를 끝내기로 결심한 '나'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현란하게 펼쳐내는 그 특유의 말들('나'는 기만의 역설,과 언어의 한계, 시간의 선형적/비선형적 흐름,과 논리적 역설,에 대해서도 말한다)은 직접 읽어보아야만 제맛을 느낄 수 있다. 리듬과 호흡이 현대시를 연상시킨다는 느낌도 들고. 인용을 통해서는 그 진가를 옮길 수 없지만, 의미망에 포착되는 짧은 단위의 문장들도 꽤 존재한다.


"기만의 역설이란 사람이 남들에게 멋지고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면 할수록 속으로는 스스로를 덜 멋지고 덜 매력적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 즉, 그 사람은 사기꾼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사기꾼이라고 느끼면 느낄수록 자신이 실제로는 얼마나 속이 비어 있고 기만적인 사람인지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멋지고 호감 가는 자신의 이미지를 남들에게 전달하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오블리비언>, 알마(2020), '굿 올드 네온' 중에서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만들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나'는 이미 네 살 때 직관적으로 깨닫는다. 이때부터 남들에게 특정한 인상을 심어주는 방법을 터득한 '나'는 이 기만적 습성이 타고난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기만의 역설로부터 도출되는 필연적인 결과는 바로 살면서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을 속이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도저히 속일 수 없는 호적수 혹은 맞수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항상 갖게 된다는 것이다."


타인이 나를 생각하는 방식을 조종하는 데 능란한 '나'이지만, 동시에 스스로 주조한 기만과 불행의 덫에서 빠져나오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절박하게 찾고 있는 것도 '나'인 것이다.


'굿 올드 네온'은 ‘자기기만’을 모티프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언뜻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 연상되기도 한다. 물론 차원은 전혀 다르다. 작품 속 주인공이 자살 충동에 시달릴 만큼 '자기기만'을 견디기 힘들어한다는 설정이나, 두 작가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측면에서 다소 겹쳐지는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인간실격>이 한 남자의 비극적 서사를 일본 특유의 사소설 스타일로 펼쳐내고 있다면, '굿 올드 네온'은 DFW라는 독보적 브랜드에 의해 진행된 형식 실험에 가까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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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리스의 에세이를 펄쩍 뛰어오를 만큼 재미있게 읽지 못한 나로서는 그의 에세이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재미있다고들 하지만 두번 다시 읽지 않을' 에세이들이 더 많았다. 만약 내가 월리스의 에세이 선집을 언급하며 재미있었다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자기기만일 것이다. 이토록 전위적이고 지적이며 방대하면서도 집요한 작가의 글을 내가 기꺼이 즐길 만큼 문화적 자본과 문학적 함량을 갖추고 있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싶은 허위의식이랄까. 이건 그의 소설 ‘굿 올드 네온’의 화자 ‘나’의 기만적 태도이기도 하니까. (그럴까.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것 역시 기만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기만적이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자기기만.)


아무튼. 그의 소설은 다르게 다가온다. 그렇고 그런 서사와, 클리셰에 젖은 문장과, 흔한 플롯과 빤한 구조에 식상한 독자라면 DFW표 소설을 맛보라고 권하고 싶다. <오블리비언>은 국내에 출간된 월리스의 유일한 소설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나 혼자만 알고 싶지만, 또 혼자 읽기는 아까운, 이런 모순된 감정을 선사하는 책들은 내 건조한 서가의 귀한 목록이 된다. 특히 '굿 올드 네온'은 내 오랜 기만의 역설을 통쾌하게 벗기고 찔러댔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제대로 된 강적을 만난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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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말이 많았다. DFW 에세이집 관련 북콘서트 영상을 우연히 보다가 뭐라도 말하지 않을 수 없어 시작한 글이 또 길어지고 말았으니. '굿 올드 네온'의 마지막 문장으로 멈춰야겠다.


죽는 마지막 순간, 그 짧은 찰나에 화자 ‘나’(그는 곧 데이비드 월리스이기도 하다)는 시간을 거스르고 넘나들며 겉으로 보이던 자신의 모습과 자살에 이르도록 만든 내면을 조화시키려 시도한다. 외면과 내면. 자아의 두 갈래 혹은 두 구석의 대면. 한 남자의 긴 이야기, 독백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그의 보다 진실하고, 단단하고, 감상적인 구석이 다른 구석에게 침묵하라고 명령한다. 마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이렇게 소리 내어 말하는 듯이.

the realer, more enduring and sentimental part of [Wallace] commanding that other part to be silent as if looking it levelly in the eye and saying, almost aloud,


“더는 한마디도 하지 마.”

‘Not another word.’


기만은 모든 것이 끝날 때 멈출 것이다.


(202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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