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중 산문집 <은둔기계>
0_은둔의 기질
은둔의 기질은 타고나는 걸까. 외부적 요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은둔이라 할지라도, 은둔을 선호하는 천성적 요인이 내부에서 적극적으로 작동한 결과가 아닐까. 외향적인 면과 내향적인 면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해오며 살았다. MBTI나 기타 심리 검사에 의하면 나는 분명 ‘내향적(Introvert)’ 인간이지만 오랜 직장 생활을 통해 ‘외향적(Extrovert)’ 인간으로 살았다. 아니, 외향적 면모를 요구하는 일의 특성에 부응하는 인간으로 살았다는 것이 정확한 말일 것이다. 그러다 한국에서의 일과 다양한 인간관계를 접고 해외로 이주하면서 나는 철저히 내향적 인간의 삶을 살게 되었다. 자의 반 타의 반. 타의가 있다 해도 자의가 더 컸으므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자발적 고립을 선택했고, 이는 오래도록 기다린 고독의 시간으로 이어졌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모임에 나가지 않았고, 블로그를 제외한 모든 SNS를 끊었다. 아이 학교 선생들과 극소수의 한국인 이웃 그리고 몇몇 외국인 친구가 ‘사회적 대화’를 나누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적극적 은둔 생활이 시작되었고, ‘단절’에서 오는 편안함을 즐겼다. 언제든 ‘연결’할 수 있었지만, 당분간 연결을 ‘끊기’로 마음먹었다. 타인과의 관계보다 나를 들여다볼 내적 공간이 필요한 시기였다. 때가 되면 돌아오는 은둔의 시간. 바깥에서 소진되고, 안에서 충전되는 시스템. 나는 은둔의 기질을 타고난 것인지도 모른다. 간헐적 단식처럼 적어도 간헐적 은둔이 필요한 사람.
1_마음+사회학 : 마음의 사회학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을 읽으며 매혹당했다. 어떤 책은 프롤로그가 훌륭한 총론의 역할을 한다. 대부분 철학이나 인문사회 계열의 서적이 그랬던 것 같다. 핵심을 짚는 머리말과 깔끔한 총론을 겸한 프롤로그로 단번에 나를 사로잡았던 책들 중 하나가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이었다. 사회학자인 저자가 여러 지면에 발표한 열네 편의 논문을 묶은 책이다. '마음'을 공통 축으로 놓고 다양한 대상과 주제를 넘나들며 빚어내는 사회학적 지식과 상상력이 깊은 시선과 예리한 통찰, 정확한 사유의 언어로 구조화되어 나온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프롤로그에서 밝혔듯) "마음이라는 통주저음(通奏低音)을 배경으로 하는 음악"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목록을 보다가 3장 「스노비즘과 윤리」, 7장 「멜랑콜리와 모더니티」에 꽂혀 이 책을 구매했고, 앉은자리에서 정신없이 읽었다. 시차를 두고 9장 「문화적 모더니티의 역사시학」을 읽는 와중에도 12장 「미래파의 시와 시학」이 빨리 읽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던 경험.
2_은둔할 줄 아는 동물-기계 : 은둔기계
김홍중의 <은둔기계>를 읽으며 매혹당한다. 그의 산문집, 아니 단상집이라고 해야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프롤로그는 짧아졌지만 문장은 강렬해졌다. 프롤로그의 한 대목을 읽고 바로 책을 구입했다.
단상의 매력은 바로 이 멈춤의 힘에 있다. 숨어 있던 파편이 반짝거리며 말하기 시작한다. 나는 전체에 매혹되거나 설득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나를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파편이다. 파편이 총체보다 더 크고, 심오하고, 생명력이 있고, 강렬하다.
- 김홍중, <은둔기계>, 문학동네, 2020, 프롤로그 중에서
이 책의 제목 <은둔기계>가 주는 이미지는 ‘은둔’이라는 말에 호응하는 (나 같은) 일부 독자에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갈 것이다. 여러 단상들을 하나의 주제로 꿸 수는 없지만, 저자가 밝혔듯 그것들을 의미 있게 연관시키는 어떤 형상이 있다면 그것이 ‘은둔기계’일 것이다. 마침 우리는 코로나 시대의 한복판에서 매일 “거리(距離)의 생산”과 “간격의 조립”을 실천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은둔기계는 거리(距離)를 새로운 삶의 원리로 삼는다”고. 프롤로그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은둔 속에서 노동하고, 생각하고, 산책하고, 읽고, 쓰고, 견디고, 저항하고, 소통하고, 창조하며 다른 무언가로 생성되어가는 이들을 나는 은둔기계라고 부른다. 이 책은 은둔기계의 삶에 관한 것이다.”
지난 8년간 말 그대로 은둔 속에서 생각하고 산책하고 읽고 쓰고 견디고 소통하며 다른 무언가가 되어가는(혹은 되어간다고 상상하는) 나를 느리게 감지하며 살았기에, 이러한 존재를 ‘은둔기계’로 부르는 저자의 애틋한 호명 방식에 나는 용수철처럼 반응했다. 특히 「은둔」이라는 제목이 붙은 16쪽짜리 글의 단상들 앞에서 도리 없이 밑줄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들.
# 초超연결사회의 참된 도덕성은 단절의 능력에서 발견된다. 얼마나 깊이, 진지하게, 창조적으로 끊어질 수 있는가? 끊어짐과 연결됨 사이에서 얼마나 생동감 있는 리듬을 설계할 수 있는가? 공동체의 우상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은둔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 은둔을 삶에 지친 사람의 고상한 판타지로 보지 말고 하나의 세계관, 감수성, 삶의 형식으로 바라볼 것.
# 우리는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첫 번째 세대다. (...) 해방이 아니라 포기, 전진이 아니라 이탈, 사교가 아니라 은둔.
#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어떤 경우 ‘연결하고’ 어떤 경우 ‘연결을 끊는’ 동물, 은둔할 줄 아는 동물이다.
# 누구는 커피로 은둔하고, 누구는 음악으로, 누구는 산책으로, 누구는 철학으로 은둔한다. (...) SNS로 은둔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SNS로부터 은둔하는 사람도 있다. 은둔지는 발명될 수 있다. 은둔지를 구축하는 능력이 참된 창조력이다.
# 은둔기계는 풍경의 애호가다.
# 은둔은 사회적인 것, 지배적인 것, 패권적인 것으로부터의 필사적 탈주다.
# 진정한 안식은 사후가 아니라 생의 한복판에서 이미 추구되고 있어야 한다. 그 방편이 은둔이다. 은둔은 미래의 심판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지배하는 관점과 언어의 바깥을 불법 점거하는 것이다.
# 과도한 존재로부터의 이탈. 덜 존재하기. 덜 있을 수 있는 능력. 코나투스의 자기-제한.
# 은둔의 논리. 물러가는 것退, 남는 것殘, 견디는 것忍, 그리고 창조하는 것創.
# 전진이 아니라 물러남의 방식으로 세계에 참여하는 법. 이것은 세계 도피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세계 구성이다.
- 같은 책, 「은둔」 중에서
3_파편이 나를 움직인다 : 단상
단상의 힘을 느껴본 지 오랜만이다. 고등학교 때 프랑스의 라 로쉬푸코나 라 브뤼예르의 잠언들에 매혹당했던 이후로, 성인이 되고 롤랑 바르트나 벤야민의 파편적 사유에 감응했던 이후로. 그것도 한국어로 된 단상에 의해 이렇듯 자주 멈춰본 적이 있던가. 단상에 드러난 저자의 생각에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다. 단상은 설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저자의 말처럼 단상의 매력은 ‘멈춤의 힘’에 있기 때문이다. 단상은 멈추게 하는 문장이다. 생각해보면 나를 사로잡아왔던 것은 대부분 문장이라는 작은 단위에서 비롯되었다.
# 산문이 걸음과 같고 시는 춤과 같다면, 단상은 덫에 비유할 수 있다.
# ‘문학적인 것’의 체험은 어디론가 비상하는 자유의 감각이 아니라, 한 문장과 마주치면서 발생하는 ‘정지(停止)’의 강제력을 절감하는 것이다. (...) 덫으로 기능하는 문장. 더 못 나아가게 하는 문장, 제지력을 가진 문장, 그 안에 갇힌 채 새로운 시간의 흐름에 휘말리게 하는 문장, 이것이 단상이다.
# 단상은 은둔 상태의 문장이다.
# 단상은 문장의 자기-비움이다.
# 이상적 단상은 법조문의 건조함과 시의 표현력을 동시에 갖는다.
# 단상은 적에게 발견되더라도 쉽게 해독되지 않는 기호다.
# 단상의 프랑스적 전통. 라 브뤼에르, 몽테뉴, 파스칼, 보들레르, 폴 발레리, 시몬 베유, 샤를 페기, 롤랑 바르트, 에밀 시오랑, 모리스 블랑쇼......
# 단상은 메시지를 전달받을 사람을 까다롭게 선별하는 소통의 한 극단적 형태다.
# 소통(疏通)이 아니라 밀통(密通).
# 단상은 듣는 자가 ‘아직’ 없을 때 행해지는 말이다. 타자의 부재는 단상의 조건이다.
- 같은 책, 「단상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300여 쪽에 걸쳐 도열한 저자의 단상들은 내게 정지(停止)를 요구한다. 어느 은둔기계(저자)의 문장들이 ‘자기-비움’을 실천하며 또 다른 은둔기계(나)에게 덫으로, 아포리즘으로, 시로, 밀통(密通)의 기호로 다가온 셈이다. 그는 타자의 부재라는 전제하에 이 글을 썼을 것이다. 그렇게 전체로서의 설득을 포기함으로써 그의 단상들은 힘을 얻었으리라. 프롤로그에서 밝혔듯 “파편이 총체보다 더 크고, 심오하고, 생명력이 있고, 강렬하”기에.
고독은 혼자 있는 자의 심정이 아니라, 욕망하지 않는 것과의 연결을 끊은 자가 확보한 자유다. 이 자유는 새로운 연결 가능성에 뿌리내린다. 우리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을 때 더 많이 연결될 수 있다. (같은 책, 62쪽)
파편에 의해 움직였고, 파편에 대해 생각했으며, 파편적 사유와 글쓰기에 골몰해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은둔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는다. “현재를 지배하는 관점과 언어의 바깥을 불법점거”하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분투해왔던가? 실제 내가 점거한 것(이라 믿는 것)이라곤 황량한 언어로 일군 불모의 땅에 불과하다. 물러나고(退), 남고(殘), 견디는(忍) 단계를 거쳤지만 창조하는(創)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한 채. 그 과정에서 내가 남긴 계통 없는 단상들과 잡문들은 어느 은둔기계의 희미한 흔적일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생각하고 산책하고 읽고 쓰고 견디며 살아간다.
자발적 유배로서의 은둔. 전면적이지 않은, 생활의 특정 부분을 유배시키기. 가령, 글을 쓰는 모든 밤은 작가에게 하나의 유배지다. (64쪽)
바이러스라는 예상치 못한 외부적 요인으로 내 간헐적 은둔이 상시적 은둔으로 장기화되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COVID-19는 은둔을 라이프스타일의 하나로 정립시켜가고 있다."
4_상(像)을 파괴하는 힘 : 파상력
은둔이라는 새로운 생활방식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실천할 것인가. 저자는 '파상력'을 말한다. 김홍중은 이전의 저서 <마음의 사회학>에서 벤야민의 '파상력'을 주제로 매우 흥미로운 글을 풀어낸 적 있다. 벤야민이 쓴 짧은 에세이 '파괴적 성격'을 인용하며. "파괴적 성격은 사물들을 파괴하여 파편을 만들며 그 파편들을 통하여 길을 낸다." 파괴로 시작하고, 파괴의 결과로 형성된 잔해 즉 폐허를 다시 구축하여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것. 파편을 수집하는 동시에 이것들을 재구성하는 능력. 파상력은 "상(像)을 파괴하는 힘"이다. '파괴-폐허-구축'으로 이어지는 벤야민 특유의 사유 체계가 드러나는 지점이다. 저자는 파상력에서 출발하여 프루스트, 베르그송, 프로이트, 아감벤, 보들레르를 인용하고, 벤야민의 유명한 개념들 즉 '역사의 천사'나 '꿈과 각성의 변증법' 그리고 '소실점 구원'으로 텍스트를 확장한다. 그리고 구원은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소실점으로 정립된다는 것, 실체화된 구원의 이미지를 부수는 파상력 속에서 끝없이 소실점을 향하여 가는 '희망의 원리(에른스트 블로흐)'를 역설한다. 벤야민 텍스트 내부에서만 다루던 '파상력'의 개념을 끌어내 근대의 파괴적 역동성과 연결시키고, 모더니티를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주요 개념으로 '파상력'을 재규정한다. 매력적이고도 흡인력 있는 글이었다. 그 '파상력'이 <은둔기계> 안으로도 편입된다. 보다 간결하고 응축된 단상의 형식으로.
# 파상은 상상과 대립한다. 부재하는 무언가를 현존시키는 것이 상상이라면, 현존하는 것의 공성(空性)을 직관하거나 체험하는 것이 파상이다. (...) 파상은 파괴와 분해, 그리고 무언가의 나타남을 모두 내포한다. 그 대표적 체험은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각성의 순간 우리는 과거의 꿈-세계의 파산을 아프게 겪는 동시에 현실을 다르게 지각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 파상은 단순한 환멸이나 실망이 아니다. 그것은 환멸이나 실망을 통한 자아의 변형이다.
# 파상은 행위가 아니라 감수이다. 파괴는 일어난다. 닥쳐온다. 발생한 파상을 겪어낼 수 있는 힘, 외면하지 않고, 부인하지 않고, 다른 허구를 또 지어내어 리얼리티를 은폐하지 않고 그것을 겪어낼 수 있는 힘, 그리고 이를 통해 자아를 제한하고, 삭감하고, 변형시킬 수 있는 힘. 페이션시patiency.
# 파상 이후, 우리는 은둔기계가 된다. 지난 시절의 꿈이 붕괴한 자리에서 우리는 흩어진 채 다시 천천히 작동하며 은신처를 만들어간다.
- 같은 책, '파상력' 중에서
은둔의 기질에서 은둔할 줄 아는 기계로, 파상과 각성의 순간에서 파편 이후 재구축의 삶으로. 꿈이 붕괴한 자리에서 천천히 은신처를 만들어가는 마음. 그것이 은둔의 마음일 것이다.
은둔의 마음으로 새로운 연결을 상상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할 때이다. 저자의 말처럼 이제 "공존은 삼엄한 거리를 전제로" 하기에.
모든 것과 거리를 둔 채 원의 중심에 머무는 자들만이 생동감 있는 공존을 실천할 수 있다. (60쪽)
5_냇가에서 흐름을 바라보다 : 관조와 무심
관조를 방관의 이름으로 배척하던 때가 있었다. 참여,와 의무,라는 이름을 내세우면서도 석연찮은 느낌으로 움츠러들었던 경험. 사르트르의 '앙가주망' 개념에 위축되던 때였다. 나는 주로 '바라보는' 자였는데, '바라본다'는 행위가 모종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던 시대(80학번대 선배들의 시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시간의 흐름을 통해 이제 '바라보는' 행위의 가치를 다시 인식한다.
# 역사가 자신을 '비껴가는' 자리를 발견할 것. 흐름을 바라보되, 흐름에 휘말려 쓸려가지 않을 것. (63쪽)
# 은둔기계는 세계를 바꾸거나, 계몽하거나, 비판하려는 열정이 없다. (...) 은둔기계는 지사(志士)가 아니며 선비도 아니고 열사도 아니다. 그는 생존주의자다. 생존은 그에게 지상의 가치다. 다만, 그 지상성(至上性)은 신중하게 은폐되어 있다. (65쪽)
이 책은 서양 사상의 세례를 받은 저자가 동아시아적 정신과 겹쳐지는 지점의 풍경을 보여주는 방향으로도 흐른다. 특히 책의 뒷부분에 해당하는 '필로-조에'라는 장을 좋아한다. 윤리도 도덕도 미학도 아닌 '바라보는' 것의 가치를 말한다. 클로즈업하지 않는 에드워드 양의 카메라가 가진 "격렬한 무심의 시선"에 대해, "먼 거리에서 바라보아야만 살아낼 수 있는 무엇"으로서의 인생에 대해, "개입하지 않는 것, 개입할 수 없는 자리에서 바라보는 것, 어쩔 수 없다는 것을 통감하면서도 바라보기를 멈추지 않는 것,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에 대하여.
# 냇가에 앉은 한 인간이 세상을 비추는 물의 흐름을 관조하고 있다.
# 이것은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y)이 아니라 생에 대한 사랑(philo-zoe)이다. 필로-조에. 정치적 삶(비오스)이 아니라 생물학적 삶(조에). (...) 더 나갈 수 있는데 멈추는 힘이 참된 힘이다. 공자 사상의 본령에는 냇가에서 정신을 놓고 흐름을 바라보는 저 은둔기계가 있다.
#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그치지 않는구나. 逝者如斯夫, 不舍晝夜." 이것이 유교다. 여기에는 희망도 절망도 없다. 저 말이 있어서 <논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 같은 책, '필로-조에' 중에서
"희망에서 벗어나는 힘이 파상력이라면 절망을 깨는 힘도 파상력"이라고 했다. 파상력은 삶을 향한다. 지금 여기의 세속적 일상에 대한 단호한 긍정. 은둔의 마음은 삶을 향한다.
무심(無心)하고 싶다. 더 격렬하게.
(2020-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