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일, 있음과 없음에 관한 단상

네 번의 기일을 치르고 나서 - 송승환의 시 '병풍'에 부쳐

어머니가 없다 부를 것인가


어머니가 있다 부를 것인가


- 송승환,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 문학동네, 2019, ‘병풍’ 중에서




어머니의 장례 풍경을 이렇듯 시적 언어로 전환시키는 감각. 단어들을 무성의하게 툭툭 던지는 듯하지만 읽다 보면 알게 된다. 시인의 손끝에서 집요하고 끈질기게 버려지고 벼려진 말들이라는 것을.


송승환은 '있다'에 천착하는 시인이다. 그의 세 번째 시집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의 '시인의 말'은 아예 다음과 같다.


나는 있는다



있다,가 아니라 있는다,이다. '있음'과 '없음'이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시집 전체를 관통한다.


송승환


그는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 '믿는다' 대신 '믿어본다' 쪽에 마음을 기울이게 된다고 말한 적 있다. 믿어본다, 이것이 삶의 윤리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고. 부른다 대신 불러본다. 있다 대신 있는다. 그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


그는 '있다'에 집중하는 시인이자, 기존의 의미가 지워지고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는 자리로서의 음악적 효과를 중요하게 여기는 시인이기도 하다. 글자로 찍힌 그의 시를 눈으로 읽을 때와, 그가 자신의 목소리로 낭송하는 시를 들을 때 사이의 간극은 상당하다. 어느 시나 그럴 테지만, (행과 행 사이 공백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시는 특히 더 그렇다. 그가 낭독한 이 시집의 첫 번째 시 '이화장'은 부사들로만 이루어진 기묘한 시다. 눈으로 읽을 때는 알 수 없었던 묘한 리듬감과 파괴력이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온다. 시인은 (13줄로 이루어진) 이 시를 5시간 동안 썼다고 밝혔는데, 부사들의 선택과 배치, 감정의 고조, 박자와 속도까지 신경 쓰며 계속 입 밖으로 소리 내 읽어가면서 썼다고 했다.


리듬과 강약과 박자. 시집의 제목이 포함된 두 번째 시 ‘심우장(尋牛莊)’을 보자.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 그친다면 당신이 드러난다면 마침내 당신이 밝혀진다면 이름은 부서져서 이름들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적어도 이른바 이제껏 허투루 이토록 한층 한달음에 함께 여름에 겨울에 남으로 북으로 좀처럼 자주 바닥으로 창공으로 바람으로 눈으로 영원히 절대로 가령 깊숙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이를테면 솟구치듯 불쑥 마치 오히려 한결같이 완전히 헛되이 가까이 아니면 이윽고 그것뿐인 양 마치 아무것도 어떤 것도 더하지도 덜하지도 송두리째 봐란듯이 숫제 똑같이 아니 여기에 거기에 이미 살며시 밤마다 온전히 언제나 그러나 전혀 어쩌면 예외로 대부분 아마도 그처럼 그토록 텅 텅 그토록 그처럼 아마도 대부분 텅 텅 당신이 걸어나간다면 끝까지 예외로 어쩌면 전혀 그러나 언제나 온전히 밤마다 살며시 이미 거기에 여기에 아니 똑같이 덜하지도 더하지도 어떤 것도 아무것도 마치 그것뿐인 양 이윽고 아니면 가까이 완전히 한결같이 오히려 마치 불쑥 솟구치듯 마침내 당신이 밝혀진다면


- 송승환,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 ‘심우장’ 전문


“지나친 자기검열의 불모성과 서정의 부족”으로 비판받을 수 있는 그의 시에 대해 평론가 황현산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마음이 메마른 것이 아니라 감정이 가장 낮게 가라앉은 순간을 관찰과 생각의 표준으로 삼을 뿐이다. 그는 자신이 타기하는 말에서까지도 명상적이며 거기서 구원의 빛을 보려고도 한다.

- 황현산, <잘 표현된 불행>, 난다, 2019, 650쪽


나는 '사물과 말'의 관계를 극도의 미니멀리즘으로 밀고 가는 그의 태도에서, 사물에 직접 가닿으려는 치열한 자세에서, 일종의 구도자적 모습을 본다.


현실의 세부가 초현실을 만들듯이, 송승환의 장기인 말의 섬세한 선택과 정교한 배치는 자주 계산과 논리를 몽환의 형식으로 바꿔놓는다. 꿈이 이성과 논리를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범접할 수 없도록 섬세한 이성이며, 가닥을 짐작할 수 없도록 중층으로 얽혀 있는 논리일 뿐이다. 이지적인 시인 송승환의 자기검열은 꿈과 환상에 대한 배척이 아니라 가능한 한 가장 끈질기고 확실하게 그것들과 교섭하는 방식이다.
(위의 책 652쪽)


네 번의 기일


올해 네 번의 기일을 치렀다. 시어머니의 첫 생신 제사, 엄마의 열두 번째 기일 제사, 시어머니 첫 기일 제사, 그리고 지난 주말에 치른 시아버지의 두 번째 기일 제사. 메모를 뒤적여보니 열 번 이상 '기일'에 대해 언급한 기록이 있다. 기일이 다가올 즈음, 혹은 기일 다음날 나는 늘 무언가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삶과 죽음의 얄팍한 경계에 대하여, 삶과 죽음이 구분은 될지언정 구별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기일의 풍경, 있는 자와 없는 자, 있음과 없음,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가에 관하여, 존재 그 자체에 대하여.


송승환의 세 번째 시집엔 유독 ‘어머니’가 많이 나온다. 어머니의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시인은 언어로 분투한다. (어디선가 읽은 기억으로 시인은 어릴 때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했다고 한다.) 이 글 처음에 그의 시 ‘병풍’을 인용한 것도, 매번 마주하는 기일의 풍경과 겹쳐지는 이미지가 있어서일 것이다. 병풍 앞에(혹은 뒤에) 현존하는 어머니(혹은 아버지)는 없다. 부를 것인가. 병풍 앞으로 불려온 망자는 보이지 않지만 ‘기억되고 불리고 읽힘으로써’ 그리고 그렇게 ‘믿어짐으로써’ 거기에 있다. 부를 것인가.


1 나는 / 읽는다 //

2 어머니 / 없다 // 흰 리본 / 검은 정장 // (...) 흰 종이 / 검은 잉크 // 나는 읽는다

3 자정 / 그리고 어머니 나타난다 // 어머니 흰 종이 위로 걷는다 / 검은 잉크 발자국 찍힌다 // 나는 어머니 따라 걷는다 // (중략)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 읽을 것인가


- 송승환,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 ‘책’ 중에서


망자가 '있다'는 막연하고 모호한 감각. 망자는 없지만(보이지 않지만) 있다고 '믿는' 공식적인 날로서의 기일에 대하여 생각해보고 싶었다.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없다고 해서 믿지 않는 것도 아니다. 보임,과 믿음,의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고 싶은 날. 보이지 않지만 있다,는 감각은 단순히 믿음의 문제인가. 결국 존재론적 질문으로 귀착되고 마는 생각들.


돌 바깥에 있다 // 돌을 바라본다 / 밤이 시작된다 // (...) 자정 / 복도의 밤 // 녹슨 철문 / 복도의 밤 // 열렸다 / 닫힌다 // 발 아래 계단이 있다 / 믿을 것인가 // 나는 있다 / 믿을 것인가// (중략) 계단 계단 계단 // (...) 본다 // 만진다 // 맡는다 // 믿는다 // 그림자 // 믿을 것인가 // 돌은 돌이 있는 곳에 있다


- 같은 시집, ‘또 하나의 목소리’ 중에서


있음과 없음


친구의 소개로 송승환의 첫 번째 시집 <드라이아이스>를 만났을 때 생각보다 당황하지 않았다. 그의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난감해하는 친구의 입장도 동시에 이해했다. 절제된 단어 사용과 건조한 톤,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흥미로웠다.


산과 산 사이에는 골이 흐른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골과 왼쪽으로 돌아가는 산이 만나는 곳에서 눈부신 햇살도 죄어들기 시작한다 안으로 파고드는 나선은 새들을 몰고 와 쇳소리를 낸다 그 속에 기름 묻은 저녁이 떠오른다 한 바퀴 돌 때마다 그만큼 깊어지는 어둠 한번 맞물리면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떠올랐던 별빛마저 쇳가루로 떨어진다 얼어붙어 녹슬어간다


봄날 빈 구멍에 새로운 산골이 차 흐른다


- 송승환, <드라이아이스>, '나사' 전문


'사물'과 '사물' 혹은 '사물'과 '나'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경험. 쉽게 읽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난해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소위 '시적' 장치를 제거하고 사물들에 직접적으로 가닿으려는 의도를 느낄 수 있었다. 사물들에 최대치로 근접하는 동시에 아예 그 속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랄까.


나는 세계에서 지워지고 있다


나는 내 몸속을 울리며 사라져가는 그녀의 모든 말을 증폭시킨다


나는 말한다


- 송승환, '마이크' 전문


이러한 경향의 연속선상에 놓인 두 번째 시집 <클로로포름>. 표제작 ‘클로로포름’ 중 “사물을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 낱말은 마비되어 잠들어간다”는 구절은 이 시집을 응축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이어지는 ‘있는다’라는 표현. 세 번째 시집의 자서(自序)를 예고하듯.


“내 입술에서 이름은 투명하게 타오른다 / 아름다움은 불리워지지 않고 / 깨어나지 않은 채 있는다”


- 송승환, <클로로포름>(문학과지성사, 2011), ‘클로로포름’ 중에서


언어로 호명되지 않은 채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있는다’라는 말을 골랐을 것이다. 규정될 수 없는 존재의 ‘있음’을, 일반적 의미의 ‘있다’ 개념과 구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의 시를 읽다 보면 '나'와 '사물'(이를 편의상 '타자'라 부르자)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둘이 아닌 하나라는 감각을 또렷하게 체감할 수 있다. 세 번째 시집에 수록된 '있다'라는 제목의 시를 보자.


(...) 내가 가득 차 있으면서 단단하게 비어 있었을 때 내가 시간의 흐름 속에 있었을 때 내가 과거와 현재를 지나 미래로 나아갔을 때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운동을 시작했을 때 어둠 속에서 분별할 수 없었을 때 돌연 빛이 나를 비추었을 때 내가 흩어졌다 모이고 합쳐졌다 떨어지고 다가왔다 멀어졌을 때 내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덩어리였을 때 (하략)


-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 '있다' 중에서, 51쪽


시간의 흐름 속에서 흩어졌다 모이고 합쳐졌다 떨어지는 ‘입자들의 우연한 총합’으로서의 나를 생각해본다. 내 앞에 놓인 플라스틱 컵이나 나의 육체나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선 같다고 볼 수 있다. 어느 순간 내 몸을 이루는 입자들이 흩어져 흙 속으로 공기 속으로 물 속으로 불 속으로 사라진 듯 보일 때조차 흩어진 것들은 다시 다른 물질을 예비하는 순환의 과정에 놓이리라는 상상. 나는 흩어져 보이지 않게 되지만(=없지만), 나를 구성하던 입자들은 여전히 ‘있는’ 상태로 남게 되리라는 것. 그렇다면 나는 없는 것인가 있는 것인가. ‘생명’과 ‘영혼’의 문제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는 ‘플라스틱’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모든 사물 속에서 기다린다 // 모든 것이 있다 // 모든 것이 되어가고 있다”


시집 마지막에 수록된 '검은 돌 흰 돌'이라는 제목의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두 개의 무덤 / 사이에서 태어난다


없음과 없음 사이에 있음이 있다. 있음과 없음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형상화'의 문제. 이것은 존재를 묻는 행위이자, 모호하고 흐릿한 세계에 던지는 시선일 것이다. 모르는 영역을 사유하는 것. 시집의 전체 구성이 ‘만약-어쩌면-아마도’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모르는 영역을 탐색하고 가까스로 부려놓은 말의 흐름이 저 순서와 같지 않을까. 나는 송승환이 몰두한 ‘있다’라는 단어를 차례대로 대입해본다. 만약 있다면 - 어쩌면 있을지도 - 아마도 있기를.


기일이 돌아올 때마다, 삶과 죽음이 구분은 될지언정 구별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송승환 시집을 관통하는 (있는다,의 명사형으로서의) ‘있음’ 역시 ‘있다’와 ‘없다’라는 이분법적 구별의 차원을 넘어서서 그 둘을 가로지르는 중도의 자리에 위치하는 것은 아닐까.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혹은 있는 동시에 없는 것은 유무의 양변을 떠난 ‘중도’라고 할 수 있을까? 운동이나 변화, 생성을 다루려는 순간 우리는 있음과 없음 같은 이항대립(양변)을 떠나야 한다. (...) 중도는 있음과 없음을 떠나 일종의 존재론적 상태를 표현하는 개념임을 보여준다. (...) 중도란 진위와 선악 같은 양자의 ‘중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양자를 떠나서 사태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길이다. (...) 극단의 중간이 아니라, 극단을 넘나들며 해체하는 횡단의 사고, (...) 그것이 중도의 사유다.

- 이진경, <불교를 철학하다>(휴, 2016), 8장 ‘중도의 존재론’ 중에서


존재를 묻다


일찍이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이진경은 송승환의 시를 '존재론적 접근'으로 파악했다. (이진경은 '존재론'에 천착한 연구자이기도 하다.) 2년 전쯤 '문학과 예술의 존재론'에 관한 그의 글을 상당히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다. 일부를 옮기면 이렇다.


문학은 왜 철학보다 존재론적인가?

'있다'가 '이다'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처럼, '있음'을 다루는 존재론은 '~임'을 다루는 인식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성질로 다루는 한 존재론은 불가능하다. 인식론이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확실한지 아닌지, 어떻게 우리는 그 확실한 규정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면, 존재론은 '무엇인지'를 알든 모르든 '있음'을 묻는다. 확인할 수 없는 '있음', 규정성을 갖지 않는 존재는 무규정성의 어둠이다. 인식론이 빛을 통해 확실한 규정성을 얻고자 한다면, 존재론은 본질적으로 어떤 빛도 없는 어둠을 사유하고자 한다. 그 어둠의 존재에 대해, 어둠으로서의 존재가 갖는 힘이나 능력에 대해 사유하고자 한다. 우리에게 진정 새로운 삶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나 확실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알지 못하는 것, 있음을 어렴풋이 감지할 수는 있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 존재를 묻는 질문은 누구인지 알지 못해도 중단되지 않는다. 존재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을 때에도 중단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하는 게 분명하다면 그 질문은 중단된다.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 모호할 때, 존재론적 질문은 계속 던져진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론은 어둠을 향해 던지는 시선이다. 존재론은 어둠을 향해, 무언가 있는지 없는지 묻고 또 묻는 물음이다. 그 어둠 속에서 그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존재가 뜻하지 않은 어떤 사건으로 솟아오르길 기다리는 기다림이다. 왜 그런지 알지 못하지만 좋아하는 것, 무엇인지 모르는 채 다가가는 것, 이유도 모르는 채 휘말리는 것, 때론 감당할 수 없는 것을 향해 다가가는 것, 불행이나 실패로 보이는 사태 뒤에 숨은 것을, 보이는 것과 다른 어떤 것이 있음을 끈기 있게 주시하는 것, 그것이 존재론적 삶의 방식이다.

(...) 문학은 언제나 확고해 보이는 것의 취약함을 보려 하고, 명료하고 뚜렷하게 규정된 것을 모호한 다의성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많은 경우 문학은 희망보다는 차라리 절망에 다가가려 하고, 빛이 아닌 어둠 속을 방황하고자 하며, 확실한 이유를 찾기보단 이유 없이 말려드는 사태를 다루고자 한다. 밝은 진리 속에서 어둠을 보고자 하며, 따뜻한 봄기운에서조차 죽음의 냄새를 맡고자 한다. 그런 어둠과 방황 속에서 다른 삶의 출구를 찾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문학은 철학과 반대로 본성상 '존재론적'이다.

- 이진경, '문학과 예술의 존재론'에 관한 강의록 중에서


당시, 인식론적 질문을 던지려 애쓰다가 체념하듯 존재론적 질문에 퍼질러 앉은 나의 하릴없는 시도들에 싱긋 미소를 던져주는 느낌이었달까. 존재론적 질문을 계속 던지는 것, 존재론적 삶의 방식을 견지하는 것에 대해 묘한 지지와 위안을 주는 글이었다. 있음을 어렴풋이 감지할 수는 있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에서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는 말. 그런 차원에서 송승환의 시는 무엇/누구인지 알지 못해도 중단하지 않고 계속 던지는 ‘존재를 묻는 질문’처럼 보인다. 확인할 수 없는 ‘있음’(형상화할 수 없는 것)의 형상화를 위해 끝까지 말하려는 자의 시도. 나는 이것을 송승환의 시에서 읽는다.


다시 기일로 돌아와서. 어머니를 부른다. 아버지를 부른다. 가족들의 안부를 전하고, 당신이 생전 좋아하던 음식을 올렸노라고 상세히 고하기도 한다. 이 또한 ‘형상화할 수 없는 있음’ 앞에서 인간이 던지는 물음과 시선 아니겠는가. 어쩌면 그 물음과 시선의 방향은 우리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202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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