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시

정지돈의 <영화와 시>에 부쳐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0_영화 + 시

영화와 시. 이 두 단어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위력은 크다. 최근 몇 년간 내 머릿속을 차지해온 가장 큰 두 가지 영역이 시와 영화일 것이므로. 이 둘을 한데 묶어 생각하게 된 계기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이다. 나는 오랫동안 홍상수 영화를 ‘시’라는 키워드로 꿰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은밀히 키워왔는데, 늘 그렇듯 미적거리며 미루어오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했다.


1_계획

2년 전이던가. 나는 (내게만) 은밀하고 야심찬 이 계획을 평론가 J에게 처음 털어놓기도 했다.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당시 개봉한 <강변호텔>에 이르기까지 홍상수 영화는 빠짐없이 보았노라고, 홍상수 영화에 대한 (신뢰할 만한) 평론가들의 글도 꽤 찾아 읽었노라고 말했다. 얼마 뒤 그는 내게 영화평론가 정한석의 평론집 <성질과 상태>를 건네주었고, (홍상수 영화에 관한 한) 독특하고 탁월한 글들 앞에서 나는 짜릿해지는 동시에 전의를 상실했다.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밑줄을 긋는 나의 심정은 이런 것이었다. ‘고마워요,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이렇듯 정확하고 치밀하게 표현해주어서!’ 나는 홍상수에 대한 작가론을 쓰고 싶었던 걸까. 영화와 시를 묶어 뭔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2_정지돈

내가 아는 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읽기 어려운 소설을 쓰는 젊은 작가는 정지돈이다. 그의 소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소설에 대한 통념을 무자비하게 무너뜨린다. 어쩌면 그 무너뜨림 자체가 소설가의 의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젊은작가상 대상을 받은 그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읽다가 든 생각이다). 그(의 소설)에 대한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가 ‘다르게 쓰는’ 작가라는 사실만은 틀림없다는 것. 일부 마니아층이 있다는 것.

역사적 사실, 실존 인물들, 낯선 이국의 지명과 이름들, 다양한 분야에 걸친 지적 호기심과 편력이 빚어낸 결과물이 그의 소설일 것이다. (비판적으로 말하면) 자칫 현학적으로 보이기 쉬운 소설, (좋게 말하면) 지적 자극을 충만하게 받을 수 있는 소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끝까지 제대로 읽지 못하고 중간에서 여러 번 건너뛰곤 했다.

인접 영역을 문학으로 끌어들여 신선하고 파격적으로 재구성해내는 실력(실력임을 인정해야 한다)에 주목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굳이 소설이라는 형식에 얽매여 있을 필요가 있을까. 이런 스타일로 산문을 쓴다면 아마 두 가지 느낌으로 갈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취향을 과시하는) 편집숍처럼 구성된 지식의 백과사전이거나 아니면 좀더 솔직하고 유쾌한 에세이가 되거나. 그런데......정말 산문이 나온 것이다. 그것도 영화와 시를 묶어서! 제목마저 <영화와 시>. 나는 흥분했다. 내가 잠시 잊고 있던 영화와 시의 조합을 이렇게 대놓고 전면에 내걸다니. 솔직하고 유쾌한 에세이 쪽에 기대를 걸고 <영화와 시>를 읽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3_영화와 시

영화와 시. 둘 다 한때 빠졌던 분야이다. 어쩌면 지금도 현재진행형. 그러나 결과를 목적하지 않고 과정으로 즐기는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달라진 점이다.

영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언제부터였던가.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시작되었나. 아, 한국영화에 한해서는 그렇다. 그보다 더 이전. 대학교 시절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400번의 구타>와 <줄 앤 짐>을 보고 난 다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후 대학로에 있는 동숭시네마테끄를 들락거리고 캠퍼스에서 어쩌다 상영되곤 했던 유럽 예술 영화들을 챙겨 보았다. 소위 고전 또는 걸작(으로 회자되는 작가주의 영화)들을 찾아다녔다.

문학과 영화의 공통분모는 서사 텍스트. 이에 더해 영화는 이미지와 시간의 흐름을 포착하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매혹적이었다. 졸업 후 첫 직장에서 우연히 영화 관련 서적을 한 권 번역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영화 이론과 역사, 테크닉, 인물들에까지 관심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카메라의 시선'을 의식하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그 '시선'을 문학의 '인칭' 개념에 겹쳐 생각해보기도 했다.


영화를 문학처럼 읽는다. 문학작품을 다루듯 영화 텍스트에 접근한 평론가들의 글을 읽는 것도 좋아한다. 책처럼 밑줄을 긋거나 페이지 귀퉁이를 접어놓을 수 없기 때문에 영화 보는 시간은 러닝 타임보다 늘어난다.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는 디지털 환경이 이럴 땐 나쁘지 않다. 나의 영화 보기 패턴은 책 읽기처럼 느리다. 수시로 멈춰 리와인드하거나 포착하고 싶은 대사를 옮겨 적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때때로 좋아하는 영화의 대본집을 손쉽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멈춰야 할 곳이 너무 많아서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영화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고 판단할 때에는 일단 일독(일견)을 한다. 그리고 다시 본다. 다시 보면서 복기하고, 생각을 촉발시킨 장면들 혹은 대사들로부터 무언가를 적어 내려간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보는 영화는 많지 않다. 드물게 만날 뿐이다. 대표적인 예가 타르코프스키. 최근엔 이창동의 <버닝>이 그랬다.) 혼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영화를 혼자 보(는 것을 선호하)는 이유다. 책과 마찬가지로 쓰고(=생각하고) 싶게 만드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어쩐 일인지 나의 영화 노트는 독서 노트와 달리 좀처럼 완결된 글로 이어지지 않는다. 왜일까. 문자 텍스트에서 문자 텍스트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독서 노트와 달리, 영상 텍스트를 문자 텍스트로 끌어오는 과정의 층위가 훨씬 복잡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정지돈의 글에서도 납득할 만한 답을 찾는다. 그는 연극영화와 문예창작을 전공했고, 그 독특한 이력은 <영화와 시>라는 책 제목에 걸맞은 것처럼 보인다. 이 책에 실린 열다섯 편의 글은 매력적이다 못해 마력적이기까지 한데, 영화와 시의 조합 앞에서 기꺼이 무장해제된 나의 태도 탓인지도 모르겠다. 시네필이었던 그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첫 번째 글에서 영화에 대한 나의 생각이나 태도와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만 띄엄띄엄 옮겨보면 이렇다.


내가 하는 행위는 영화를 소비하는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보지만 영화를 보지 않는다. (...) 내게 영화는 소비재다. 하지만 그렇다고만 하기엔 어폐가 있다. 영화를 진지하게 보고 생각한 기간이 너무 길기 때문이다. (...) 영화는 시네마테크나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고요와 집중을 동반해 보는 경이로운 행위다. (...) 미지의 현실과 마주하는 행위다. (...) 우리는 경이에 대한 감각을 상실했다. 영화는 이미지의 경이로움을 회복시킨다. 그것은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영상이나 효과 따위가 아니라, 그들(그곳)이 카메라 앞에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며 그를 두고 일어난 사건들의 흔적이다. 나는 그것을 시간이라 부른다.


(...) 내게 영화는 책이기도 했다. 파일화된 영화는 언제나 멈출 수 있고 다시 볼 수 있으므로 그건 나를 자유롭게 했다. 알렉상드르 아스트뤽이 예견한 카메라-만년필의 진정한 도래. (...) 하지만 영화를 좋아할수록 자유롭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 문제는 내가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이건 중대한 모순이다. 자유로움을 원하지만/자유는 싫다. (...) 시에 대해서도 영화에 대한 것과 거의 동일한 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를 좋아할수록 나는 1. 자유롭지 않으며 2. 고통스럽고 3. 병약해진다.


- 정지돈, <영화와 시>, 시간의흐름, 2020, '좋아하는 것 또는 좋아하지 않는 것' 중에서


이렇게 그는 '영화와 시를 좋아한다'는 것의 모순에 대해 말한다. 좋아할수록 자유롭지 않다는 것. 나는 직감으로 이해한다. 좋아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것마저 껴안아야 하는 부자유,라고 읽는다. 오독일지도 모르겠지만.


시의 시대가 아닌 지금 같은 시대에 시를 좋아하게 되면 그때의 고통은 성스러운 것이 된다는 점이다(음악과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보편성 또는 공동체 안에 들어감을 뜻한다. 시를 좋아하는 것은 별종, 차이를 원하는 사람이라는 신호가 된다). (...) 결국은 이 모든 것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게 문제지만(시를 건강하게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진짜 시'를 모른다, 고 '진짜 시'를 아는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진짜 시'는 모르지만 '진짜 시'를 아는 사람들은 아는 사람으로 '진짜 시'는 사람을 병들게 한다는 건 알고 있다. 문학+병=병. 물론 그들이 아는 것이 '진짜 시'인지는 모르겠다). (같은 책, 같은 장)


정지돈이 첫 번째 글에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서 영화와 시를 좋아하는 것(또는 좋아하지 않는 것). 즐기고 공감하고 감동받는 것으로 끝내기."


그가 영화와 시를 좋아했다가 (고통과 부자유의 과정을 거쳐) 그저 즐기고 공감하고 감동받는 것으로 끝내기를 결심하기까지의 '시간'을 가늠해본다. 그가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 (영화평을) 쓰다 보니 하나의 작품을 파고들어 분석하는 것이 너무 괴롭고 힘들었다고. 차라리 작품의 주변에서 어떤 맥락을 잡아 쓰는 것이 더 즐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진지한(이 말도 어폐가 있긴 하다. 전통적 혹은 전형적, 이라는 말이 적확할 듯) 서평(혹은 영화평)을 쓰지 못하는 딜레마를 그는 최근의 짧은 소설집 <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들>에서 평론가 캐릭터를 내세워 유쾌하게 꼬집어내기도 했다. (작품 속 평론가들은 공통적으로 힘들고 괴롭다.)

시를 쓰면 시적으로 써야 하고, 평론을 쓰면 관점과 논리로 무장해야 한다. 평론의 경우, 폭넓은 지식과 인용, 치밀한 분석과 사유, 독창적 시각과 표현력을 갖추어야 한다, 는 무언의 압력. 무릇 시/소설/평론/에세이는 이렇게 써야 한다, 는 특정 장르에 대한 규정과 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즐겁게 쓸 수 있을까. 정지돈은 첫 번째 글의 마지막 문장으로 그가 좋아한다는 작가 스텐 에길 달의 말을 인용했다. “시적으로 쓰지 마라.”


나의 결론은 이렇다. 시적으로 쓰려다 보니 시를 쓰지 못하고, 비평적으로 쓰려다 보니 평을 쓰지 못한다는 것. 시와 영화를 경험하고 생각하는 순간이 즐겁다가도 (시적/비평적) 글로 옮기려는 태세 전환을 하는 순간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는 것.


4_영화와 시와 나

에드워드 양이나 허우 샤오시엔 같은 대만 뉴웨이브 감독들의 영화를 보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나 <하나 그리고 둘>을 볼 때 나는 영화의 흐름에 나 자신을 내맡기는(아득하게 떠내려가는) 듯한 묘한 느낌을 받았다. '나'라는 주체가 영화 속 시간을 살고 있는 듯한 감각. 정지돈이 아피찻뽕 위라세타쿤의 인터뷰 내용을 인용한 것을 나는 다시 인용하고 싶다. “또 다른 영향은 시간에 관한 것입니다. 타이완 뉴시네마를 보는 것은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관찰하는 듯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모든 영화 평론은 에세이'라는 정지돈의 말은 타당해 보인다. 그리고 그는 “모든 비평은 일종의 자서전이다”라는 문장을 덧붙였다. (이것은 데이비드 실즈의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의 첫 문장이다.)


영화와 시의 관계에 대하여 써보고 싶다는 생각은 어쩌면 영화와 나, 그리고 시와 나,의 관계에 대한 메타적 시각을 확보하려는 시도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와 시 사이에 교집합처럼 끼어 있는 나 자신을 관찰하기 위한 시선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하는 자각.


처음 영화와 시에 대한 글을 쓰기로 했을 때는 영화와 시가 가진 불가분의 관계에 대한 시적이고 이미지로 가득한 에세이를 쓸 생각이었다. 이를테면 러시아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아버지인 시인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의 관계처럼. (...) 그러나 러시아 부자 관계가 어떻든, 글을 쓰면 쓸수록 영화와 시를 잇는 불가분의 관계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다시 볼 시간이 없다는 것도). 삶이 그렇듯 무엇도 필연적이지 않다. 동시에 이미 이루어진 것은 그 무엇도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삶 = 삶/삶


- 같은 책, '삶/삶' 중에서


정지돈 역시 시 수업을 들으며 오규원의 <현대 시작법>을 접했던 모양이다. 김수영과 백석의 시에 빠지고, 다음에는 이성복의 시에 빠지고, 국내외 주요 시집들을 섭렵해가며 시를 쓰기도 했던 나날들이 그에게도 있었다. 당시에 쓴 백 편의 시들 중 공개할 수 있는 시는 단 한 편도 없다는 말에, 합평을 주고받던 동료가 자신의 두 페이지짜리 시를 두 행만 남기고 지워버렸다는 일화에 씁쓸한 공감의 웃음이 나왔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이 깊어질수록 진위 판단이나 가치 판단이 더해지는 건 피할 수 없다. (...) 어떤 예술이건 그것을 깊이 좋아하는 일이 시간이 갈수록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더 많이 안다거나 더 좋아하는 건 무엇일까. 지적인 즐거움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깊이란 존재할 수 있을까. 내게 필요한 건 순수한 긍정과 기쁨이다.


- 같은 책, '거울이 다른 거울을 들여다보면' 중에서


순수한 긍정과 기쁨이 모자라 나는 근심해온 것일까. 순수한 긍정과 기쁨으로 가장한 허영과 스노비즘은 아니었을까.


5_브로드스키 방식으로 환상 만들기

누가 정지돈을 유머를 모르는 작가라 했는가. 진지함과 유머, 인용과 패러디의 조합이 글 곳곳에서 목격된다. 특히 러시아 시인 '이오시프 브로드스키'를 중심에 놓고 그가 펼치는 '작가 되기 과정의 3막 구조'는 매우 흥미롭다. 일단,


작가가 되는 과정은(또는 되지 않는 과정은) 아주 단순하게는 3막 구조를 가진다. 1) 환상에 빠지고 2) 환상이 깨지고 3) 환상을 만든다. (103쪽)


물론 3번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환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종의 기적이 필요하다. 그 환상의 예가 브로드스키이다. 1960년대 모스크바에서 국가 기관에 잡혀 재판을 받은 브로드스키는 '코듀로이 바지를 입고 횡설수설하는 한심한 삼류 시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정지돈은 자신의 단편소설 '창백한 말'에서 브로드스키의 시와 더불어 그를 반체제의 전설로 만들어준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나는 최근에야 이 소설을 끝까지 그리고 흥미롭게 읽었다.) 그가 잘 알려지지 않은 브로드스키에 환상을 품고 조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브로드스키는 반시대적이거나 반체제적인 것이 아니라 비시대적이거나 비체제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브로드스키의 방식은 이렇다. 1) 사회의 전형적인 롤모델을 따르지도 않고 2) 사회를 비판하거나 저항하지도 않으며 3) 자신의 시공에 존재하기. (110쪽)


이것을 다시 정지돈식 3막 구조로 가져오면 이렇게 된다. 그는 자신을 2막과 3막 사이에 위치시킨다.

1. 브로드스키(환상) : 자유의 투사로서의 시인

2. 브로드스키(환상 파괴) : 자유의 투사로서의 시인으로 자신을 위장하는 시인

3. 브로드스키(새로운 환상): 코듀로이 바지를 입은 시인? (115쪽)


정지돈은 여기서 (앞서 말한) 결론을 다시 수정한다.


이 책의 시작에서 말한 영화와 시에 관한 지금까지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서(또는 그것을 포함해서) 다시 영화와 시를 좋아하는 것, 다시 건강하게 경외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116쪽)


나의 위치를 가늠해본다. 아직 경외감을 잃지 않은(다행히도), 3막을 향한(방향성은 중요하니까), 막 오르기 전과 1막 사이 정도가 될까. 코듀로이 바지를 입은 딜레탕트, 라는 환상을 품고.


6_좋아하는, 계속 좋아할 수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좋아하는 영화를 옹호하는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을 할 때는 그렇지 않다. (...) 그러나 막상 글을 쓰려고 하면 그게 영화가 됐든 뭐가 됐든 말문이 막힌다. <피너츠>에 나온 샐리 브라운의 명언이 떠오른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이유를 물어보는 건 괜찮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는 이유를 물어보는 건 안 돼. 왜냐하면 그게 더 어려우니까." (139쪽)


정지돈의 필력을 감안할 때, 좋아하는 걸 말하는 게 정말 어려워서는 아닐 것이다. 그는 말한다. 작품 안으로 들어가 내적으로 얼마나 훌륭한지 증명해 보이는 것에 아무런 취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 분석이나 비평, 이론이 무용하고 방만하게 쓰이는 것을 충분히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 가장 큰 요인은 "재밌지 않다"는 것. 세상의 상투적이고 범용한 해석에 맞서는 것이 좋은 영화를 옹호하는 시네필의 일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태도는 다음과 같다는 것.


희망 없이 지속하기. 이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훌륭하지도 비참하지도 않고 보수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않으며 세계에 맞서거나 세계에 종속되지 않은 상태로(또는 둘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할 일을 하는 것. (같은 쪽)


흠, 이건 가망 없는 것에 가망을 거는 나의 태도와 비슷한 것인가. 자신의 할 일을 하는 것. 떨어져가는 연료처럼 희박해지는 감탄과 설렘과 의지에도 불구하고 자극에 반응하는 민감도를 높이(려 애쓰)는 것. 이왕이면 '감응'을 지향하며.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최근 어느 인터뷰에서 ‘어떤 영화를 볼 때 글이 쓰고 싶어지나?’ 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가령 두 편의 영화가 있다고 치자. 전반적으로 다 괜찮은데 특별히 어떤 장면도 기억에 남지 않는 영화가 있고, 반대로 누가 봐도 실패작인데 한 장면만은 굉장히 특출한 영화가 있다. 나는 전자에 관해 글을 쓸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흥미롭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자는 흥미롭다. 그 단 하나의 장면이 왜 나를 매혹했는가, 이런 생각을 안고 극장을 나서면 즐겁다. 글이 쓰고 싶어진다.

출처: 독서신문(http://www.readersnews.com)


공감한다. 인터뷰 기자의 말처럼 결국 진정한 비평은 대상(영화든 문학이든)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 속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흥미를 느끼고 매혹당하는 지점에서 시작하는 것. 그런 점에서 정성일이 말한 ‘오독’에 관한 의견에 나는 동의한다.


헤럴드 블룸이 말했다. 시에 대한 가장 정확한 해석들은 실수보다 더 나쁘다고.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공격적으로 오독한 비평이 가장 훌륭한 비평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오직 자신의 체험에만 충실할 때 가능하다. 그 체험이라는 것은 영화를 보고 있는 나와 그 영화를 쓰고 있는 나 사이에 놓여 있다. (같은 인터뷰)


훌륭한 비평을 쓰는 것은 나의 욕망이 아니다. 훌륭한 시를 쓰는 것도 나의 욕망이 아니다. 시(소설)와 영화를 더 잘 읽고 싶다는 욕망. 그 안에 투사된 작가의 포즈에 나의 것을 겹쳐보고 싶다는 생각. 모든 비평이 자기 해석이고, 모든 글쓰기가 자서전이라면, 결국 나는 ‘모르는 나’에 관한 (잠재) 영역을 탐색하고 알아가는 과정에 놓여 있을 뿐이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사실은 영화를 조금이라도 더 잘 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말한 정성일의 마음을 나는 알 것도 같다. 문학을 더 잘 읽고 싶어서 문학 작품을 창작하고 싶다는 나의 욕망이 정직한 것이기를! 내가 쓴 것들이 훌륭하게 보여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쓴(쓰는) 것을 스스로 납득해나가는 (순수한 기쁨으로서의) 과정이 즐겁게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나의 지향점일 것이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방향성이다. 무언가에 대한 경외감은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지만 호기심은 아직 남아 있다. 모든 것이 지루하다고 생각했지만-특히 세계문학전집 유에서 나오는 수많은 작품들, 문학상 수상작품들, 거장들의 신작들, 주목받는 신예들-모르는 것과 궁금한 것은 어디서든 나타난다. 모른다는 것은 몇 안 남은 축복이다. 알아가는 것은 몇 안 남은 기쁨이다. 대상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 대상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그 대상을 둘러싼 이미지를 통해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145쪽)


다행이다. 모르는 것이 넘치고 흘러서. 모르는 영역을 통해 꿈꿀 수 있는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어서.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할 수 있는 능력이 나는 여전히 필요하다. 재능이란 어쩌면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2020-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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