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의 나라 대만에서 배우는 슬기로운 지진 생활
어...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외마디.
지진이다.
동시에 주위를 둘러본다. 사람들의 얼굴이나 행동엔 당황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펑리의 권유로 국립고궁박물관의 몇몇 특별전시를 찾은 날.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독특한 소장품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유리 진열장에 코를 바싹 가져다 대고 초상화를 살피던 중 둔중한 흔들림이 감지된다. 곧이어 핸드폰 화면에 긴급재난문자가 뜬다. 1월 17일, 오후 1시 59분, 타이베이 시 베이터우 구에서 규모 5.7의 지진 발생. 한동안 이렇다 할 지진을 느끼지 못한 터라 새삼 싱숭생숭하다.
얼마 뒤 펑리와 만나 잠시 지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녀가 화롄(花蓮) 사람들에 관한 우스갯소리를 알려준다. 화롄은 대만 동부에 있는 지역으로 환태평양 지진대 즉 ‘불의 고리(Ring of Fire)’에 속해 있어 지진이 잦은 곳이다.
화롄의 한 식당에서 지진이 일어났다고 치자. 관광객들은 놀라 테이블 밑으로 숨거나 밖으로 뛰쳐나간다. 화롄 지역 주민들은 앉은 자리 그대로 (심지어) 흔들리는 식기를 붙잡고 식사를 계속한다,는 뭐 그런 이야기이다.
아무리 놀랄 만한 일이라도 그 횟수가 잦으면 내성이 생겨나고, 그 놀랄 만한 일은 일상의 한 풍경으로 편입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녀가 재미있는 이미지를 하나 보내준다. 지진이 발생했을 때 대처하는 세 나라별 국민의 반응.
1. 미국: 반사적으로 몸을 숙인다. (교육 받은 대로) 테이블 밑으로 재빨리 들어간다. 테이블 다리를 꼭 쥐고 몸을 웅크린다. (미국은 매뉴얼의 나라!)
2. 일본: 반사적으로 몸을 숙이는 동시에 핸드폰에 (트위터) 메시지를 남긴다. 테이블 밑에서도 트위터 기록을 남긴다. 과자를 까먹으며 트위터를 한다. (일본 국민의 기록하는 습성? 그리고 지진에 대한 내성.)
3. 대만: 별다른 미동이 없다. 테이블로 가까이 가는 듯하지만 과자봉지를 집기 위해서일 뿐. 과자봉지를 집어 원래 자리로 돌아온다. 과자를 까먹으며 SNS. (일상이 된 지진)
일본인에게도 지진은 일상에 스며든 현상이다. 10여 년 전 일본에 살 때 지진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도 그러했다. 한밤중에 침대와 장롱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다음날 호들갑을 떠는 내게 동료 직원들은 (요즘 표현으로) ‘어서 와, 지진은 처음이지?’라는 식의 미소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난 일요일 밤. 침대에 누워 책을 읽으려는데 갑자기 침대가 흔들린다.
어…지진이다…!
지난 번 박물관에서 내뱉은 어…어…라는 외마디보다는 다소 또렷한 외침이 튀어나온다. 지난 번보다 흔들림의 시간이 길다. 몇 초쯤 지났을까. 옆에 서 있던 남편도 꼼짝 않고 진동이 멈출 때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한번, 그리고 또 한번. 서너 차례 여진이 이어진다. 고층 건물에 살아서인지 흔들림이 비교적 심하다. 대만 기상국에 따르면 이번에도 규모 5.8이다. 여느 때보다 신경이 다소 곤두선다.
어제 펑리를 만나 다시 지진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기상 지진이 잦은 시기가 온 것이라 한다. 1999년 대만 대지진 이후 건축물에 대한 내진 설계 기준이 강화되었다는 이야기도 해준다. 그 이전에는 진도 5 정도에 맞추어 설계되었으나 1999년 진도 7.6의 대지진 피해 이후 진도 7에 맞추어 업그레이드되었다는 것이다. 최근 지질학자들에 의하면 대지진 주기가 도래하고 있어 향후 몇 년 안에 진도 8 혹은 9에 달하는 강진이 발생할 것으로 예측한다 하니 꽤나 심란한 이야기이다.
어젯밤, 자정 가까운 시각. 눈이 번쩍 떠진다. 흔들리는 침대. 동시에 핸드폰에서 울리는 경보음. 며칠 전 흔들림보다 강도가 세다. 시간도 좀더 길다. 이번에도 화롄. 진도 6을 찍었다. 나라별 기상청마다 측정 방식이 조금씩 다르기에 며칠 전 5.8 규모의 지진도 미국발 기사에는 진도 6.1로 보도된 모양이다.
어젯밤은 분명 더 센 놈이었다. 몸으로 확연히 느껴지는 차이. 대만 기상국에서 발표한 진도 6 규모의 지진은 오늘 아침 한국언론을 보니 6.4~6.5로 보도되었다. 화롄에 있는 한 호텔이 내려앉아 약 2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식까지. 체감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현지인의 불안과 공포가 가중되고 있다,고 보도된 기사를 읽으며 나의 불안과 공포 수위를 체크해본다. 펑리가 보내준, 지진에 대처하는 세 가지 자세를 보며 웃었던 나. 덜컥 놀라면서도, 뭔가를 (이렇게) 기록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지내고 있으니, 세 가지 양상에 고루 걸쳐져 있는 셈인가.
내가 어쩌지 못하는 절대적 사안에 대처하는 (개인적 차원의) 방법이란 과연 무엇일까. 게다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의 일이라면.
그저 오늘을 살 뿐이다. 사과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까진 아니어도 사과 한 알을 쪼개어 가족과 정답게 나누어먹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2018-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