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어두운 방과 밝은 방 사이에서

이사 후 증후군에서 벗어나기

# 이사 후 증후군 - 산만

이사한 지 3주가 되는 날이다. 바라던 나만의 근사한 서재가 생겼지만, 그리하여 '자기만의 방'에서 문장들이 술술 풀릴 것이라 기대했지만, 20일이 넘도록 제대로 된 문장 하나 쓰지 못하고 있다. 뭐라도 써야겠다는 생각에 늘어놓고 보면 두서없는 일기가 되었고. 그래,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일기인지도 몰라. 자기 검열을 싹 걷어내고 이사 후 증후군(이런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붙여본다)에 시달리는 산만한 정신을 의식의 흐름대로 적어내려가는 것.


새로 마련한 책상 위에는 (이사 기념을 빙자해 사들인) 책들이 쌓여 있다. 철학자 김진영의 아도르노 강의록, 수전 손택에 관한 책 두 권, 테리 이글턴의 문화비평론, 마거릿 애트우드의 글쓰기에 관한 책, 김찬호의 유머니즘, 좋아하는 시인 안희연과 신미나가 선별한 시집 한 권, 미학자 이해완이 쓴 불온한 것들에 관한 미학, 미술비평가 마틴 게이퍼드의 예술 기행기, 그리고 시인 백은선의 산문집 등등. 쓰고자 했던(혹은 메모해두었던) 글들이 전혀 진척을 보지 못하자 나는 분풀이하듯 이 책 저 책을 헤집어 파편적으로 읽는다. 현재 내 정서 상태에 어울릴 만한 코드의 책을 찾아보려는 심산.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와 에드워드 양의 영화를 파편적으로 본다. 영화 속으로 들어가기보다 영화의 특정 부분(발화성 물질)이 내게 흘러들어와 작은 불꽃이라도 일으켜주기를 기대하는 마음. 어느 것에도 집중하기 어렵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도 괜찮을 걸까,와 이렇게 하루를 보낼 수 있어 다행이다,라는 양가감정을 오간다. 다행히도 내 산만한 코드에 어울릴 만한 백은선 산문집이 뜻밖의 진정 효과를 제공한다. 자유로운 발산. 그녀의 시 세계와 다르지 않다. 시와 산문은 서로를 반영한다. 태생적으로 발산보다 수렴에 가까운 나의 성향이 그녀의 시(그리고 산문)에 끌리는 건 상대적 결핍이 가져오는 일종의 선망일 것이다.


# 너의 자유는 나의 결핍 - 모자람

몇 년 전 시인 K는 내게 백은선의 <가능세계>를 읽어보라고 추천했고, 나는 생각보다 '잘 읽히는' 그녀의 시들이, 아니 그녀의 시들을 '잘 읽고 있는' 내가 흥미로웠다. 그는 내게 '이렇게 써도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으리라. 이렇게 써도 괜찮은 걸까,와 이렇게나마 쓸 수 있어 다행이다,라는 양가감정을 오가는 내게 적절한 처방이었다. 시적으로 쓰지 마세요. 막 쓰세요. 제발. 그의 말에 동의의 미소를 지었던 기억. 틀에 갇히지 말자는 새삼스런 다짐. 물론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틀에 박힌 인간이었으므로. 틀을 벗어나려 애쓰지만 틀을 벗어날 용기는 없는 인간이므로. 그러니 틀 밖을 유유히 거니는 자들을 볼 때면 일종의 질투와 좌절을 느낄 수밖에. 동시에 내겐 없는 '자유로움의 한 형태'가 모종의 결핍으로 남아 나를 추동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가지지 못한 것은 지향의 대상이 되고, 대상을 향한 욕망은 나를 움직이게 만드니까. 결국 동기라는 것은 결핍이 이끄는 것. 무슨 말을 하려다 여기까지 왔나. '모자람'에 관한 생각. (마침 이 시점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6번 2악장 Les Adieux[고별]가 흘러나온다. 오늘의 BGM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모자람,에 관한 시를 쓴 적이 있다. 시인 R은 초고(도 아닌 메모)를 보고 좋다고 평가했고 나는 다소 고양되어 완결된 시 한 편을 쓰고자 애썼다. 어제는 생각다못해 그렇게 완성한 시를 다시 들추어보았고(쓰레기는 다시 돌아보지 말자는 나의 결심은 번번이 무너지고 만다), 단 한 줄도 건질 게 없다는 생각을 확인하고는 다소 우울해졌다. 아니, 이건 거짓말이다. 그 정도(내가 쓴 시를 보고 우울해질 정도)의 절박함이 있었다면 나는 이런 글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가벼운 체념이랄까. 가벼운 체념이 오래 반복되면 무거워질까 아니면 더욱 가벼워질까. 가벼워질수록 좋다, 혹은 가벼워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때론 그 가벼움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무겁게 느껴질 때도 있으니. '모자람'에 대한 시는 대충 이렇게 끝난다. "모자란 것이 넘치고 흘러 아무것도 모자란 것이 없다"는 식으로. (마침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 1악장이 흘러나온다. 유명한 3악장도 좋지만 지금은 1악장이 더 적절하게 느껴진다.)


모자란 것이 없다,는 느낌을 빠르고 강하게 들게 해주는 것은 일상의 순간에서 불현듯 온다. 어제도 단조로운 하루. 늦은 밤,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가 불쑥 말을 꺼낸다. 그 말이 나를 점화한다. 점화는 우연히, 뜻밖의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난다. 몇십 편의 글과 영화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던. 어쩌면 불이 붙을 만한 공기가 누적-형성되어 있었는지도.


# 점화는 불현듯 - 아이의 롤모델이 되다

아이 학교에서 수행평가로 자신의 롤모델을 영어로 쓰고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고 한다.

그랬구나, 넌 누구를 롤모델로 정했는데? 이번에도 아이유? (아이유 광팬이었던 아들은 중학교 때 자신의 롤모델로 아이유를 적어낸 적이 있다.)

아니, 엄마로 했어.

What??!! (잠시 말을 잃음)

여러 감정이 동시에 스쳐지나간다. 다소 고양된 반응을 보이는 내게 아들은 시큰둥하게 말한다. 너무 고마워하거나 감동할 필요 없어요. 딱히 롤모델로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서 그냥 엄마로 정한 거야.

물론 그렇긴 하겠지만......

아들은 롤모델(그러니까 나)의 장점과, 좌우명, 존경하는 이유, 롤모델이 좋아하는 것, 심지어 별명까지 줄줄이 써내려갔다고 한다. 인내심, 경청, 배려 등을 열거했고, 어려움(hardship)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꼽았으며, 커피와 책을 좋아하는 것까지 적었다고 한다. 하드십이라니! 대체 아이에게 비친 나의 하드십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생각하는 나의 하드십과 아이가 생각하는 엄마의 하드십 사이에는 얼마큼의 간극이 있을까. 프리젠테이션이 끝나고 영어 선생님은 네 엄마가 부럽다고 했다 한다. 그래, 중요한 건 내가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내가 누군가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한다. 나는 대체 무엇이 모자란다고 징징대는 것이냐. 내게 롤모델 따위는 없다. 그런데 누군가의 롤모델이 될 수도 있다니. 싫으면서 좋다. 좋으면서 이상하다.


백은선은 산문집 첫 장부터 시와 산문 사이를 우왕좌왕하는 자신의 민낯을 숨기지 않는다. "시를 쓰는 나는 종종 나를 능가한다. 산문을 쓰는 나는 한 문단을 끌어갈 호흡도 없는 바보다"라고 불안을 토로한다. "안녕하세요. 제 쓰레기를 읽어주세요!"라는 식의 자조 섞인 목소리(징징대며 우는 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내가 그녀 글에서 마음에 드는 리듬을 발견하는 지점이 있다면 아마 양가감정을 오가는 모순적 발화로부터 오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나는 내가 싫다. 나는 내 삶이 싫으면서 좋다.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하면서 안도한다. 나는 시인같이 말하는 걸 즐기지만 속으로는 시인같이 말하는 나를 약간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지금 나는, 마음속 새장을 열어 새를 꺼내고 그 새를 죽인 다음 새를 대신해서 하얗고 큰 돌을 새장 속에 넣는 이야기를 끝도 없이 쓸 수 있다. 그건 얼추 시 같은 얘기일 것이다. 그렇지만 내 마음속에 새장 같은 건 없어. 솔직히 시는 시고 산문은 산문이야. 실망해도 어쩔 수 없어. (...) 점점 커지는 자기검열. 나는 욕먹기 싫다. 나는 욕하고 싶다. 이 세상과 이 세상의 모든 추와 미에 엿을 먹이고 웃으면서 불에 타 죽고 싶다. 근데 안 그럴 거니까.


- 백은선,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 문학동네(2021), 12쪽


그러다가 또 이렇게도(시적으로) 적는다.


계통이라면 조립이며 배설입니다. / 줄에 묶인 두 발입니다./ 한 아이가 만들어낸 엄마입니다./ 벌레가 없는 깨끗한 뼈로 조립한 인간./ 그게 내 이름입니다.


- 같은 책, 13쪽


# 순전한 글쓰기 - 다시 깜깜함 속으로

"어떻게 해야 순전히 쓰는 일에 몰두하며 희열을 느끼던 순간을 재경험할 수 있을까."(같은 책 68쪽) 이건 백은선의 말이자 나의 심리 상태이기도 하다. (얼결에) 아이의 롤모델이 되어버린 지금보다, 아이의 학교 랩탑 비번에 ugly-mom으로 등극했던 몇 년 전의 (어글리했던) 내가 오히려 순전한 글쓰기 상태에 몰두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분노와 조바심이 동력이 되어주었던 시간이 지나고 그러한 감정이 사라진 상태에서 뭘 쓸 수 있을까 두려워하는 저자의 불안을 나는 왜 이해할 것 같은가. 마음은 그렇게 요사스러운 것. 모든 것을 의심하고 회의하고 부정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었던 글.


마가릿 애트우드는 수많은 작가들의 말과 글을 채집해서 글을 쓰는 '동기'에 관한 긴 목록을 만든다. 그리고 공통 요소를 찾는다.


장애물, 모호함, 공허함, 방향감각 상실, 황혼, 암전 등에 더불어 흔히 투쟁, 행로, 여정 등이 결합되어 있는 것, 즉 앞을 볼 수는 없지만 앞으로 길이 나 있으며 가다 보면 결국 앞을 볼 수 있게 될 거라는 느낌. 이것들이 바로 글쓰기 과정에 대한 수많은 묘사들의 공통 요소다. 나는 40년 전 한 의대생이 인체 내부를 가리키며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 속은 깜깜해요." 그렇다면 아마도 글쓰기는 어둠, 그리고 욕망이나 충동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속에 들어가서 운이 좋으면 어둠을 밝히고 빛 속으로 무엇인가를 가지고 나오리라는 욕망 또는 충동 말이다.


- 마거릿 애트우드, <글쓰기에 대하여>, 프시케의숲(2021), '서론: 미로 속으로' 중에서


깜깜함 속에만 머물러 있으면 깜깜함도 익숙해진다. 나는 아이의 '롤모델' 발언으로 잠깐 환한 방을 다녀온 기분이다. 되돌아올 밝은 방이 있다는 것은 내게 얼마나 큰 안도와 기쁨을 주는가. 운이 좋으면 어둠 속에서 빛 속으로 무언가를 꺼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 못지않게, 빛 속에서 어둠 속으로 끌고갈 (그리고 다시 빛 속으로 꺼내올)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역발상의 감각, 그 희미한 힌트를 감지한 날. 점화는 그런 식으로 희박하게나마 일어났고. 나는 산만함 속에서 어딘가에 다시 초점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다행이다.


(20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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