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리와 벚꽃 (feat. 영화 <앙 : 단팥 인생 이야기>)
어젯밤에는 몹시 바람이 불었고 잠깐 눈이 흩날렸다. 4월 중순에. 벚꽃도 거의 다 진 마당에.
벚꽃이 다 지고 나서야 벚꽃을 생각한다. 이 또한 '거리두기(distancing)'일 것이다. 너무 밀착된 대상(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사건이든 사태이든)을 찬찬히 살피기란 쉽지 않다. 벚꽃 한가운데 들어서 있을 때엔 벅차게 감각하기 바쁠 뿐.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보는 것이 의미 있는 이유는 시간적으로 또는 공간적으로 거리를 확보한 후에야 비로소 보이거나 느끼는 것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올 봄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거리두기'와 '격리'가 일상화되었고, 이런 팍팍한 일상을 안전하게 달랠 수 있는 방편 중 하나가 '산책'이 되었다. 마침 봄꽃이 올라오는 시기였고. 거의 매일 동네 탄천을 따라 걸으며 나날이 미세하게 변모하는 나무와 꽃을 바라보게 되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토록 하루하루 달라지는 봄의 정경을 관찰해본 적이 있던가. 거리두기와 격리라는 초유의 사태가 내게 가져다준 것은 평소 심드렁하게 지나치던 자연(특히 벚꽃을 위시한 온갖 봄꽃들)의 재발견이다.
# 격리와 벚꽃
'격리'와 '벚꽃'이라는 다소 이질적인 단어 둘. 이 두 가지 키워드를 아우르는 영화 <앙 : 단팥 인생 이야기>(2015)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키키 키린'의 연기가 사무치게 와닿기도 하지만,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깊고도 따스한 시선이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제목 앙(あん)이 팥소를 의미하는 것처럼 영화는 (단팥이 생명인) ‘도라야끼’ 가게에서 맺어진 세 사람의 연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단 것을 싫어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도라야끼 가게를 운영하는 중년의 남자 센타로, 센타로의 가게에서 단팥을 만드는 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 할머니 도쿠에(키키 키린 분), 매일 친구도 없이 혼자 가게에 들러 도라야끼를 먹는 여중생 와카나. 노년, 중년, 청소년 각 세대를 걸쳐 이들은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회와 ‘격리’되어 있다. 각자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채. 도쿠에 할머니가 센타로의 그늘진 과거를 얼핏 듣고 건넨 말처럼.
“인생마다 사정이 있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벚꽃. 영화 초반부, 카메라는 흐드러진 벚꽃 장면을 찬찬히 비추어준다. 벚꽃나무 아래 벅찬 표정으로 서 있는 도쿠에의 표정은 생의 환희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하다. 그녀의 지나온 인생사가 어떤 것이었든. 푸른 하늘과 화사한 햇살 아래 흔들리는 벚꽃을 감각하는 순간은 그 자체로 충만한 것이니까.
영화 후반부에서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왕벚나무로 돌아간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평생을 사회로부터 격리 당해온 삶을 뒤로 하고.
봄은 다시 오고, 도쿠에가 걸었던 벚꽃 길을 교복 입은 와카나가 걷는다. 우울한 얼굴을 걷어내고 환한 표정으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 코앞의 벚꽃에도 무심했던 (스스로를 격리시켜왔던) 센타로는 이제 무성한 벚꽃나무들 한가운데에 서서 (세상을 향해) 외친다. “도라야키 사세요!”
# 자연과 사물에 말을 거는 시심(詩心)
자연과 사물에 말을 거는 도쿠에 할머니.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면 그들이 손을 흔든다며 환한 얼굴로 함께 손을 흔들어주고, 단팥을 만들 땐 소중한 생명체를 다루듯 정성스럽다.
도쿠에가 새벽같이 나와 단팥을 만드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익어가는 팥들에 “힘내라”고 응원을 보내는가 하면,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팥들이) 예뻐질 때까지 지켜보며, 팥이 당과 친해질 때까지 오래도록 기다려준다. 조금씩, 살살, 조심스럽게 팥을 다룬다. 그녀 말마따나 팥들이 “힘들게 와줬”기 때문에 “극진히 모시는” 것. 팥소를 만들기 전 그녀는 이미 센타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단팥은 마음으로 만드는 거야.”
마음으로 주위 사물과 대화하는 그녀의 태도는 시심(詩心)에 가깝다. 그녀의 병에 관한 소문으로 가게 일을 그만둔 도쿠에. 어느날 그녀가 센타로에게 보내온 편지 내용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압축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부분이자 시인의 시선을 밀도 높게 보여주는 장면으로 다가온다.
"단팥을 만들 때 나는 항상 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것은 팥이 보아왔을 비 오는 날과 맑은 날들을 상상하는 일이지요. 어떠한 바람들 속에서 팥이 여기까지 왔는지 팥의 긴 여행 이야기들을 듣는 일이랍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언어를 가졌다고 믿습니다. 햇빛이나 바람의 이야기도 들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일까요? 지난밤엔 울타리를 넘어 불어오는 바람이 사장님(센타로)에게 연락을 해보라고 속삭이는 듯 느껴졌어요. 아무 잘못 않고 살아가는데도 타인을 이해하지 않는 세상에 짓밟힐 때가 있습니다. 또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도 있지요. 이런 인생 이야기도 들려줄 걸 그랬어요. 사장님은 언젠가는 사장님만의 특별한 도라야끼를 만들어낼 거라 믿습니다. 스스로 개척한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사장님은 해낼 수 있어요.”
도쿠에의 목소리가 잔잔히 깔리고, 물과 바람과 햇볕에 익어가는 팥의 모습이 지나간다. 아니 어쩌면 팥의 입장에서 바라본 자연의 풍광들일지도 모르겠다. 팥의 여정. 팥의 이야기.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각자의 언어와 이야기를 가졌다면 우리에겐 좀더 집중해서 보고 들어야 할 의무가 있을 것이다.
도쿠에가 녹음기를 통해 센타로와 와카나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는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 세상을 듣기 위해서 태어났어. 그러므로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못해도 우리는, 우리 각자는 살아갈 의미가 있는 존재야."
영화 곳곳에서 등장하는 보름달. 도쿠에는 보름달의 목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그날 보름달은 말했어. 네가 봐주기를 바랬다. 그래서 빛나고 있었던 거야.”
나의 시선과 경청을 기다리는 무수한 것들이 도처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나의 삶이 살 만한 것이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다,고 도쿠에 할머니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어느 해보다 꽃과 나무를 보고 듣는 시간이 많아졌던 올 봄.
다시, 봄을 보낸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들을 기다리며.
(202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