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 타지 않는 것들

김초희 감독 <찬실이는 복도 많지> (feat. 신미나 시 '싱고')


십년 넘게 기르던 개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나는 저무는 태양 속에 있었고

목이 마른 채로 한없는 길을 걸었다

그때부터 그 기분을 싱고,라 불렀다


싱고는 맛도 냄새도 없지만

물이나 그림자는 아니다

싱고가 뿔 달린 고양이나

수염 난 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 있지만

아무래도 그건 싱고답지 않은 일


싱고는 너무 작아서

잘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다

풍선껌처럼 심드렁하게 부풀다가

픽 터져서 벽을 타고 흐물흐물 흘러내린다

싱고는 몇번이고 죽었다 살아난다


아버지가 화를 내면

싱고와 나는 아궁이 앞에 앉아

막대기로 재를 파헤쳐 은박지 조각을 골라냈다

그것은 은단껌을 싸고 있던 것이다


불에 타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이상하게도


- 신미나, <싱고,라고 불렀다>(창비 2014), '싱고' 전문




이상하게도. 몇 개의 모티프들이 저희들끼리 스르륵 정렬이 될 때가 있다. 각자의 성질을 조금씩 녹여 접합점을 만들어내고 서로가 서로에게 자석처럼 들러붙어 일단 하나의 덩어리를 형성하는 것.


경위는 이렇다. 누군가의 시를 읽었고, 좋아하던 시를 떠올렸다. 그 시가 왜 좋은지 정확하게 진술하지 못한 채 여러 해가 흘렀고, 최근 우연히 (보고 싶었던)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영화를 보며 묘한 흥분에 휩싸였는데, 흥분의 중심으로 그 시가 다시 파고들었다. 사라졌지만(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라지지 않는 것들을 다시 생각했다.


시는 신미나 시인의 '싱고'였고, 영화는 김초희 감독의 독립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였다.



# 각본이 궁금한 영화 : 오즈-홍상수-김초희

홍상수 감독 영화 이후로 각본을 읽고 싶게 만드는 한국 영화는 오랜만이다. 감독의 경력을 모르고 보았음에도, 몇몇 모티프와 대사 스타일만으로 나는 홍상수의 냄새(?)를 즉각적으로 맡는다. 홍상수 영화만큼 각본이 궁금했던 영화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도쿄 이야기>였고, 따라서 <도쿄 이야기>의 감독용 각본이 실린 오즈의 산문집 <꽁치가 먹고 싶습니다>가 출간되었을 땐 바로 구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백수가 된 영화 PD '찬실'이 오즈 야스지로 이야기를 꺼내며 눈빛을 빛내는 장면, 그리고 <도쿄 이야기>가 심심했다고 심드렁하게 말하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불어 강사 '영'에게 언성을 높여가며 '별 게 아닌 게 별 거'라는 지론을 쏟아내는 장면은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 찬실에게 장국영이란 :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가

찬실 역을 맡은 배우 강말금의 연기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다. 그녀의 연기는 빛나는 대사와 맞물려 영화를 한층 더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의 독특한 매력은 김영민이 연기한 '장국영' 캐릭터에서도 스며나오는데, 장국영은 찬실에게만 보이고 다른 사람들 눈엔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이다. 찬실 안의 또 다른 찬실을 상징적으로 캐릭터화했다는 점에서, 찬실이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장국영'과 나누는 대화는 이 영화의 메시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쯤에서 실제 배우 장국영의 매력이 철철 넘쳐 흐르는 추억의 영화 <아비정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속 아비(장국영)가 흰 속옷차림으로 거울 앞에서 맘보 댄스를 추는 그 유명한 장면처럼 (장국영을 연기한) 김영민은 추운 겨울에도 흰 러닝셔츠와 팬티바람으로 스크린을 누빈다. 시네필 시절 이전에 순수하게 홍콩 영화와 장국영을 좋아했던 김초희 감독의 초심이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형상화된 것이리라.


끝까지 함께하고 싶었던 감독이 돌연 세상을 뜨고, 더이상 PD로 일할 수 없게 된 찬실은 함께 일하던 여배우의 집에서 파출부 일을 시작한다. 좋아하는 영화만 평생 하고 살 줄 알았던 자신의 삶에 뜻하지 않은 불행이 닥친다. 나이 마흔에 일도 돈도 집도 연인도 없는 싱글 여성의 적나라한 삶. 장국영은 찬실에게 '자기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모른다는 게 문제'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찬실은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하려 애쓰고, '영화 없이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방에 있던 영화 책들을 정리해서 버리고, 이에 장국영은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지만, 주인집 할머니(윤여정 분)의 말처럼 '버려야 채워지는' 시간을 통과하며 '사는 게 뭔지' 체감하는 과정일지 모른다.


찬실과 영이 나누는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할머니들은 다 알아요. 사는 게 뭔지."


한글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주인집 할머니는 콩나물을 다듬으며 오랜 삶의 연륜으로 퍼올린 대사를 무심하게 내뱉는다.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 대신, 애써서 해."


# 싱고의 기분


십년 넘게 기르던 개가 / 돌아오지 않았을 때 / 나는 저무는 태양 속에 있었고 / 목이 마른 채로 한없는 길을 걸었다 /그때부터 그 기분을 싱고,라 불렀다


찬실은 말한다. 목이 말라서 꾸는 꿈은 행복이 아니라고. 젊었을 땐 채워도 채워도 계속 목이 말랐다고. 채워지지 않는 갈증. 이제 그녀는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 안에 영화도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녀는 자신만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 찬실은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걸까. 적어도 자기만 몰랐던 자신의 복을 깨닫게 된 것인지도. 나는 뜨거운 불길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은 것을 생각한다. 그게 시인이 말한 싱고라면 싱고일 수도. 복이라면 복일 수도.


싱고는 너무 작아서 / 잘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다 / 풍선껌처럼 심드렁하게 부풀다가 / 픽 터져서 벽을 타고 흐물흐물 흘러내린다 / 싱고는 몇번이고 죽었다 살아난다


떠나는 장국영은 찬실에게 아코디언을 선물하고 찬실의 연주가 끝나자 찬실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한다. 제가 멀리 우주에서도 응원할게요. 찬실도 화답한다. 고마웠어요, 오래 기억할게요. 영화의 마지막은 하얀 설원이 펼쳐진 스크린을 지켜보는 장국영(여전히 흰 속옷차림의)이 기립 박수를 치며 객석을 떠나는 장면이다. 문득 헐벗음, 순수한 욕망, 벌거벗음, 민낯의 직시, 와 같은 말들을 떠올린다. 아궁이 속 하얗게 재만 남은 자리. 불에 타지 않는 은박지 조각처럼 마지막까지 반짝이며 남아 있는 (내 안의 혹은 당신 안의) 무엇을 생각한다.


불에 타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이상하게도


불에 타지 않는 마음. 어쩌면 그게 정말 나와 당신이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학? 예술? 철학? 글쓰기?

아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마음. 그 마음을 지속하고자 하는 상태 그 자체인지도.


오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삶. 대신, 애써서 하는 마음.


그런 마음을 지속하는 한, 나는(혹은 당신은) 참 복도 많지.


(20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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