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아이텔 그림 <스타디온>에 부쳐
1월 31일. 결국 전시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삼청동을 찾았다. 오기, 이상한 고집, 알 수 없는 외출의 욕구 등이 뒤섞인 채로.
학고재 소장전, 38도. 이거 말하는 거지? 하루를 투자할 만큼 가치가 있는 전시야? 그가 이렇게 물었다. 경기 남부에서 서울 북부까지 종단하는 동선은 아무리 대중교통이 편리하다 해도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가깝지 않은 거리였다. 관둘까?
팀 아이텔의 그림을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일이다. 기간은 넉넉히 남아 있군. 처음 기사를 볼 때만 해도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이런저런 일들에 밀려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전시 마지막 날이 되어서도 시간을 내지 못할 것을 나는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보고 싶은 그림이 있거든. 근처 다른 갤러리 전시도 볼 겸. 오랜만에 삼청동 산책도 할까 해서.
대구에서 팀 아이텔 전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 작년 여름의 일이다. 20년간의 그의 작품을 모은 <팀 아이텔_무제(2001-2020)>전. 마감일은 10월 18일. 거리도 멀었지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입맛만 다셨다. 장재민 개인전이 학고재에서 열린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고 전시 마지낙 날을 메모장에 적어둔 것도 지난 10월의 일이다. 11월 15일 전시 마지막 날까지 나는 전시장을 찾지 못했다. 가야겠다,가 가고 싶었다,로 바뀌는 과정의 반복이 나는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러니 팀 아이텔의 두어 작품과 장재민 그림 한 점이 포함된 학고재 소장전은 아쉬운 대로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던 것.
팀 아이텔의 그림을 처음 접한 것은 황현산 평론가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2013)를 통해서이다. 표지에 실린 그림이 눈길을 끌긴 했지만 황현산 선생의 웅숭깊고도 탁월한 글맛에 빠져 팀 아이텔이라는 이름을 새겨넣지는 못했다. 그의 그림에 좀더 강하게 끌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신형철 평론가의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 표지에 실린 <Boat>(2004)라는 그림이다. 두 책 모두 내가 몹시 좋아하는 평론가의 산문집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고 보니 황현산 선생의 또 다른 산문집 <사소한 부탁>(2018)과 복간된 평론집 <잘 표현된 불행>(2019)의 표지에도 팀 아이텔의 그림이 실려 있다.
그의 그림은 에드워드 호퍼를 연상시킨다. 혼자 있는 인물. 시선이나 표정을 파악할 수 없는 뒷모습 혹은 옆모습. 단순하고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공간.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 그림 속 인물의 내면을 응시하게끔 만드는 힘. 고립, 단절, 고독이라는 키워드.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라는 정형화된 수식이 따라다닌다는 것도.
<스타디온>이 불러온 생각들
학고재 갤러리에 걸린 팀 아이텔의 그림은 두 점. 그 중 눈에 띈 것은 열두 개의 작은 캔버스가 나란히 놓인 <스타디온(아레나)>(2001)이다. 각 캔버스에 담긴 경기장의 모습은 시간의 분절처럼 느껴진다. 양쪽 끝 캔버스엔 각각 인물 하나가 등장한다. 한쪽 끝엔 짧은 갈색 머리에 검은 옷을 입고 뒷짐을 지고 있는 모습. 또 다른 한쪽 끝엔 금발의 포니테일에 여름옷을 입은 여자의 몸이 반쯤 프레임에 걸쳐져 있다. 프레임 밖으로 퇴장하는 듯한 모습. 두 인물은 다른 인물일 수도, 같은 인물일 수도 있다. 어느 쪽에서 그림을 보느냐에 따라 끝과 시작은 달라진다. 이야기의 방향은 읽는 이에 따라 바뀔 수 있다. 경기장을 바라보는 인물과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인물.
갤러리에서 마련한 한 페이지짜리 전시 설명을 읽어본다.
"양측 가장자리에 두 인물이 등장한다. 인물의 뒷짐진 손이 경기에 참여하려는 의지의 부재를 암시한다. 두려움일 수도, 혹은 방관일 수도 있다. 관객은 화면에 스스로의 서사를 비추어본다. 여백이 사색의 여지를 연다."
전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화면에 자신의 서사를 투사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서사의 흐름은 보는 자의 몫이다. 시와 유사하다. 공백. 모호한 시공간. 흐릿한 화자. 시를 읽는 사람은 자신을 시 속 공간에 집어넣고 감정의 결을 잡는다. 시를 쓴 자의 감정이나 의도를 이성적으로 추측하려 애쓰지 않아도 시를 읽는 순간 내 안에서 일어나는 파장의 결을 따라가다 보면 무언가 잡혀지는 것이 있다. 그 감촉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뿐.
관계: 프레임과 쇼트
내가 본 <스타디온>은 영화의 프레임과 쇼트를 연상시킨다. 하나의 캔버스는 하나의 프레임(frame). 스타디온,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열두 개의 프레임으로 이루어진 쇼트(shot)라고나 할까. 서사를 조금 더 길게 가져가고 싶은 관람객이라면 프레임과 쇼트의 관계를 확장시켜 쇼트와 신(scene), 혹은 신과 시퀀스(sequence)라는 영상 단락으로까지 연결할 수도 있겠다.
우리는 영화가 1초에 24장의 연속적인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이때 24장의 연속 사진 중 하나의 사진을 우리는 '프레임(frame)'이라고 부릅니다. 물리적으로 영화는 한 장의 사진, 즉 프레임에서 시작됩니다. 이 한 장의 사진이 이어지는 사진과 결합해 연속적 움직임을 만들 때, 그것을 우리는 '쇼트(shot)'라 부릅니다. 영화가 움직임의 예술이라 할 때 움직임의 최소 단위인 쇼트가 영화의 최소 단위인 셈입니다. 쇼트들의 집합의 최소 단위를 우리는 '신(scene)'이라고 부릅니다. 동일한 시간, 공간, 상황, 액션, 대사, 사건이 나타나는 쇼트들의 최소 집합이 신입니다. 이러한 신이 한 개 이상 결합해서 특정 상황을 시작부터 끝까지 묘사하는 영상 단락을 우리는 '시퀀스(sequence)'라고 부릅니다. 보통 시퀀스는 책의 장(chapter)으로 비유되곤 합니다. 신이 단일의 시공간 단위라면 시퀀스는 단일의 극적 단위인 셈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러한 시퀀스가 모여 한 편의 영화가 됩니다.
- 박우성, <영화 언어>, 아모르문디, 2017, 5장 '카메라 시선' 중에서 90-91쪽
시각 1 : 시간과 이야기
팀 아이텔의 그림을 보면서 나는 (시간 간격을 길게 둔) 연속 사진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같은 공간을 거니는 동일한 인물 하나를 설정한다. 검은 겨울옷을 입고 뒷짐을 진 채 경기장에 들어선 사람이 몇 번의 계절을 거쳐 여름옷을 입고 화면 밖으로 나간다. 공통점은 바라본다,는 것. 경기장은 거기 그대로 있고, 사람은 변화한다. 그동안 그(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경기장을 바라보는 시선엔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시각 2 : 부분과 전체
시각 1이 시간의 흐름(통시성)에 포커스를 맞춘 관점이라면, 즉 시간과 함께 형성되는 '스토리'를 염두에 둔 것이라면, 또 다른 관점은 동일한 시간의 다른 공간(공시성)에 관한 것이다. 나는 그림을 자세히 보다가 양 끝쪽 인물의 그림자에 주목하게 되었는데, 흥미롭게도 그림자의 형태는 스타디온이라는 실제 공간에 드리워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각 인물의 그림자는 가깝게 세워진 벽면에 바싹 다가섰을 때 드러날 수 있는 형태였던 것. 그렇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같은 시간, (경기장이 그려진 커다란 그림 앞에 선) 두 명의 인물(공간)이 분할되어 배치된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이일 수도, 함께 전시를 보러 온 사이일 수도 있다. 여하튼 경기장 그림을 보러 온 관객이라는 공통점을 취한다. 나는 '부분과 전체', '개별성과 보편성'을 떠올린다. 각 인물의 시선은 개별성을, 그 시선이 모이는 '스타디온'은 일반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부분은 전체의 일부이지만, 부분은 곧 전체이기도 하다. 열두 개의 부분 그림을 모아 하나의 전체 그림을 볼 수도, 열두 개 그림 각각을 하나의 전체로 간주할 수도 있다.
시각 3: 경기장 안과 밖
경기장,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왜 경기장일까. 실제 경기장을 바라보는 것이든, 경기장을 그린 그림(재현)을 바라보는 것이든, 우리의 시선은 경기장,이라는 공간으로 향한다. 중의적이다. 브레네 브라운의 책 <Daring Greatly> (한국에는 <마음 가면>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를 떠올린다. 5년 전,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노트에 이렇게 적어 두었다.
완벽(perfect)과 방탄(bulletproof)이라는 말은 매력적이지만 환상일 뿐이다. 그 어떤 탄알(상처 혹은 과실)에도 단단히 무장하고자 하는 의지는 안간힘에 불과한 허상이다. 결국 빈틈없이 자신을 갖출 때까지(갖추었다고 믿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허비일 뿐, 일단 경기장에 발을 디뎌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인간관계든, 중요한 미팅이든, 가족간의 힘겨운 대화이든, 그 어떤 창조적 과정이든, 일단 경기장 한복판에 들어갈 수 있는 용기와 의지, 즉 ‘참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이드 라인에 앉아 비판과 충고를 퍼붓는 것이 아니라 경기장 안으로 뚜벅 뚜벅 걸어 들어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vulnerability(취약성, 다시 말해 취약해질 수 있는 능력) 그리고 Daring Greatly(대담하게 들어서기)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2016-8-23)
경기장 그림을 보는 두 인물(혹은 한 인물)의 잔상이 계속 남는다. 그림 속 인물. 그 인물을 바라보는 그림 바깥의 나. 나는 경기장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뒷모습(옆모습)을 바라본다. 우리는 함께 경기장이라는 공간(혹은 재현된 그림)을 응시한다. 우리는 세 사람인가 두 사람인가 한 사람인가. 우리의 시선은 어떻게 어긋나고 어떻게 모아지는가.
전시를 보러 간다는 것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전시를 보러 간다는 것은 경기장을 보러 가는 것과 비슷한 것이로군. 일상을 벗어날 때 찾아오는 낯설지만 익숙한(어쩌면 계속 기다려온) 감각들. 감응. 감응하기 위해 우리는 무언가를 보러 혹은 들으러 간다. 전시장과 영화관, 콘서트홀을 찾는 이유일 것이다. 감응하기에 최적화된 공간에 나를 놓음으로써, 배가된 현장감이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자극하고 고양하게끔 집요하게 내버려두는 것. 보고 듣는 대상 외의 모든 것을 잠시 밀어냄으로써 일상으로부터 분리된 순간을 최대치로 느끼는 것. 누군가에게 경기장은 삶 자체일 수도, 관계일 수도, 기억일 수도 있다. 특정 분야(예컨대 문학이나 예술) 혹은 욕망의 자장을 의미할 수도 있다. 전시를 보러 간다는 것은, 예술이라는 아레나(경기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자신의 모습(취약성과 욕망)이 드러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브레네 브라운에 따르면 아레나(경기장)에 들어가는 것은 취약해질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나는 취약해질 준비를 갖추고 전시를 보러 간다. 그리고 전시에서 나의 취약성을 보고 온다.
기다리는 동안 :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하나의 짧은 글을 쓰는 데 여러 날이 걸린다. 내 생각의 흐름과 포커스를 파악하려 애쓰다가, 애쓰지 않다가, (일상의 루틴에 의해) 희미한 연결의 끈마저 놓친다. 때론 아예 잊혀지기도 한다.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고 문득 다시 떠오르면 또 단 몇 줄이라도 이어서 써보다가. 그건 마치 황지우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의 탁월한 구절인 "너였다가 / 너였다가 / 너일 것이었다가 / 다시 문이 닫힌다"의 심정이랄까.
미장아빔: 그림 속 그림
Y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가 기획 총괄한 공예 전시 <문제적 공예>전 소식과 함께. 설 연휴를 이틀 앞두고 (1월의 마지막 날처럼) 나는 삼청동으로 향한다. 작품을 보고, 작품 설명을 듣는다. 서로 대화를 나눈다. 진정한 비평은 관심하는 대상을 앞에 두고 서로 나누는 대화에 있다는 말을 새삼 실감한다. Y에게 얼마 전 팀 아이텔 그림을 보고 온 이야기를 한다. 말을 하며 무엇인가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되는 것을 느낀다.
내가 그림을 본다,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렇게 그림을 보는 나,를 응시하는 또 다른 시선을 상상해보는 것. 그 시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 팀 아이텔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이 끝없이 펼쳐지는 시선의 중층적 이미지가 '심연'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다다른다. 내가 끌리는 것들, 예컨대 무한하게 펼쳐진 거울 속 거울, 이야기 속 이야기, 액자 속 액자, 극 중 극, 시간 속의 시간, 꿈 속의 꿈, 과 같은 이미지와 묘하게 겹쳐지는 부분이 있어서일 것이다. 나는 결국 미장아빔(mise en abyme)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구나.
‘mise en abyme’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심연에 놓다'는 뜻으로, 마주 보는 두 거울에 반대편 거울의 상이 끝없이 비치는 것(심연)을 가리킨다. 영화 속 영화, 그림 속 그림, 사진 속 사진, 소설 속 소설 등 담화 속에 또 다른 담화가 발화되는 구조다. 이때 미장아빔의 구조에서는 원본과 복사의 경계가 무의미하다. 이런 면에서 실재(원본)와 모방(복사본)이 뚜렷이 구분되고 위계관계가 성립하는 '미메시스'와는 다르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반향하는 자기반영적 요소 때문에 미장아빔의 구조는 자기성찰의 기능 또한 갖게 된다.
- 박영욱, <데리다&들뢰즈,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에서 재인용
글쓰기 : 사냥꾼과 사육자
팀 아이텔 전시를 보고 와서 보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간신히 글을 마무리한다. Y와 대화를 나눈 것도 벌써 1주일 전 일이다. 쓰기 전엔 알 수 없는 것들은 나의 취약성을 드러낸다.
쇼펜하우어는 글쓰는 자를 3가지 그룹으로 나누었다.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쓰는 그룹, 쓰면서 생각하는 그룹, 책상에 앉기 전에 필요한 모든 사색을 끝마치는 그룹. 대부분의 저술가는 첫 번째 아니면 두 번째 그룹에 속한다고 보았다. 적어도 쓰면서 생각하는 그룹에 나를 포함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왔지만, 이 역시 '쓰기 위해 사고하는' 유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두 번째 그룹의 사람들, 즉 쓰기 전까지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작가들은 사냥을 나가기 직전에 하늘에 모든 운을 맡기는 사냥꾼에 비유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세 번째 그룹은 사육이라고 볼 수 있다. 울타리를 치고, 필요한 짐승을 길들이는 것이다. 게다가 사육의 방법도 여러가지다. 자신의 철학에 맞게 방목할 수도 있고, 양식을 선택할 수도 있다. 하늘에 운을 맡기는 사냥꾼보다 훨씬 경제적이고 지혜로운 방법인 것이다. (...) 집필하고자 하는 테마의 소재를 자신의 머릿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작가만이 후세에도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 위대한 저술가로 기억될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작가들은 필요한 테마의 소재를 타인의 저술에서 도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 아르트루 쇼펜하우어, <문장론>, 지훈(2005), '글쓰기의 3가지 유형' 중에서, 51~53쪽
'생각하지 않고 쓰는 글'은 아니지만 나는 '쓰기 위해 쓰는 글'에 멈추어 있다는 것을 안다. '쓰기 전에 모든 사색을 끝내고 쓰는 글'은 단지 스타일의 문제라고 자위하며. 왜냐하면 나는 나의 취약성을 알기 때문에. 소위 사색(생각)을 하는 동안 휘발해버리는 글(의 형태)을 붙잡아두기 위해서라도 나는 쓰면서 생각하고 쓰기 위해 쓴다. 하나의 테마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기에 나의 정신은 너무 산만하다. 산만한 대로 쓰고, 쓰면서 다시 산만해지는 것, 그게 나의 취약성일 텐데. 또렷한 관점으로 일목요연해지려는 안간힘은 내게 득인가 실인가. 분명한 것은, 나는 사육이 아닌 사냥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사냥꾼도 나쁘지 않잖아. 그렇지만 안다. 나는 사육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취약성이 드러나기를 기다렸다가 멈추었다가. 드러나기,와 드러내기,를 반복하다가. 나의 몸이 반응하고 가리키는 방향엔 '심연'이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돌고 돌아 다시 미장아빔으로.
아니, 어쩌면 나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식의 회귀와 귀착을.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은 착각은 계속될 것이다. 미장아빔처럼.
(2021-2-15)
When we spend our lives waiting until we're perfect or bulletproof before we walk into the arena, we ultimately sacrifice relationships and opportunities that may not be recoverable, we squander our precious time, and we turn our back on our gifts, those unique contributions that only we can make.
Perfect and bulletproof are seductive, but they don't exist in the human experience. We must walk into the arena, whatever it may be - a new relationship, an important meeting, our creative process, or a difficult family conversation - with courage and the willingness to engage.
Rather than sitting on the sidelines and hurling judgement and advice, we must dare to show up and let ourselves be seen.
This is vulnerability.
This is daring greatly.
- Brene Brown, <Daring Greatly>, 'What It Means to Daring Great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