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에덴과 브레히트

영화 <마틴 에덴>에 부쳐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의 영화 <마틴 에덴>을 보았다. 잭 런던의 소설 원작 <마틴 에덴>보다도 브레히트의 시가 떠오른다.


노동자 계급 출신 청년 ‘마틴 에덴’이 상류층 여인 ‘엘레나’와 사랑에 빠져 신분의 벽을 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자기 안에 들끓어 오르는 창작욕을 감지하며 작가가 되는 과정이 주요 스토리 라인이지만. 로맨스라기보다는 사회적 메시지가 개인의 욕망과 맞물려 로맨스라는 외피를 입고 독특한 카메라 워크와 편집 양식으로 발현된 영화로 보인다. 봉준호의 <기생충>이 (이전 영화에 비해 한층 진화한 방식으로) 계급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철학이 태어난 이유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육체노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예 덕분에 오직 사유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 따라서 우리는 요청한다. 문화와 지식에서 나오는 수입 일부는 노예와 하인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 <마틴 에덴> 중에서


작가로서 성공한 마틴이 조수를 통해 받아적게 하는 위의 대사는 언뜻 브레히트의 시를 연상시킨다.

브레히트의 시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을 옮겨본다.


일곱 개의 문을 가진 테베를 누가 지었는가?

책에는 왕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왕들이 돌덩이를 날랐을까?

그리고 저 여러 번 파괴되었던 바빌론

누가 계속 바빌론을 건설했는가? 건축노동자들은

황금빛 도시 리마의 어떤 집에서 살았던가?

만리장성이 다 만들어진 날 저녁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던가? 위대한 로마는

개선문으로 가득 차 있다. 누가 개선문을 세웠는가?

(중략)

책의 모든 페이지마다 승리가 나온다.

승리의 향연을 누가 차렸는가?

10년마다 위대한 자가 나온다.

거기에 드는 비용을 누가 댔는가?


수많은 보고들

수많은 의문들.


(1939)


- 베르톨트 브레히트,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민음사(2018),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일부


배움에 굶주려 닥치는 대로 책을 탐하던 마틴이 깊게 영향받은 것은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 진화론”이다. 노동자 계급 출신의 그는 당시 열풍을 일으키던 사회주의와도 선을 긋는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마틴이 연단에 올라가 군중에게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장면(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연상시킨다)은 인상적이다.


마틴은 엘레나의 집에 모인 상류층 사람들에게 자신은 사회주의자도 아니고 그들이 신봉하는 자유주의도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그들이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자유주의자를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또 다른 사회주의자'일 뿐이라고 일갈한다.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비판한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주의자(개인주의자)는 바로 자신, 마틴 에덴이라고 선언한다. 그의 이 양비론(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양측의 모순을 동시에 비판하는)을 담은 장면은 퍽 강렬하게 남는다.


작가로서 성공한 마틴의 저작은 낭만주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는 어둡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그려냈을 것이다. 마틴의 글을 읽은 누나는 이렇게 말한 적 있다.


“네 글은 너무 슬퍼. 슬픈 건 읽기 싫거든. 너무 현실적이어서. 우린 웃음이 필요해.”


우연히 만나 마틴에게 정신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루스 브리센든은 마틴에게 이렇게 말한다.


“가난하고 무지해서 노예가 된 이들을 위해 싸우게. 사회주의가 당신의 글에 의미를 부여할 걸세. 환멸로부터 구해줄 유일한 길이야.”


마틴은 사회주의자도 아니고, 당대 지배 계급이 주장하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도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상적 노선을 떠나 ‘가난하고 무지해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는다. 정신적 멘토였던 루스 브리센든의 자살 후 루스와 함께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걷던 사람들에게 자금을 대주기도 한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적 현실주의자였을까?


브레히트는 마르크스주의적 현실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라기보다는 유연한 마르크스주의자. (당시 시대에 맞서) 반파시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반영하는 정치문학을 지향했다. 현재를 사는 나는 문학의 목적성 즉 정치적 사용가치에 동의하지 않는다. ‘참여문학’의 역사적 의의를 부정하진 않지만 끌리지 않았던 나로서는 브레히트의 예술(연극)에 대한 혁신적 접근(낯설게 하기 기법)만을 선별적으로 수용해왔던 게 사실. 그러나 마틴 에덴,을 보며 그의 시가 불현듯 소환되었고. 당시 시대적 상황(현실)에서 달콤한 낭만시를 거부하고 나치즘, 전쟁, 폭력에 맞서는 정치시를 썼다는 측면에서 합당한 평가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시집의 표제작인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는 이런 맥락에서 읽어야 할 것이다.


나도 안다, 행복해하는 사람만이

사랑받는다는 것을. 그런 그의 음성은

듣기 좋고, 그의 얼굴은 보기 좋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는

땅의 토질이 나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가 못생겼다 욕하기 마련이다.


해협을 떠다니는 산뜻한 보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이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오직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만이 눈에 보일 뿐이다.

왜 나는 나이 마흔의 소작인 처가

벌써 허리가 굽은 채 걷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가슴은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내가 시에 운을 맞춘다면

내게 그것은 오만이나 다름없다.


꽃 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그림쟁이의 연설(*히틀러의 나치즘 상징)에 대한 경악이

나의 가슴 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두 번째 것만이

나를 책상으로 몬다.


(1939)


- 같은 책,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전문, 100-103쪽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틴은 태양이 걸린 바다를 향해 헤엄쳐 들어간다. 나는 이 영화를 관통하는 여러 키워드들을 되짚어본다. 사랑, 계급, 욕망, 상실, 몰락, 환멸.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는가. 뒤늦게 자신을 찾아온 엘레나를 매정하게 쫓아내면서 그는 외친다. “세상은 역겹다”고. 환멸이다. 일찍이 루스는 마틴에게 (작가에게 따라붙는) 환멸에 대해 경고한 적 있다. 작가와 환멸의 관계.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보들레르의 시집이 겹쳐 떠오른다.


마틴 에덴이 엘레나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부르디외가 말하는 소위 '문화자본'의 격차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림과 시와 음악. 계급의 차이가 드러나는 동시에 욕망과 꿈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랑을 통한 사회적 각성, 욕망과 성취, 시련과 상실, 환멸과 자기 파괴. 특정 시대, 특정 상황에 처한 한 개인의 묵직한 서사도 훌륭하지만, 기록 영상과 독립 이미지들을 감각적으로 편집한 독특한 형식적 스타일도 눈길을 끄는 영화이다. (영화사적 맥락이나 사회학적 맥락, 그리고 영화 기법에 관한 부분은 평론가들에 의해 낱낱이 분석될 터이니 여기서는 생략.)


무엇보다도. 작가를 꿈꾸고 글을 쓰는 한 개인의 이야기로 읽는다면, 첫 장면을 복기하지 않을 수 없다. 첫 대사는 이렇다.


“그리하여 세상은 나보다 강하다. 그 힘에 맞서 내가 가진 건 나 자신뿐이지만, 다수에 짓눌리지 않는 한 나 역시 하나의 힘이며 내 글의 힘으로 세상에 맞설 수 있는 한, 내 힘은 가공할 만하다. 왜냐하면 감옥을 짓는 자는 자유를 쌓는 이보다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


마틴 에덴을 보고 브레히트를 떠올렸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글의 힘을 믿지 않고, 세상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동의할 수 있는 건, 내가 가진 건 나 자신뿐이고, 스스로 감옥을 구축하지 않는 한 자유로울 가능성이 있다는 것.


글로 자신을 표현한다고 해서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적어도 쓰기 전보다는 조금이나마 가벼워질 것이라는 점은 안다.


한 가지 더. (시대적 상황은 바뀌었지만) 지금은 지금 나름대로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라는 것.


(2021-7-6)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이것은 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