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시가 아니다

이승훈의 시론과 시에 부쳐

왜 이제 알았을까, 싶은 것이 있다. 책이 그렇고 저자가 그렇다. 최근 나를 사로잡은 것은 '이승훈'과 '이승훈의 책'이다. 이승훈,이라는 (시인/문학평론가/교수라는 타이틀이 붙은) 개인. 그리고 그의 ‘시와 시론이 구분되지 않는’ 책들.


너무 늦게 알았다,고 생각하다가. 너무 늦은 것은 없다,고 자위한다. 이제라도 정리하고 털어내고 벗어날 수 있으면 족하니까. 내가 흔들려온 양상은 대개 이러했던 것 같다.

- ‘나는 시를 써왔다’라는 문장에 왠지 거부감을 느꼈던 것.

- 시를 쓸 때보다 시를 생각할 때가 더 많았다는 것.

- 시를 생각하고 구성하는 주체로서의 ‘나’를 느끼는 순간이 좋았지만.

- 막상 시를 쓰기 시작하면 사라지기 시작하는 시 바깥의 ‘나’와, 이상하게 왜곡되어 드러나는 시 속의 ‘나’를 양손에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했다는 것.

-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나’를 당혹스럽게 지켜보는 또 다른 ‘나’의 시선에 피로감을 느꼈던 것. (진짜 ‘나’가 있다는 전제하에)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가.

- 시란 이런 것이다, 라는 명제를 신뢰하지 않았던 것.

- 전통적/관습적 시의 문법을 ‘시적’이라고 부르는 것에 회의했던 것.

- 어느 순간부터 서정시(라 불리는 시)가 읽기 싫어졌던 것.

- 시에 대해 알수록 점점 더 모르게 되었다는 것.


# 시적인 것은 없고 시도 없다


이승훈의 대표 시론,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시적인 것은 없고 시도 없다>(2003년). 이미 20권의 시론집을 펴냈지만 그중 ‘시를 쓰는 자신에 대한 성찰’을 강하게 드러낸 여섯 권을 선별하고, 그 책들에서 다시 ‘시에 대한 사유’가 강하게 드러나는 글들을 골라 묶은 것이 이 책이다. ‘이승훈 대표 시론’이라는 부제가 붙을 만하다. 40년간 지속된 시(혹은 삶)에 대한 그의 사유를 한 권의 책으로 조명했으니까.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사로잡히는 문장들을 만날 수 있다. (적어도 내게는.)


이 책의 표제작인 ‘시적인 것은 없고 시도 없다’에는 이승훈 시론을 비판한 최동호 교수(현대시에 대한 보수적 입장)가 문제 삼은 (이승훈 시론의) 몇 가지 명제들이 언급된다. “정말 시를 쓰겠다는 것인지 아닌지 잘 알 수 없도록 만들어 일반 독자들에게 폭력적 표현이 된다”고 비판받은 이 알쏭달쏭한 명제들이 (아이러니하게도) 그간의 내 흔들림과 의문들에 또렷한 방향을 제시해준다. 그 명제들을 다시 인용한다.

1) 내(이승훈)가 최근에 쓰는 글(시라고 할까?)은 시쓰기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문제로 삼는다.

2) 이 ‘나’는 시를 생산하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에 의해 구성된다.

3) 시쓰기의 불가능성은 시쓰기의 가능성이다.

4) 문학 속에선 무슨 말이나 해도 된다.

5) 시를 쓰려면 시를 못 쓴다. 시를 쓰지 않으려고 시를 쓴다.


-이승훈, <시적인 것은 없고 시도 없다>, 집문당(2003), 144쪽


이승훈은 초월, 본질, 기원과 같은 말을 믿지 않는다. 현실/이상, 현상/본질 같은 2항 대립 체계를 전제로 하고 또한 이런 체계 속에서도 유독 후자(이상/본질)를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관념론자들의 넋두리’라고 말한다. 이 연장선에서 논의되는 선(禪)사상도 초월적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자아 없음에 대한 깨달음’일 뿐이다. 문제는 초월이 아니라 나로부터/너로부터/세계로부터의 해방이다. 이제까지 믿어온 시쓰기가 불가능한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시를 생산하는(쓰는) 게 아니라 시에 의해 구성된다. (...) 시를 쓸 때 시를 쓰는 ‘나’는 사라지고 다른 ‘나’, 말하자면 시 속의 ‘나’가 생긴다. 탄생한다. 그런 점에서 시쓰기, 문학이라는 이름의 글쓰기는 나의 소멸, 나를 지우기, 지금 여기 있는, 그동안 있다고 믿어온 나를 없애기, 결국 부재를 증명한다. 나는 없다. 나는 시를 쓸 때, 말할 때 태어날 뿐이다.

무슨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가 있고 언어가 있을 뿐이다. 시가 ‘나’를 생산하고 언어가 ‘나’를 생산하고 이런 ‘나’는 시 속에, 언어 속에 존재할 뿐이다. 내가 없는 터에 어떻게 시쓰기가 가능한가? 시쓰기가 불가능한 이유이다. (148쪽)


그러나 시쓰기의 불가능성은 시쓰기의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어떻게? 사유 주체, 창조 주체, 생산 주체로서의 시쓰기가 불가능하지만 이런 불가능성이 새로운 시쓰기, 예컨대 언어가 시를 쓰는 그런 시쓰기의 가능성을 연다.


전통적인 시쓰기는 주체가 언어를 수단으로 대상을 노래하는 형식으로 드러난다. 나는 처음부터 대상을 괄호 친, 이른바 ‘비대상의 시’를 썼다. 인식론적 회의가 동기였다. 남은 것은 주체와 언어뿐이었다. 그러나 이 주체는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에 가까웠다. 그렇던 것이 최근에는 이 주체마저 소멸하고 남은 것은 언어뿐이다. 언어가 시를 쓴다?


나는 그런 측면에서 일찍이 김언 시인의 시들에 강하게 끌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주체가 사라진 자리에서 언어가 언어를 낳는 시. 그렇다면 문학 속에선 무슨 말을 해도 된다는 명제는 어떨까.


주체가 없다면, 언어만 있다면 시 속에선 무슨 말이나 해도 되고, 아니 문학이라는 이름의 이 이상한 제도 속에선 무슨 말이나 해도 된다는 것은 결국 아무 말도 못한다는 뜻이다. (...) 아무 말도 못할 때, 침묵할 때 우리는 모든 말을 한다. 침묵이 완전한 말이기 때문이다. 말하기는 언제나 결핍이다. 말하기는 감추기며 은폐이며 생략이다. 언제나 무의식이, 타자가 말하기를 감시하고 검열하고 억압한다.

시를 쓰려면 시를 못 쓴다,는 것은 이미 경험으로 절감한 바이다. 따라서 시를 쓰지 않으려고 시를 쓴다,는 그의 패러독스는 직관적으로 몸에 닿아 깊게 꽂힌다.


내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일반화된 시, 시라는 장르에 집착하는 시, 너무나 시 같은 시, 장르라는 일반의 옷을 입고 행세하는 시, 말하자면 일반화되고 평준화된 시에 대한 비판이다. 따라서 이런 시를 쓰지 않으려고 시를 쓴다. 아니 좀더 근원적으로 생각하면 시라는 개념이나 제도에 대한 회의, 시와 비시의 경계에 대한 비판이다.

그간의 시쓰기에 대한 나의 흔들림, 혼란, 헤맴이 (어느 정도) 자체적으로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헤맴’ 자체를 ‘과정으로서의 시쓰기’로 선언하는 그의 말에서 나는 문득 새삼스럽고도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그래, 다행히도(?)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는 거야.


시를 쓴다는 것은 요컨대 우리가 시라고 알고 있는 그 이상한 글쓰기 속에서 헤매는 일이다. 시인들은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 속에서 시를 향해 시와 싸우며 시라는 길 위에서 헤맨다. 이 헤맴 속에 ‘나’가 있고 시가 있다. 아니 시는, 그리고 ‘나’는 있으면서 없다. 말하자면 시를 쓰고 시를 못 쓴다. 무슨 정신, 자연, 사회에 대해 쓰는 게 아니라 일반화된 시와 새로운 시 사이에서 헤매며, 비시와 시 사이에서 헤매며, 시라는 사회적 제도 속에서 헤맨다. 시인은 시를 쓰는 게 아니라 헤매는 자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이 시대의 유목민이고 이런 방황이 그의 미덕이다. 종착지를 안다면, 그러니까 시가 무엇인가를 안다면 우리는 시를 쓸 필요가 없다. 시를 쓰려면 시를 못 쓴다. (149쪽)


1996년의 글이다. 25년 전에 이미 이러한 사유를 다져놓은 저자에게 존경을! 늦었지만 사숙(私淑)의 대상으로 삼기로 한다. 그의 글은 그간의 내 갈증을 풀어주는 암리타의 보고(寶庫)처럼 느껴진다. 그의 다른 책들 <영도의 시쓰기>와 <선과 아방가르드>도 틈틈이 아껴 읽기로 한다.


# 이것은 시가 아니다


시를 쓰는 건 명예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자랑도 아니고 결국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이 부정이 시를 쓰게 하고 이 부정이 중요하다 시를 쓸 때 나는 내가 아니고 바다는 바다가 아니고 당신도 당신이 아니다 그럼 신경쇠약인가? 물론 난 지금 신경이 엉망이고 그러나 신경증 환자 모두 시를 쓰는 건 아니다 요컨대 시쓰기는 시쓰기가 아니다 이 시도 시가 아니고 벼락도 아니고 요구도 아니다 요구는 당신이 있어야 요구지 그러므로 요구도 아니고 요구 저편에 있는 것 시는 부정을 먹고 산다 책상은 책상을 부정하고 당신은 당신을 부정하고 이 부정의 부정의 끝에 시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부정의 끝은 끝이 없다 그러므로 신경이 피로한 나는 이런 시를 쓰지 말고 이발소에 가 이발을 하거나 약을 먹고 자거나 고장난 물건들을 손질하는 게 좋다

- 이승훈, <이것은 시가 아니다>, 세계사(2007), ‘그럼 신경쇠약인가?’ 전문


이승훈의 열네 번째 시집. <이것은 시가 아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문장이다. 마그리트의 파이프 그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왔을 것이다. 푸코가 이 그림을 해석한 방식으로 이승훈은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대명사 ‘이것’은 시가 아니고 ‘이것’은 문장 속의 ‘시’를 지시하지 않고 ‘이것’은 검은 활자이기 때문에 ‘시’가 아니고 ‘이것’은 ‘시가 아니다’라는 말을 지시할 수도 있고...” (같은 책, ‘시론’, 131쪽)


시집은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의 ‘시에 대한 사유의 목소리’가 좀더 직접적으로 들리는 곳은 4부이다.

손이 떨려도 좋아 글자가 틀려도 좋아 감기에 걸려 또 약을 먹었지 바른손이 저리면 왼손도 저리고 저려도 좋아 저려도 좋아 이런 시는 쓰지 않아도 좋아 (...) 이런 시 쓰다 말고 화장실 가서 침을 뱉고 돌아왔지 (...) 읽을 수 없어도 좋아 나오는 대로 쓰는 거야 내 안엔 아무것도 없지 이런 소리가 무슨 소린지 모르니까 (...) 그래도 좋아 바람에 흔들리는 백지 읽을 수 없어도 좋아 (‘손이 떨려도 좋아’ 부분, 89쪽)


시인은 평론가로서 자신의 시에 이렇게 해설을 덧붙인다. “이런 시는 시론시, 메타시가 아니라 시와 시론이 불이(不二의) 관계에 있는 시. 그러므로 나는 이런 시를 쓰면서 시를 쓰는지 시론을 주장하는지 나도 모르고 그저 나오는 대로 쓴다.”(138쪽)


이건 무료해서 쓰는 시 무료해서 무료해서 쓰는 시야 하염없는 시 낮잠 자고 일어나 쓰는 시지 나는 광대 무당 교수 알콜 중독자 팔 병신 정서 불안증 환자야 난 시인이 아니야 환자의 말을 옮기는 거지 (...) 시인들은 목소리만 들려주고 얼굴이 보이지 않네 도대체 그들은 무얼 먹고 사는가? 돈은 어떻게 버는가? 시 속에 그들은 없고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만 있지 (‘이런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전혀 없다’ 일부, 90쪽)

시는 형태이고 형식이고 스타일이다 40년 넘게 시를 써온 나는 그동안 시를 쓴 게 아니라 형태와 싸운 거야 (중략) 내 친구들은 언제나 같은 형태의 시를 쓰지만 나는 왜 이렇게 형태 앞에서 형태를 보면서 형태 속에서 형태와 싸우며 형태를 끌어안고 뒹굴고 헤매야 하는가? 결국 그동안 난 시를 쓴 게 아니라 형태를 찾아 헤맸지 지금도 그렇다 (...) 앞으로 어떤 형태가 될지 그건 나도 모른다 (‘나를 쳐라’ 일부, 91쪽)

고상한 영혼 따윈 없죠 형이상학도 없습니다 모두가 언어죠 후회도 언어 기쁨도 언어 모래도 언어 지금 저리는 팔도 언어 어제 들린 카페도 언어 당신도 언어입니다 (...) 당신의 시야가 세계이고 세계의 한계죠 사유는 결국 미친 짓이죠 무슨 영혼, 진리, 본질 따윈 버리세요 잊으세요 (...) 그저 사세요 영혼 따위에 속지 마세요 진리를 찾지 마세요 삶이 그대로 진리입니다 당신의 진리가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이 진리죠 오전엔 눈이 오고 오후엔 해가 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웃는 것이다’ 일부, 93쪽)


순수도 서정도 폭력이다 순수는 불행을 모르고 고통을 모르고 타자를 모르고 서정도 서정도 허위다 서정시가 끝난 시대에 서정을 주장하는 건 불순하고 순진하고 천진하고 시가 갈 길은 무수히 많다 갈 데가 없으므로 갈 데는 많고 그러므로 갈 곳이 없고 (...) 잠결에 날아오던 모기처럼 아무리 아무리 쫓아도 날아와 내 팔을 물어뜯던 모기처럼 갈 곳이 없다 그러므로 갈 데는 무수하다 (‘서정시’ 일부, 97쪽)


이승훈은 ‘언어가 있으므로 시를 쓴다’라는 제목의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물론 이건 내가 바란 것도 아니고 사실 난 이런 시를 쓰며 바라는 게 없다 그저 언어가 있으므로 시를 쓴다 (98쪽)


으레 시집의 뒷부분엔 평론가의 해설이 실린다. 요즘엔 시인의 의도(시에 대한 고정된 관점이나 독자의 해석을 제한하는 틀을 피하기 위해)에 따라 해설을 싣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자신의 시집에 자신의 ‘시론’을 싣는 경우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흥미롭다. 이승훈답다,는 생각을 한다.

시를 쓰는 것보다 시를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았던 내게, 때론 시보다 시론을 읽는 순간이 더 짜릿하기도 했던 내게, 그의 이런 문장이 파고 들어온다.


“시를 쓰는 것은 결국 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고 시론 속에서 시론을 생각하며 시론과 함께 글을 쓰는 행위이다.” (117쪽)


시론과 시쓰기의 관계를 말하기 위해 나가라주나의 중도(中道) 사상에까지 촉수를 뻗는 그의 태도에 나는 매혹당한다. 2항 대립 해체. 이것은 주체와 행위의 관계에서 더 나아가 시(이론)와 시쓰기(실천)의 관계에 이른다. 이론이 주체라면 실천은 행위에 해당한다. 그가 밀고 나가는 사유의 중간 부분을 건너뛰고 말하자면 이렇다.


“시론과 시쓰기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불이(不二) 사상과 만나고 그런 점에서 시쓰기에 대한 사유는 시에 대한 사유이고 거꾸로 시에 대한 사유는 시쓰기에 대한 사유이다. 이것이 내가 이번에 시집을 내면서 시론을 쓰는 이유이다.” (119쪽)


그리고 데리다의 대리 보충에 대해, 시와 현실의 경계를 해체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내가 그의 사유(를 발전시키는 과정의 글들)에 끌리는 것은 이렇듯 ‘시(시쓰기)’라는 것을 주축에 놓고 인접 영역(철학, 정신분석, 언어학, 선禪, 아방가르드 등)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는 확장의 방식 자체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러한 방식을 선호하는 게 틀림없다는 생각. 그동안 산만하게 병치되고 중첩되는 관심의 대상들 사이에서 무엇을 중심에 놓고 싶어 하는지 알고자(그리고 납득하고자) 했던 시간들이 한꺼번에 지나간다.

이 시집의 끄트머리에 실린 ‘시론’ 제목은 ‘누가 코끼리를 보았는가’이다. 그가 고심 끝에 붙인 제목이라 한다. 그는 이렇게 맺는다.


“누가 코끼리를 보았는가? 우리는 코끼리를 사진, 그림, 이미지로 보거나 코끼리라는 낱말, 언어에 의해 생각한다. 마리 야누스Jaanus도 말하듯이 코끼리는 이미지(상상계)와 낱말(상징계)로 존재하고 이런 존재는 코끼리가 아니다. 상상계도 상징계도 실재의 코끼리를 망각한다. 실재의 코끼리는 코끼리의 현실reality로 치환되고 이 치환된 세계를 실재Real로 착각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강조하는 시쓰기, 상상계와 상징계를 동시에 부정하고 파괴하는 시쓰기는 실재 찾기이고 이 실재는 상상과 언어 너머 있고 그러므로 자성이 없고 진리가 없고 본질이 없는 과정, 흐름, 변화, 말하자면 비누이다. 누가 비누를 보았는가?” (145쪽)

(2021-7-5)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아이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