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들의 춤, 플라멩코
예전 (일본에서 일할 때) 한 일본인 동료는 자신의 취미가 플라멩코라고 했다. 열심히 연습해서 언젠가 스페인에서 열리는 플라멩코 페스티벌에 참여할 계획이라고도 했다. 그때는 그저 참 특이하다고만 생각했다.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니, 올해 우연히 SNS를 통해 그녀가 스페인으로 플라멩코 여행을 다녀온 것을 알기 전까지는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이기도 했다.
2월에서 5월에 걸쳐(무려 3개월간!) 헤레스 데 라 프론테라 (Jerez de la Frontera), 말라가, 론다, 세비야, 그라나다 등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을 종횡무진한 것으로 보이는 그녀는 자신의 플라멩코 동호회 멤버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찍은 다양한 사진들을 올려놓곤 했다. 2015 Festival de Jerez라는 말이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예전에 그녀가 이야기했던 계획이 이번에 실현된 것이 틀림없다. 붉은 의상을 입고 직접 무대에 올라 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주로 일본어로 포스팅하던 그녀의 페이스북에 이제 스페인어까지 등장한 것을 보면 (어차피 이해 못하기는 매한가지이지만) 그녀의 스페인어 실력도 상당히 늘었나 보다. 플라멩코가 열정적인 것이 아니라 플라멩코를 향한 그녀의 열정이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그러니까 8년 전) 마침 스페인을 가게 되었어도 나는 플라멩코를 보지 못했다. 마드리드와 톨레도, 바르셀로나만을 거쳤기에, ‘플라멩코는 나중에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제대로 봐야지’라는 생각으로 남겨 두었던 모양이다. 아르헨티나의 탱고나 러시아의 코사크 춤처럼 특정 나라를 대표하는 춤의 하나 정도로만 여겨왔던 플라멩코는 이번 기회를 통해 나의 시각을 바꾸어 놓았다.
# 플라멩코의 본고장 그라나다에서
플라멩코는 으레 스페인 전통 민속 춤으로 여겨진다. 좀더 들어가보면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을 대표하는 춤이다. 그 중에서도 세비야와 그라나다는 플라멩코의 본고장으로 꼽힌다.
플라멩코의 유래는 확실치 않다. 15세기경 인도 북서쪽으로부터 발생하여 유럽 각지에 흩어져 스페인 남부까지 내려온 롬(Rom: 집시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현재 롬으로 바꾸어 부른다고 한다)들의 노래와 춤이 세월을 거쳐 스페인 남부 토착 문화와 자연스레 섞이면서 오늘날의 형태로 자리잡았다고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룬다.
즉 플라멩코는 스페인의 순수 전통 춤이 아닌, 유랑 생활과 정주령을 거쳐 기독교의 박해를 받으며 오랜 세월 쌓여온 집시의 슬픔과 한을 원형으로 품고 있는 독특한 무형문화인 셈이다. 재즈가 미국의 순수 전통음악이라기보다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의 슬픔과 한을 노래한 블루스에 뿌리를 둔 음악이라는 점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집시들이 주역이었지만, 플라멩코를 온전히 집시들만의 예술이라 할 수는 없다. 집시들이 안달루시아 지역에 들어온 때는 15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이 축소되어 가던 시기였다. 1492년 무슬림 최후의 본거지였던 그라나다가 함락되면서 스페인 내의 무슬림들과 집시들이 기독교로 강제 개종을 당했고, 이를 거부하는 자들은 추방되거나 산악지대의 동굴에 은신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들 중에는 스페인으로 흘러 들어 온 유대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플라멩코는 집시들과 무어인(스페인을 지배했던 이슬람인), 그리고 유대계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기독교 왕국으로 통일된 스페인의 어두운 곳으로 숨어들어 박해 받았던 이들의 한이 담겨 있는 음악인 것이다. 전통적인 플라멩코가 심오하고 비장한 분위기 속에서 죽음, 번뇌, 절망 등을 정서적 근원으로 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화려한 원색의 비장미, 스페인 플라멩코” 중에서 (출처 : 글-황윤기 | 네이버 캐스트)
나는 그라나다의 한 타블라오(Tablao: 1950년대부터 등장한, 플라멩코를 공연하는 극장식 레스토랑)에서 플라멩코를 보았다. 세비야처럼 무대와 객석이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좁고 길다란 동굴 공간인 쿠에바(Cueva: ‘동굴’이라는 뜻. 박해를 피해 동굴에서 은둔 생활을 했던 집시들의 거주 공간이 플라멩코의 무대가 되었다) 스타일의 공연장이었다. 사람들이 벽을 따라 길다랗고 촘촘히 모여 앉으면 가운데 비어 있는 공간이 무용수들의 무대가 된다. 마치 아주 사적인 런웨이 쇼를 보는 것처럼 바로 코앞에서 무용수들의 동작과 얼굴 표정을 볼 수 있는 매력이 있다. 나와 무용수 사이의 거리는 그녀의 치맛자락이 내 무릎을 스칠 만큼 가깝다. 거두절미하고, 플라멩코에 대한 인상은 단연 ‘강렬하였다’. 플라멩코라는 말이 (여러 설들 중) 불꽃을 뜻하는 Flama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설에 한 표를 던지고 싶을 만큼 말이다.
# 노래-춤-연주 (칸테-바일레-토케)
플라멩코는 노래를 뜻하는 칸테(Cante Flamenco), 춤을 의미하는 바일레(Baile Flamenco), 기타 연주인 토케(Toque Flamenco)로 구성된다. 여기에 (초기 플라멩코의 반주 격이었던) 팔마스(손뼉)가 더해져 고유의 역동성이 완성된다.
춤도 춤이지만(‘바일레’가 플라멩코의 꽃이긴 하다), 나는 칸테(노래)와 토케(기타) 그리고 팔마스(박수)의 삼위일체에 그만 홀딱 빠져버리고 말았다. 플라멩코 하면 정열적인 붉은 드레스를 입고 바닥을 구르며 열정적인 춤사위를 펼치는 무용수를 (시각적으로) 떠올릴 텐데, 실제 공연을 관람해보니 시각적인 강렬함 이상으로 밀려드는 격렬한 소리의 물결에 전율이 다 느껴질 지경이었다.
무용수의 (귀가 따갑도록 울리는) 구두 소리(사파테아도Zapateado), 휘몰아치는 플라멩코 기타의 격정적인 선율(토케), 이에 맞추어 폭발하듯 감정을 터뜨려 발산하는 가수의 목소리(칸테), 춤과 기타 그리고 노래가 한데 어우러진 리듬 사이를 기가 막히게 (그것도 엇박자로) 타고 들어오는 뜨거운 박수 소리(팔마)와 추임새.
거기에는 슬픔과 분노와 기쁨과 즐거움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말 그대로 희로애락의 결정과도 같은 소리였다. 발목이 끊어져라 현란하게 구르는 무용수들의 발 동작을 1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물끄러미 내려다 보면서, 격정적이면서도 관능적이고 또 슬픈 듯하면서도 환희의 감정을 꾸려내는 (참으로 드라마틱한) 댄서들의 표정을 올려다 보면서, 나는 자꾸 가수와 기타리스트 쪽을 돌아 보았다. 젊은 여자 보컬의 애절하면서도 구슬픈 아니 절절하다고 해야 더 정확할 그 마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어느 순간 울컥하며 (아주 잠시였지만)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깊이 가라앉아 있던 근원적 (원형으로서의) 인간 슬픔을 거세게 휘저어 놓은 듯한 순간. 그 원심력이 어찌나 세찬지 바닥에 가라앉아 딱딱히 굳어 있던 일련의 감정들이 순간적으로 포말을 일으키며 눈시울에까지 이르는 듯했다. 아주 빠르고 강렬하게 지나가는 바람처럼. 그러나 금세 사라지는 눈물처럼. 마침 사람들은 남녀 무용수의 고난도 연속 동작에 환호하고 있었다. 리듬은 흥겨웠고, 박수 소리는 명랑했으며, 사람들은 즐거운 표정이었다.
# 희로애락은 슬픔으로 수렴되고
그러나 나는 너무 슬펐다. 왜 슬픈 것일까. 어쩐지 낯익은 감정. 3년 전 (동춘 서커스를 연상시키는) 사이공 서커스를 보고 났을 때의 슬픔과 유사한 것이었다. 플라멩코를 보면서 나는 그때 기억을 떠올렸다. 본래 표정을 알아볼 수 없이 하얗게 분칠한 광대들, 목과 발에 족쇄를 매달고 두 발로 걸으며 관중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던 거대한 곰, 얼마나 많은 채찍으로 단련 받았을지 모르는 재롱 피우는 코끼리. 그들은 모두 춤(으로 보이는 동작)을 구현하고 있었다.
니체는 춤을 생의 의지로 보았던가? 온몸으로 허공에 그리는 보이지 않는 선들의 흔적을 생의 긍정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막다른 골목에서 꿈틀대는 몸부림으로 볼 것인가. 혹은 체념 속에 희망을 견지한 끊임없는 움직거림으로 볼 것인가. 어쨌거나 살고자 하는 의지는 공통으로 묶이는 코드일까.
문득 우리나라의 판소리, 살풀이춤이 떠올랐다. 굿판이나 무당춤도 떠올랐다. 삶의 질곡 속에서도 이를 풀어내고자 하는 서민들의 의지가 ‘민속 예술’로 승화된 것이 아닌가. 희로애락의 결정이라는 측면에서도 플라멩코와 우리네 가락이나 춤은 어딘지 닮은 꼴이 있다.
어쩐지 희로애락은 애(哀)로 수렴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는 분노하고 기쁘고 심지어 즐거울 때조차 이 슬픔의 감정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리라.
문득 그 일본인 동료에게 묻고 싶어졌다. 과거 그녀가 플라멩코에 대해 말했을 때(분명 여러 번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을 터인데) 나는 왜 묻지 않았을까.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플라멩코에 빠져 들게 했는지. 당시에는 기껏 짐작한다는 것이 영화 <쉘 위 댄스 Shall We Dance>에 기대어 생각해보는 수준이었다. 그녀는 40대 싱글 여성이었고 한 임원의 비서였다. 돌볼 자식도, 야근에 시달릴 만큼 많은 업무량도 없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 대뜸 그녀에게 ‘좀더 다른 식의 대답’을 기대하며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한동안 안부도 묻지 않던 사이임을 감안할 때) 참으로 뜬금없는 일 아닌가.
나는 ‘좀더 다른 식의 짐작’을 해보기로 마음을 접는다. 그녀는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연’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게 ‘사연’이 되었든 ‘사정’이 되었든, ‘플라멩코’가 주는 어떤 강렬한 요소, 희로애락의 어느 한 결정(結晶)이 그녀의 사연(혹은 사정)에서 비롯된 어떤 감정과 맞아 떨어져 불꽃을 일으켰는지도 모른다,는 그런 제멋대로의 짐작 말이다.
나는 그 동안 ‘내 주위’의 사람들 특히 (건조하고 형식적일 수밖에 없는) ‘일’의 관계로 엮인 사람들을 얼만큼 알고 있었던가. 왜 그들을 ‘직장 동료’ 혹은 ‘파트너’ 집단의 일원으로만 생각하고 ‘하나의 개체로서의 인간’으로 바라보지는 못했을까.
플라멩코가 휘저어 놓은 (슬픔과, 체념과, 의지와, 희망과, 즐거움이 복잡하게 뒤얽힌) 감정의 조각들이 생각보다 훨씬 더 멀리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까지) 튀어 나가는 것을 나는 어쩌지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2015. 8.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