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돈키호테 마을에서 (feat. 푸코의 광기와 에피스테메)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 대한 소식을 읽었다.
"2015년은 소설 <돈키호테> 완간 400주년이자 국내에 소설 <돈키호테>가 소개된 지 100주년일 뿐만 아니라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로서 브로드웨이 초연 50주년 및 국내 초연 10주년인 해......"라고 시작하는 글이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어린이판 <Don Quixote>를 내려다본다. 우연인가.
제때 다녀온 셈이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마무리한 장소로 알려진 마을과 그가 묵었던 여인숙 ‘벤타 델 끼오떼(Venta del Quijote)’를 방문한 지 벌써 한 달 반이 다 되어간다. 마드리드에서 남쪽 안달루시아 방면으로 약 1시간 30분 가량 달리다 보면 스페인 중부의 라 만차(Castilla La Mancha) 지방과 만난다. 세르반테스(Cervantes)의 만고의 명작 <El Quijote>의 주인공 돈키호테(Don Quijote)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곳이다.
그 중 '푸에르토 라피세(Puerto Lapice)'라는 마을에 잠시 들르게 되었다. 지나는 사람이나 차들도 거의 보기 힘들 만큼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다. 하얀 벽과 파란 대문이 눈에 띄는 건물 하나. 세르반테스가 이 곳 여인숙에서 돈키호테를 완성했다 하여(믿거나 말거나) 말 그대로 “끼호떼의 여관(Venta Del Quijote)”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지금은 여인숙 용도가 아닌 작은 카페와 기념품 가게 그리고 (건물 2층에 소박하게 꾸려진) 돈키호테 전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전시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아 좀 민망한 수준이지만 나름 돈키호테의 모형과 삽화들(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의 것도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이 전시되어 있다.
건물 밖으로 나오면 돈키호테 동상이 서 있고, 건너편으로 돈키호테와 산초의 실루엣이 큼지막하게 외벽을 차지하고 있는 가게가 보인다. 말 그대로 돈키호테의 마을이다.
우스갯소리 하나.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렸으나 끝까지 읽는 사람은 거의 없는 두 권의 책은? ‘성경’과 ‘돈키호테’란다. 듣고 보니 그렇다. 돈키호테를 모르는 사람은 없어도, 읽었느냐는 질문에 선뜻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하다. 기껏해야 어렸을 때 그림책으로 보거나 어린이 문고판으로 읽은 것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마드리드에서 돈키호테 영문판을 사볼 수 있을까 하여 시내 서점에 가보았더니 (거짓말 안 보태고) 벽돌 두 장을 겹쳐 놓은 듯한 두께를 자랑하는 책뿐이다. 어린이 책도 없다.
문득 (이 경우에 꼭 들어맞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디에선가 읽었던 글이 생각난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스페인을 가리켜 대충 이런 요지로 묘사했던 것 같다. “과거의 위대한 유산을 활용할 줄 모르는 지적 아둔함”이었던가. 좀 센 비판이긴 하지만, 일견 수긍할 만한 부분이 있었다. 현재 유럽의 PIGS(Portugal, Italy, Greece, Spain)라는 오명으로 불리며 재정위기의 나라로 전락한 (한때 유럽을 호령하던) 스페인을 타산지석으로 삼자,는 의미였을 것이다(국제정세 관련 서적이었던 것으로 보아).
좀 부차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전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인 돈키호테를 보다 발전된 형태의 ‘문화 코드’로 부상시키지 못하는 점이 (심지어 관광 코드로서도)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어린이 영문판 돈키호테는 호치민의 한 서점에서 구할 수 있었다. 스페인이 아닌.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표현을 쓰기엔 뭔가 좀 마뜩잖다. 어찌 되었든, 이번에도 아이가 읽기 전 야금야금 내가 먼저 읽는다. 어릴 적 이 책을 (어린이 문고판으로라도) 제대로 읽었는지 의심쩍어하며.
첫 장의 제목부터 인상적이다. Books are bad for you. 너무 많은 책 속에 파묻혀 지내던 알론소 키하노(Alonso Quixada)라는 남자, 게다가 기사도 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초로의 남자. 문제는 ‘책’ 그리고 그 책들이 가득한 남자의 ‘서재’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이다.
언젠가 지인 한 분이 내게 남긴 짧은 쪽지 글이 생각난다.
“너무 머리와 텍스트로만 생각하면 사유에 갇히고, 글에 갇힌다네.”
순간 움찔하였던 기억.
누구나 마음속에 돈키호테를 품고 살지 않나 싶다. 글의 세계에 갇힌 망상(妄想)의 돈키호테이든, 그 세계를 현실로 끌고 나오는 광기(狂氣)의 돈키호테이든. 내 안의 돈키호테는 어느 쪽인가.
플라톤에 의해 창조성의 일환으로 인식되었던 광기는 근대를 지나 ‘이성’이 맞서야 할 공공의 적으로 규정되었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고찰한 것을 보더라도 “근대 이전의 광기는 ‘차이’의 대상일지언정 ‘차별’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푸코가 근대의 발명품으로 정의를 내리고 공격한 정신병과 표준화된 성욕은 사실상 푸코 자신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 Liberation>과의 인터뷰(1981년 5월 31일자)에서 “(제 작업은) 제 자서전의 한 단편입니다”라고 한 그의 고백은 진실이었다. 근대의 억압 체계는 바로 자신의 삶을 옥죄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개인사에 투영된 근대의 폭력성이 자신의 문제만이 아님을 보여주어야 했다. (…)
논문의 제목은 <광기와 정신착란: 고전시대 광기의 역사 folie et deraison. Histoire de la folie a l’age classique>였다(우리나라에는 <광기의 역사>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것은 광기로 불리는 심리 현상이 정신병이 되어가는 역사에 관한 연구였다. 근대는 광기를 ‘실성(失性), deraison’, 즉 이성의 상실로 규정했다. 그럼으로써 광기는 이성의 영역에서 떨어져 나와 정신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곧 광기가 이성의 치료와 통제 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광기에 대한 이성의 지배가 시작된 것이다. (…)
푸코는 모범적이고 표준적인 근대적 현상의 연구를 거부하고 일탈과 비정상으로 정의된 현상을 연구하고자 했다. 광기는 그 출발점이었다.
하상복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 중 94p
푸코가 자신의 <지식의 고고학>에서 중심으로 삼았던 것은 에피스테메 episteme였다. “소설가 보르헤스의 단편 소설을 통해 서구 근대가 수립한 인간과학의 개념과 분석 틀이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는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는 점은 “르네상스 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 학문의 역사를 연속, 계승, 진보가 아닌 불연속, 단절, 반복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과 이어진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푸코가 끌어들이고 있는 근본적 개념이 ‘에피스테메’이다. 특정한 시대의 학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궁극적 원리를 뜻하는 에피스테메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양한 지식에 구조적 통일성을 부여하는 관념 체계” 또는 “특정 시대의 지식의 모든 흐름 아래에 있는 정신적 하부구조”라고 할 수 있다. 15세기부터 16세기 후반에 이르는 르네상스 시대의 지식들을 근거 지은 에피스테메는 유사성이었다. (…) 이는 17세기에 들어 새로운 에피스테메로 대체되었다.
푸코가 고전 시대로 명명한 17-18세기의 에피스테메는 유사성과 결별한다. 푸코에 따르면 이러한 에피스테메의 전환은 소설 <돈키호테>(1605)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푸코는 이 소설의 주인공 돈키호테를 유사성의 에피스테메와 새롭게 발현되는 에피스테메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물로 해석하고 있다. 새로운 에피스테메는 바로 표상(表象, representation)이다.
(같은 책 129p)
굳이 푸코 식의 철학적 접근으로 소설 돈키호테를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유사성’과 ‘표상’의 에피스테메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물로서 돈키호테를 바라보려 애쓸 필요도 없다. 어차피 (내가 느끼기엔) 푸코 역시 또 다른 ‘광기’에 사로잡힌 돈키호테의 발현이다. (광기를 ‘차이’의 맥락에서 본다면) 그는 자신만의 광기를 자신만의 지식의 고고학으로 표현해냈다. 우리의 주인공 돈키호테가 자신만의 광기를 자신만의 행동으로 표출했듯이.
이 즈음에서 드는 생각. 과연 나는 그 무엇에 ‘미쳐’ 보았던가.
운이 좋게도(?) 나는 살면서 특정 분야에 (한때 혹은 지속적으로) 미쳐 있던 사람들을 (정상치 이상으로) 만났다(고 생각한다). 음악에 미친 선배, 기타에 미친 후배, 자신만의 ‘포비아’를 규명하려 몸부림치던 친구, 남자에 목 맨 친구, 여자에 미친 후배, 성 정체성에 천착하던 친구, 심리학에 빠진 친구…… 생각해보면 그들은 누구나 경험할 법한 ‘어떤 대상에 빠지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정도의 (당시에는 무모하다고 여길 만한) ‘행동력’을 갖춘 이들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곤 했는데,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으리라.
미친 듯한 열정과 무시무시한 몰입 그리고 과감한 결정력에 대한 부러움, 그러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연민과 초라함,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함에 대한 분개, 신중함과 사려 깊음이라는 미명 아래 감추어진 우유부단함에 대한 환멸, 부러워하는 얼굴 뒤로 냉소를 보내는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등등. 세월이 흘러 돌아보니 그러한 어지러운 감정들조차 나를 키운 바람이었다(고 믿고 싶다). 미당 서정주 선생이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고 노래한 것처럼.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쓸 당시 염두에 두었던 것은 ‘풍자와 패러디’였던 것으로 안다. ‘쓰다 보니’ 글이 글을 불러오고, 생각이 더 큰 생각으로 확장되어, 그도 자신만의 미세한 광기를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붙들면서 더 큰 불길로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모든 소설가는 어떤 형식으로든 모두 다 세르반테스의 자손들이다.”
– 밀란 쿤데라
최근 국내에 돈키호테 스페인어 완역본이 나왔다는 기사를 접했다. 기사 내용을 보니 보르헤스는 돈키호테를 ‘열린 소설’이라고 했나 보다. 독자의 나이에 따라 소설에서 읽어낼 수 있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두고두고 고전을 읽는 것인지도 모른다.
겨우 어린이 영문판 축약본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을 뿐인데, 스윽스윽 배를 밀며 내게로 다가오는 문장들은, 분명 어렸을 적 동심으로 바라본 것과는 다른 의미일 터이다. 돈키호테의 묘비에 새겨진 마지막 문구처럼.
He lived his life a gallant fool
And finally died wise.
문득 스티브 잡스의 그 유명한 스탠퍼드 연설 중 가장 강력했던 말도 겹쳐 떠오른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미쳤든 혹은 미치지 않았든, 그 긴 여정에 쌓인 낙엽들이 ‘현명함’ 혹은 ‘지혜’라는 거름으로 어딘가 또 다른 생(生)에 스며들 수 있다면 그 또한 미더운 일이 아닌가 하는 자기 위안을 해보며, ‘광인(狂人)으로 살다가 현자(賢者)로 죽은’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천천히 읽어 보고픈 마음이 든다. 때론 아무 생각 없이 깔깔 웃으면서, 때론 날카로운 골계(滑稽)의 예봉에 찔리기도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 깊은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있다면, 아마도 “너의 돈키호테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일 듯하다.
응답하라, 돈키호테!
2015-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