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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n 04. 2020

수련(水蓮)의 힘, 공간의 힘

끌로드 모네의 <수련Nympheas>,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이상하게도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Musee de l’Orangerie)에는 갈 기회가 없었다. 모네의 수련을 보기 위해서,라는 말은 왠지 작품 하나를 위한 ‘수고로운 발걸음’을 가족에게 종용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엔 종용하기로 했다. 하나의 작품을 위해 ‘공간’이 선사하는 힘이 얼마나 큰지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핑계(?)를 삼아서. 


모네의 작품들, 특히 수련은 여러 군데에서 보았다. 미국만 해도 웬만한 미술관에는 그의 그림이 걸려 있다. 보스턴의 파인아트 뮤지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필라델피아 미술관, 워싱턴의 내셔널 갤러리 등등. 인상주의 컬렉션의 보고인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은 말할 것도 없다. 정작 (모네가 죽기 전까지 예술혼을 불태웠던) 오랑주리의 수련 연작은 보지 못했다. 마치 가장 나중에 보려고 남겨둔 것 같은 모양새다. (정말 일이 그리 되려고 그랬나?) 


지금까지 본 모든 수련들을 압도하고도 남을 그림은 역시 오랑주리에 있는 수련 연작이었다. 그만큼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으면서 보는 바도 좀 나아져서인지, 아니면 두 개의 커다란 타원형의 방에 배치된 (사방을 둘러싼) 수련의 힘, 곧 공간의 힘 때문인지, 아무튼 다른 곳에서 그의 작품을 보던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아침 일찍 찾아간 덕분에 전시관은 사람들로 붐비지 않아 좋았다. 나는 이 ‘그림+공간’이 주는 힘을 몸으로 기억해 가려고 방 한가운데에 놓인 의자에 오래 앉아 있었다. 참 멋진 일이다. 오직 수련 작품을 위해 1층 공간 전체를 내어 구성한 기획력.    



# 모네와 수련


모네는 1883년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60km 가량 떨어진) 지베르니Giverny로 집을 옮긴 후 1892년부터 그곳에서 수련을 그리기 시작했다. 1909년 48개의 수련 그림이 파리에서 공개되고 호평을 받자 모네는 대형 수련을 그리기 시작한다. 1918년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당시 프랑스 총리였던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가 지베르니를 찾는다. 여든에 가까운 나이에 백내장까지 앓고 있어 그림을 그리는 것이 녹록지 않던 노화가에게 클레망소는 설득을 거듭한 끝에 모네로 하여금 그의 최후의 대작(여덟 점의 수련 연작)을 조국 프랑스에 기증하도록 하는 데 성공한다. (1층 전시실 입구에 클레망소의 조각상이 있을 만하다.) 

자신의 사후에 수련 연작이 원형의 방에 전시되도록 한다는 조건으로 모네는 동의한다. 그림을 보는 이가 둥근 방의 한가운데에서 수련에 둘러 싸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도 공간의 힘을 믿었던 것일까.  



“나는 우주가 내게 보여 준 것을 본 것에 불과하다”는 모네의 말을 새겨 본다. 인상주의를 처음 연 장본인이기도 한 그가 평생 동안 천착한 빛과 공기와 물과 흙을 떠올린다면 비단 겸손의 표현만은 아닐 것이다. 거장의 ‘말’이자 응축된 ‘정신’이다. 


두 개의 전시실을 오가며 여덟 개의 그림 앞에서 서성이는 동안 하나 둘씩 관람객들이 늘어간다. 하나 마나 한 일인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카메라를 들이댄다. 육안(肉眼)과, 몸으로만 체감할 수 있는 공간 감각은 결코 카메라로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1층 전시실을 빠져 나오면서도, 그리고 지금 그때 기억을 더듬으면서도, 내 빈곤한 언어로 탐색할 수 없는 잔상(殘想)의 난감함은 여전하다. 


모네가 표상하는 ‘순간’의 이미지와 내가 그림을 바라보는 그 시점의 ‘순간’. 이 두 순간이 순간적으로 병치되는 순간.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는가. 그 ‘순간’을 ‘지켜보는 것’ 이외에.   



# 바슐라르를 통해 본 수련


오늘 우연히 가스통 바슐라르의 책을 뒤적이다가 놀랍게도 그가 풀어놓은 ‘수련’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다. 나는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낯설고도 신기한 마음으로 (그리고 감탄하는 마음으로) 거장의 작품을 읽는 이 사색가(철학자이자 몽상가)의 말을 찬찬히 더듬어 본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분명 대수롭지 않게 휙 넘어간 부분일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보이는 만큼 읽히는 모양이다.


수련은 여름 꽃이다. (…) 그리고 9월이 들어서 수련이 시들게 되면 이는 혹독한 기나긴 겨울이 온다는 전조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일을 해야 클로드 모네처럼 물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비축하고, 강가에 핀 꽃들의 저 짧고 불타는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다. (…) 그렇다. 자신의 화폭을 꽃피우러 간다는 즐거움에 흠뻑 젖은 채, 화가는 아틀리에에서처럼 들판에서도 ‘모델’과 농담을 한다. (…) 

참으로 많은 젊은 기운을 되찾을 줄 알고, 낮과 밤의 리듬에 지극히 충실하게 따르며, 새벽의 순간을 정확하게 어김없이 말하는 특성, 바로 이 때문에 수련은 인상주의의 꽃이 된 것이다. 수련은 세계의 한 순간이다.

저 카멜레온 같은 강물은 새로운 빛의 만화경에 즉시 응하기 위해서 얼마나 대단한 생명력을 가져야만 하는가! (…) 움직이는 물은 물속에 꽃의 맥박을 담아낸다고 시인은 말했다. (…) 

모네의 물 그림 앞에서 몽상하는 철학자는 과감하게 마음만 먹는다면, 붓꽃과 수련의 변증법, 반듯하게 꼿꼿한 잎과 물 위에 조용하고 지혜롭고 둔중하게 기대어 있는 잎의 변증법을 전개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물에 사는 식물의 변증법 자체가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한쪽은 자신의 타고난 삶터에 대한 무언지 알 수 없는 반항으로 생기를 얻어 솟아오르려 하고, 다른 한쪽은 자신의 삶터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수련은 잔잔한 물결이 주는 고요의 교훈을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화가는 이 모든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며, 물의 고요한 세계를 수직으로 구성하는 확실한 원리를 물에 반영된 모습들 속에서 발견할 줄 안다. (…) 

우리가 물가에서 몽상을 하게 되면 반드시 물에 반영된 모습과 깊이의 변증법을 표현하게 된다. 물결의 심층에는 무언지 알 수 없는 물질이 있어 반영된 모습을 풍요롭게 해주러 오는 것 같다. 진흙은 거울의 뒤에 입히는 주석과 수은의 합금과 같은 작용을 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제공되는 모든 그림자들에 물질의 어둠을 결합시킨다. 강물의 밑바닥 역시 화가에겐 미묘한 놀라운 것들을 제시한다. 

세계는 보아주기를 원한다. (…) 클로드 모네가 수련을 주시한 이래로 (…) 평생 동안 그는 자신의 시선 아래 들어오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을 증가시킬 줄 알았지 않았던가. 그는 부자가 되었을 때 – 매우 뒤늦게! – 지베르니에 물의 정원사를 고용해 꽃 핀 수련들의 넓은 잎들에 낀 모든 더러운 것을 닦아내게 했고, 뿌리를 자극하도록 물이 적당히 활기차게 흐르게 했으며, 바람을 타고 물의 거울을 자극하는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약간 더 휘어지게 했다. 

요컨대, 자기 생애의 모든 행동에서, 또 예술에서의 모든 노력에서 클로드 모네는 세계를 이끌어 가는 미적 힘들에 대한 봉사자이자 그것들의 안내자였다.  

- 가스통 바슐라르, <꿈꿀 권리> 중 ‘수련 혹은 여름날 새벽의 놀라움’ 중에서 



모네의 말을 다시 새겨 본다. “나는 우주가 내게 보여 준 것을 본 것에 불과하다.”

그렇구나, 내가 모네의 수련 연작을 통해 수렴해내고 싶었던 잔상(殘想)의 말들은 ‘순간’과 ‘보다’였다. 자연 속 “날아가는 순간”을 포착하는 그의 놀라운 재능(Monet’s amazing talent to catch “fleeting moments” in nature), 아니 시선에서 나는 시인의 면모를 보고 싶었나 보다. 


적어도 내게 그는 ‘화폭(畵幅) 위의 시인(詩人)’이다. 


2015. 9. 15 


사족: 오랑주리 미술관 지하1층. (본격적인 큐비즘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흥미로운 피카소 그림, 세잔과 마티스, 르누아르, 모딜리아니, 그리고 좀처럼 보기 힘든 마리 로랑생의 그림 등, 화상(畵商) 폴 기욤의 컬렉션들로 이루어진 지하 1층 전시실은 조촐하면서도 알차다. 예상치 못한 보너스처럼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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