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읽고 잘 꿈꾸기

바슐라르에 부쳐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자면,

우리에게 걸음처럼 몸에 새겨진 계시 하나가 있다.


‘너는 너를 증명할 수 있는 도구를 구비하고 여기로 올 것.’


여기에 찍으셔야 합니다. (인)

저는 아직 지문도 도장도 없는 사람입니다만


(...)


빛의 날에 양각되는 기분입니다

자꾸 피를 흘리는 기분입니다


피 묻는 발자국으로. 아무도 걷지 않는 설원을 걸었습니다. 설원에 찍은 발자국이 겨울을 지속해도 괜찮다는 날인으로 간주되었다면, 저는 그저 흰 눈에 속은 겁니다만


(...) 흰 눈에 뒤덮인 나무와 흰 눈을 뒤쫓는 나는

누가 더 고된 삶입니까.


흰 눈에 찍히는 발자국. 이 발자국은 다음 발자국에 대한 보증이 맞습니까. 이 걸음이 다음 계절로 가는 걸음이 맞습니까. 겨울은 혹시 둥근 모양 아닙니까. 둥근 모양을 감추는 것이 혹시 흰 종잇장 같은 설원은 아닙니까.


저는 지금 발도장이 되어 가는 중입니까.


(후략)


- 김광호, '도장을 파는 일' 일부 (<문학사상> 577호)




# 바슐라르, 질료, 이미지, 상상력, 시적 몽상


최근 바슐라르의 <물과 꿈>을 읽고 있다. 1주일에 한 장씩 천천히. 가스통 바슐라르의 다른 원서들을 몇 권 읽었고, 4원소(물, 불, 흙, 공기)에 기반해 바슐라르가 천착한 ‘질료적 상상력’과 ‘몽상의 시학’을 다룬 개론서나 강의록도 읽었지만, 이번만큼 정밀하고 입체적으로 텍스트를 읽은 적은 없는 것 같다.


바슐라르 텍스트 자체가 주는 감흥도 있지만(난감한 번역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문장들이 있다), 그의 텍스트를 계기 삼아 인접 영역(신화와 상징, 철학, 정신분석, 미술사, 심리학, 19세기 문학 등)으로 호기심과 사유를 확장할 수 있다는 점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중심 키워드는 이미지와 상상력.


한 달 전, 친구 B를 만났을 때 B는 마르크스의 박사 논문을 읽고 있다고 했다. 제목은 무려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유물론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다가 바슐라르가 언급되었고, 내가 바슐라르를 읽고 있다고 하자 B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B는 바슐라르를 자연철학 계보를 잇는 과학철학자로서만 인식하고 있었다.


근데 바슐라르는 왜 읽는 거야? B가 물었고.

시학 때문에. 나는 답했다.


논리와 이성에 기반한 ‘과학의 세계’에서 이미지와 감성에 기반한 ‘시적 상상력의 세계’로 이행한 바슐라르,라는 한 문제적 개인에 대한 관심도 있었다. 그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를 기원으로 하는) 전통적 4원소(물, 불 흙, 공기)에 기초한 ‘물질적(질료적)’ 상상력에 집중한 것은 과학자다운 면모라고 생각했다. 대상을 형태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닌 물질로서 파악하는 그의 “물질적 이미지”에 나는 새삼 매력을 느꼈다. 바슐라르의 시학과 문학비평이 ‘질료적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은, 시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에 모종의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


어쨌든 바슐라르의 <물과 꿈>을 계기로 나는 다양한 것들을 탐색할 수 있었는데. 4원소론, 질료와 형상, 신화와 상징(바슐라르가 ‘문화 콤플렉스’라 부르는),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비현실, 꿈과 몽상, 언어와 이미지 같은 문제들이 그것이다.


특히 나를 매료시킨 지점은 꿈과 몽상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지 않고 ‘몽상’을 의식의 활동으로 끌어당긴 점이다. 꿈이 무의식의 영역이라면 몽상은 의식의 영역인 것. 즉 무의식과 의식의 영역 사이에서 이미지를 불러오고 결합하고 키워나가는 ‘몽상의 의식(la conscience rêveuse)’은 시쓰기(혹은 그리기)의 과정(혹은 순간)과 유사하게 느껴진다. 바슐라르는 시에 포커스를 맞추었지만, 시로 대변될 수 있는 다양한 예술 영역에 이 '몽상의 의식'이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몽상은 의식의 빛이 그 안에 존속하고 있는 정신 활동이다.”

-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합리적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의식, 현실 세계와 비현실 세계의 매개지대를 탐색하는 의식, 끊임없이 시적 몽상을 유발하는 의식, 존재 이전의 상태로부터 나오는 의식. 이러한 의식은 기존의 철학적 의식의 개념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새로운 카테고리로 분류될 수 있는 의식이다. 이것은 몽상의 의식(la conscience rêveuse)이라 불릴 만한 새로운 의식의 모습이다.”

- 홍명희,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 개념-뿌리들


<물과 꿈>을 읽으며 각 장이 다루고(혹은 언급하고) 있는 또 다른 텍스트(문학/철학/분석심리학/종교/신화)까지 찾아 읽느라 가뜩이나 산만한 정신이 더욱 산만해지고 있다. 에드거 포의 시와 단편들, 융과 엘리아데, <햄릿>의 ‘오필리아의 죽음’에 대한 다양한 고찰(여성의 자살), 노발리스의 <푸른 꽃>, 말라르메의 시, 베르그손의 ‘지속’ 개념 등등.


사정이 이렇다 보니 철학자 이정우의 <개념-뿌리들>도 다시 읽게 되었는데, 일상적으로 쓰이면서도 철학적 개념을 품고 있는 말들을 좀 더 정확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예컨대, 시간, 무(無,) 현실, 존재, 실재, 실체, 본질, 영혼, 정신, 범주 등등.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의 개정판 머리말에서 이정우는 ‘이미지와 개념’이라는 제목 아래,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를 비판하면서 개념과 사유의 필요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미지와 개념이 나란히 상보적 관계를 가질 수는 없을까.


# 이미지와 개념, 체험적 상상력, 창조적 결합


시 한 편을 쓸 때 이런 느낌을 갖는다. 이미지와 관념(언어로서의 개념)이 동시에 발생한다. 서로를 견제한다. 주로 이미지가 관념을 소거하려 애쓰는 양상이긴 하지만. 감성과 이성이 서로 돕는 동시에 치열하게 싸운다. 상상력과 논리가 포섭과 배제를 오가며 뒤섞인다. 한 편의 시(굳이 구분하고 싶진 않지만 소위 현대시라 불리는)를 읽을 때에도 이러한 체험 과정을 거친다.


최근 읽은 김광호의 시들도 그랬다. 그중 '도장을 파는 일'이라는 (위에 인용한) 시는 언뜻 보았을 때 평범해보였지만, 이미지와 개념의 마찰이 빚어내는 효과를 생각하게끔 한다는 측면에서 눈길을 끌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걸음처럼 몸에 새겨진 계시 하나가 있다.


‘너는 너를 증명할 수 있는 도구를 구비하고 여기로 올 것.’


표면에서 부유하는 이미지를 표면으로(이미지 자체로)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보이지 않는 뿌리들을 더듬으며 그 모호한 형상을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개입했을 개념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이러한 이중적 체험일 텐데.


흰 눈에 찍히는 발자국. 이 발자국은 다음 발자국에 대한 보증이 맞습니까. 이 걸음이 다음 계절로 가는 걸음이 맞습니까. 겨울은 혹시 둥근 모양 아닙니까. 둥근 모양을 감추는 것이 혹시 흰 종잇장 같은 설원은 아닙니까.


하얀 설원에 찍히는 핏빛 발자국,과 하얀 종이에 찍히는 붉은 도장,이라는 선명한 이미지. 이 두 가지 계열의 이미지를 이어주는 어떤 원형(개념-뿌리)의 감각. "걸음처럼 몸에 새겨진 계시"와 존재 증명을 위한 도구로서의 도장. 도장이라는 물질적 대상(혹은 이미지)과 존재라는 개념의 크로스오버를 감지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겨울과 원형(圓形, 둥근 모양)이라는 개념이 주는 어떤 원형(原型)적 이미지에 더해, '빛'과 '양각'과 '피'라는 단어가 주는 이중적 의미가 교차된다.


빛의 날에 양각되는 기분입니다

자꾸 피를 흘리는 기분입니다


시와 철학의 밀접한 관계를 자주 생각해왔다. 시는 철학이 아니고 철학은 시가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를 떠받치고 있다는 생각.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때론 불화하고, 때론 동거하며. 서로를 되비추거나 발현시키는 관계. 시에서 철학적 메시지를 읽어내고, 철학 텍스트에서 시적 감수성을 감지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정우가 말했듯, 철학이 결국 "개념들을 명료화하고 종합하는 행위"라면, 즉 "단순한 합이 아닌 새로운 창조"를 전제하는 것이라면, 시와 철학의 공통점은 바로 이 ‘기존의 단위(개념 혹은 이미지)’를 뛰어넘어 새롭게 조합하는 ‘창조적 과정’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카뮈는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자살(죽음)이라고 했고, 바슐라르는 죽음이 무엇보다 이미지라고 했다.


“죽음은 무엇보다도 이미지이고 또 이미지로 산다.”

- 바슐라르, <대지와 휴식의 몽상>


바슐라르는 '시'를 통해 즉 이미지(꿈)의 언어로 실재를 감지하고 감응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시는 이미지와 개념의 창조적 결합이다.


어느 순간부터 (시를 읽거나 공부하며) 시를 쓰고 싶어하는 것은 시를 좀 더 잘 읽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소망은 영화를 조금이라도 더 잘 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 그런 맥락이라면 이렇게 확장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공부하(고 싶어하)는 것은 삶을 더 잘 살기 위해서다.


“문학비평의 실전적인 측면에서 볼 때, 바슐라르의 메시지는 ‘잘 읽고, 잘 꿈꾼다”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다.”

- 홍명희,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더 잘 읽고, 더 잘 보고, 더 잘 살고 싶다.

그리고. 더 잘 꿈꾸고 싶다.


(202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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