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념 vs. 상상력
어항 속에서 놀다가 그만 숨 쉬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목소리만 존재하는 그가
한 편의 유서를 읽으며
내 머리채를 잡고 물속에서 끌어냅니다
- 강성은,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창비(2009), '음악' 전문
저는 생각이 너무 많아요. 누군가 이야기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던 기억. 그나마 생각이 많아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
생각이 너무 많다,는 말. 두 가지 측면. 1) 그러니까 요 모양 요 꼴이지. 2) 그나마 이렇게라도 사는 거지.
혈류가 갑자기 빨라지듯 생각의 흐름이 빨라질 때. 설렘과 우울이 동시에 온다. 이건 이상하다. 설렘과 우울은 보통 서로를 밀쳐내지 않나. 양가적 감정. 규정할 수 없는 감정의 분화. 감정은 물과 같다.
물과 꿈
바슐라르는 <물과 꿈>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물의 질료적 특성을 짚어냈다. 자기 반영으로서의 나르시시즘, 죽음의 물, 모성과 여성성(관능성)의 물, 물과 흙의 결합이 빚어낸 (창조적 의미로서의) ‘반죽’과 '손', 물과 밤의 조합, 순수와 정화의 물, 부드러운 물(민물)의 우위성, 난폭한 물 등등. 무수한 작가들과 텍스트들을 가로질러, 고정되지 않은 유동적 물질로서의 물, 용해성, 포용성, 시간을 거슬러 기원을 상상하게끔 하는 힘,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는 것이 좋았다. 물이 갖는 양가성에 대해서도.
함께 읽은 이반 일리치의 <H20와 망각의 강>. 바슐라르가 물이 주는 질료적 상상력에 포커스를 맞췄다면, 일리치는 H2O로 명명된 근대화된 물(근대가 만들어낸 화학물질로서의 물)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펼친다. (일리치답다.) "근대의 물질 H2O에 쓸려간 물과 꿈에 관한 보고서"라는 소개 문구가 바슐라르의 <물과 꿈>을 직접적으로 연상케 한다.
"H2O는 물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가 만들어낸 화학물질이며, 변기와 호수에 두루 쓰이는 재활용수에 불과하다. 망각의 강으로부터 기억을 실어 나르고 잠든 영혼을 일깨우던 물의 역할은 오늘날 사라졌다. 물이 H2O가 되면서 차이와 우연에서 비롯된 세계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우리는 연속적이고 균일한 환경이 끝없이 펼쳐진 근대의 획일화된 세상에서 살게 되었다. 이 책은 오래도록 우리들 인간의 꿈과 상징을 담아내던 ‘역사적 물질들’을 통해 현대라는 시대가 상실한 삶의 본래적 모습을 슬프고도 아름다운 언어로 되살린 회고록이다."
- <H20와 망각의 강> 출판사 소개글
이반 일리치의 시각에서 보자면 물에 대한 바슐라르식 접근(질료, 상상력, 꿈, 상징 등)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 일리치는 20세기 후반을 거치면서 물은 H20라는 깨끗한 액체로의 변신을 완수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질료’로서의 물의 회복일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꼭지 제목이 ‘질료’의 회복인 것처럼. 비판적 어조로 마무리되는 마지막 문장들.
20세기의 상상력 속에서 물은 그 속에 깊이 간직된 순수함을 전달해주는 능력을 잃었고, 영혼의 오점을 씻어내는 신비한 능력도 잃게 되었다. 물은 이제 산업과 기술용 세정제가 되어 독성이 있거나 피부병을 일으키는 물질로 기피된다.
(…) 역사를 통틀어 물은 순수함을 내뿜는 질료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H20가 새로운 질료의 자리에 앉게 되면서 이제는 이 질료의 순수성에 인간의 생존이 좌우되기에 이르렀다. H20와 물은 서로 적대적인 것이 되었다. H20는 현대 사회의 발명품이자 기술적 관리가 필요한 희소 자원이다. 그것은 꿈꾸는 물의 능력을 잃어버린 한낱 액체에 불과하다. 도시 아이들은 살아 있는 물과 접촉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물은 더이상 눈에 띄지 않으며 상상되기만 할 뿐이다. 떨어지는 물방울이나 소박한 웅덩이를 통해 이따금 회상될 뿐이다.
- 이반 일리치, <H2O와 망각의 강>, 안희곤 옮김, 사월의책, 6장 '현대의 물' 중 131-132쪽
바슐라르의 <물과 꿈>을 읽는 이유도 일리치가 지적했듯 바로 ‘질료’로서의 물의 이미지, 질료적 상상력의 복권에 참여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앞으로 물을 바라볼 때 나의 태도는 이렇게 바뀔 것 같다. (한낱 액체에 불과한 대상으로서) 깨끗한가 아닌가를 먼저 살피는 대신, 물이라는 질료(혹은 매개)를 통해 상상력과 상징에 접속하는 것. 코로나 이후 1년 넘게 매일 천변을 걷고 있지만, 요즘처럼 물이 '다르게' 보이고, 물에 관한 시인들의 시가 다른 질감으로 다가온 적이 있었던가. 안태운의 시가, 진은영의 시가.
물(사물,로 통칭될 수 있는)과 함께 꿈꾸는 능력을 잃지 말자,는 (약간의 오글거리는) 생각. 시를 읽거나 시에 관한 글을 쓰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텐데.
잡념
<물과 꿈>을 마저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진 여러 책들과 두서없이 적어놓은 메모들로 생각이 옮아갔다가, 파울 첼란을 읽어야겠는데 생각하다가, 어제 롤링 스톤즈 드러머 찰리 와츠가 80세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롤링 스톤즈를 안 들을 수 없잖아 생각하곤 몇몇 곡들을 틀어놓고, 그제 들은 장 뤽 낭시 별세 소식도 문득 떠올라 최근 읽은 낭시 관련 글을 뒤적이다가, 블랑쇼 책을 펼쳤다가, 시계를 흘끗 바라보고는, 시간이 없는데, 라고 생각하는 것. 날이 차가워지니 슬슬 도지는 어깨 통증과, 오래 전 예약한 대학병원 진료일이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 이러다 허리 통증도 도지는 건 아닐까 하는 염려. 이런 내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한번도 해본 적 없는 글쓰기에 도전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오늘 아이가 일찍 하교하는 날이군, 저녁은 뭘 해주지 하는 생각...... 직장에선 그토록 팀원들에게 우선순위(priority setting)에 대해 강조했으면서. 우선순위 세팅이 안 되고 있는 요즘. 이런 걸 탈중심 사고,라 하면 지나친 미화일 테고, 분열,이라 하면 자못 위악적일 텐데. 속수무책. 속수무책,이라는 말을 적어놓고 보니 김경후 시인의 시 '속수무책'도 떠오르고. 다종다양한 생각들이 얽히고설켜 혈전처럼 뭉치는 듯하다가, 블랙아웃.
생각도 병인 양하여. 물 속에 있다가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느낌. 마크해둔 시들을 살펴보다가 강성은의 ‘음악’을 발견. 오늘은 그냥 듣는 것으로. 어떤 목소리가 문득 내 머리채를 잡고 이 어항에서 밖으로 끌어내주겠지.
롤링 스톤즈
https://youtu.be/YI-OzM0dy30?t=443
드러머 찰리 와츠(Charlie Watts)의 별세 소식을 빌미로 롤링 스톤즈의 <Miss You>를 듣는다. 이 곡 자체를 좋아한다기보다는 대릴 존스(Darrly Jones)의 존재감 넘치는 베이스 기타 때문에. 그의 베이스 솔로는 압도적이다.
이웃이 올려준 곡들을 보며 오랜만에 롤링 스톤즈의 <Satisfaction>, <Start me Up>, <Paint It Black> 같은 곡들도 들어본다.
롤링 스톤즈에 그렇게 열광하지는 않았지만 반세기가 넘도록 밴드 활동을 이어가는 그들의 '지속성'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그저 좋아하는 걸 즐기며 계속할 뿐이라고 말했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롤링 스톤즈를 들으며 나는 또 이런 생각.
I NEED SOMETHING TO START ME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