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은 결여에서 나온다
블랑쇼는 릴케를 빌어 "나는 진실로 글을 쓰도록 강요당하고 있는가"라는 자문에 대해 생각해볼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카프카를 끌어온다.
"그것은 하나의 위탁인 것입니다. 나는 나의 본성대로 누군가 나에게 행하지도 않은 위탁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모순 속에서, 언제나 어떤 모순 속에서만, 나는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카프카)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그것은 위탁이 아니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또한 아무도 그에게 그런 위탁을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가 이 위탁을 맞이하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자여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그 속에서 살 수 없는 모순이다."
르네상스부터 낭만주의에 이르기까지, 예술을 천재로, 시를 주관적인 것으로 환원하려는 노력이 있어왔다,고 블랑쇼는 말한다. 시인은 들려주어야 할 자신의 노래를 갖고 있고, 작가는 전해야 하는 자신의 메시지를 갖고 있다는 것. '나에게는 말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예술과 작품의 요청과의 여러 관계 속에서 가장 낮은 단계라는 것. 가장 높은 단계는 아무런 이유도 발견할 수 없는 격렬한 창조의 폭풍인 것 같다,고도 덧붙인다.
아무것도 아닌 자,와 아무런 이유도 발견할 수 없는 순간,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생각해본다. 나는 강요당하고 있는가?
# 영화와 시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오시프 만델슈탐
주말에 오시프 만델슈탐의 시집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를 읽었다. 오시프 만델슈탐,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영화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책 <봉인된 시간>에서였을 것이다. 한동안 절판되어 구하기 힘들었던(혹은 중고 서점에서 너무나 높은 가격에 판매되고 있던) 이 책이 최근 <시간의 각인>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이전 책이 중역본이었다면 이번엔 러시아어 직역본으로. 나는 쾌재를 불렀고 즉시 주문했다. 그동안 그의 영화를 세 편밖에 보지 못했지만 나는 그의 영화에 완전 매료되었는데, 아마도 그의 영화가 주는 시적 이미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영화가 '영화-시'라고 생각했고, 영상 텍스트로 쓰여진 그 시를 어떻게든 활자 텍스트로 옮겨와 나름의 감응을 적어보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지금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의 목소리로 적힌 '영화-시-론'을 다시 읽는 것.
타르코프스키는 시를 문학 장르의 하나로 보지 않는다.
"시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자 현실을 보는 특별한 성격의 태도이다. 이때 시는 인간을 평생 지배하는 철학이 된다."
-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시간의 각인>, 라승도 옮김, 곰출판(2021), 32쪽
그러면서 그는 몇몇 이름들을 언급한다. 빈센트 반 고흐, 오시프 만델시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찰리 채플린, 알렉산드르 도브젠코, 미조구치 겐지 등.
영화에서 감독이 하는 작업의 본질을 "시간을 조각하는 것"이라고 본 타르코프스키는 "조각가가 대리석 덩어리를 붙들고 완성된 작품을 떠올리며 군더더기를 제거하듯이, 영화인은 거대하고 불가분한 집합체로 이루어진 시간 덩어리에서 영화 이미지의 필요한 요소로 판명되는 것만 남겨두고 불필요한 것을 모두 잘라내서 던져버린다"고 말한다."모든 예술 장르에 존재하는 예술적 선별 작업은 바로 이런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도 덧붙인다.
그가 자신의 구체적 영화작품을 앞에 두고 영화 미학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는 것도 무척 흥미롭지만, 문학과 영화를 아우르며 러시아 문화의 지적 전통을 따라가는 것도 즐거운 자극이 된다. 타르코프스키를 찬미하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추천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영화 이론이나 철학서라기보다는 '방법에 대한 시적인 감흥'에 가깝다고. 타르코프스키의 문장을 시 구절처럼 음미하고, 이 책을 시집처럼 읽는 그의 제스처가 결코 과장되어 보이지 않는다. (상당히 감상적으로 흐르는 그의 추천사가 나는 놀랍기까지 하다.) 그 역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와 글에서 '시적인 시간'을 포착한다. 영화와 시와 시간. 정성일은 독자에게 두 가지를 요구한다. 타르코프스키 영화를 다시 보는 것, 그리고 이 책을 천천히 읽는 것. <노스탤지아>와 <희생>을 보고 나서 거꾸로 첫 작품인 <이반의 어린 시절>을 본 나로서는, 첫 번째 영화 <이반의 어린 시절>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한다. 언젠가 (이번엔) <이반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글을 시작으로 그의 다른 영화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기를.
# 시간과 침묵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와 만델슈탐의 시에서 나는 공통적으로 '시간'과 '침묵'을 읽는다. 묘하게도, 최근 읽은 혹은 읽고 있는 일련의 책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지점에 만델슈탐이 있다. 이 또한 필연적 만남일지도. 이장욱의 <혁명과 모더니즘: 러시아의 시와 미학>을 읽다가 나는 1910년대에 러시아 상징주의를 비판하며 일어난 문예 운동인 '아크메이즘Akmeism'에 흥미를 느낀다. 안나 아흐마토바와 오십 만델시탐이라는 이름이 눈에 띈다.
"장미는 진정한 무엇을 상징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다만 장미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그 유명한 아크메이즘의 명제와 함께. 심상이면서 심상이 아닌 것. 객관적 대상과 주관적 내면의 가장 모호한, 그러나 가장 절묘한 지점을 이야기하는 것. 나는 내가 추구하는 미묘한 공간을 떠올린다. 상징주의의 암시성, 음악성, 모호성의 뉘앙스를 보유하면서도 구체적 사물/현실이 던져주는 명료한 이미지를 그려볼 수 있는 어떤 공간. 그리하여 그 둘을 교묘히 중첩시키는 것.
그 공간을 감지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말로 옮길 것인가. 암시와 명시를 어떻게 교묘히 중첩시킬 것인가.
만델슈탐의 시집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 실린 표제작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고'엔 이런 구절이 있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고,
아무것도 배울 필요가 없으니,
(...)
아무것도 배우고 싶지 않기에
아예 말할 줄도 모른다.
- 오시프 만델슈탐,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조주관 옮김, 문학의숲(2012), 20쪽
이어지는 시 '침묵'의 첫 연은 이렇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나,
그녀는 음악이요 말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깨뜨릴 수 없는 관계.
- 같은 책, 21쪽
만델슈탐을 애정하는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평론가이자 러시아 문학 전공자인) 이장욱은 시집 끄트머리에 짧은 글을 올리면서 첫 연 4행의 '관계'를 '연결'로 번역한다. 앞서 그의 <혁명과 모더니즘>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기에 반가운 마음이 든다. 만델슈탐의 시를 통해 그가 간략히 요약하는 '아크메이즘'의 특징을 다시 들여다본다.
그(만델슈탐)는 시의 리듬에만 매몰되지 않았고, 시어의 상징성만을 부각시키지도 않았으며, 시적 형식의 파괴에 몰두하지도 않았다. 그는 세기말의 시인들처럼 쇼펜하우어적 염세에 자신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현실 세계에 도래할 '진정한 세계'가 따로 있으리라는 유토피아적 강박 같은 것도 갖지 않았다. 그는 디오니소스적 열정보다는 아폴론적 이성에 의지하고 있었으며, 헤브라이즘의 종교성보다는 헬레니즘의 인간주의를 신뢰하고 있었다.
- 같은 책, 이장욱, '나의 사랑하는 敵, 만델슈탐', 167쪽
나는 "아름다움=침묵=음악=말의 세계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 깨뜨릴 수 없는 연결'로서 존재한다"는 말에, "침묵은 말의 부재이지만 말 그 자체이기도 하므로 인간의 말은 '침묵'으로 존재할 때 진정한 말이 된다"는 말에 공감한다.
# 파울 첼란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장미는 다만 장미이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아크메이즘의 명제는 파울 첼란의 네 번째 시집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로 연결된다. 아닌 게 아니라, 첼란은 이 시집을 오시프 만델슈탐에게 헌정했다. 만델슈탐이라는 유태계 러시아 시인이 첼란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알려주는 지점이다.
첼란의 첫 번째 시집 <양귀비와 기억>, 두 번째 시집 <문지방에서 문지방으로>, 세 번째 시집 <언어격자>까지는 허수경 시인이 번역한 파울 첼란 전집이 <죽음의 푸가>를 옮긴 전영애 번역보다 낫다고 생각했으나, 네 번째 시집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만큼은 '시와 진실'에서 펴낸 제여매 번역본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완역본이라는 점. 번역 자체도 그렇거니와 알찬 주석을 통해 시와 시인을 이해하는 데 보다 나은 가이드 역할을 해주기 때문. 그중 시집의 제목이 포함된 '찬미가'라는 시의 3연을 보자.
아무것도 아니
었다네 우리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으리니, 활짝 피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의,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 파울 첼란,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제여매 옮김, 시와 진실(2010), 25쪽
옮긴이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아닌 자 Niemand"와 "아무 것도 아닌 것 Nichts"은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와 관계가 있다기보다는, 역사 속의 무명의 존재들이며, 작은 희망을 잃지 않고 아직 현존하지는 않으나 미래의 어느 대상을 지칭하는 대명사라 할 수 있다."
- 같은 책, 128쪽
유대인으로서 아우슈비츠라는 역사적 비극을 경험한 시인 파울 첼란에게 '아무도 아닌 자'는 역사 속에서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익명의 존재들일 것이다. 좁게는 나치에 의해 학살당한 유대인 동족을 의미할 수도, 넓게는 오랜 박해와 시련을 겪어온 유대인 혹은 (유대인으로 대변될 수 있는) 모든 주변인을 아우르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찬미의 대상이 '신' 혹은 '초월'의 영역이 아니라 바로 이 '아무도 아닌 자'와 '아무 것도 아닌 장미'라는 점이 중요할 것이다.
# 아르토, 사유하기의 불가능성이라는 사유
다시 블랑쇼로 돌아와서. 블랑쇼가 '앙토냉 아르토'에 관해 쓴 글을 뒤적인다. 아르토가 NRF의 편집장 자크 리비에르와 주고받은 유명한 서신 이야기로 시작되는 글. 쓸 수 없다,는 생각. 쓰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 쓸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글을 쓰는 나 자신에게 피로해질 대로 피로해진 상태에서 이 글을 읽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20대의 아르토가 NRF 잡지에 시를 보낸다. 거절당한다. 그러자 아르토는 왜 자신이 결함 많은 이 시들을 고집하는지 설명하는 편지를 보낸다. 자신이 '사유의 포기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는 것. 그러자 편집장이었던 자크 리비에르는 이 출간할 수 없는 시에 관한 편지를 발표하자고 이야기한다.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 적는 블랑쇼의 문장들은 한층 더 의미심장하다.
그는 그것들이 불충분해서 출판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그 불충분성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로 보충되면 더 이상 그렇지 않게 된다. 그것들이 결여하고 있는 것, 즉 그 시들의 결점이 그 결점을 공공연하게 표현하고, 그 결여의 필연성의 심화를 통해 풍부함으로 변하고 완성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자크 리비에르는 작품 그 자체보다도 바로 작품의 경험, 작품에 이르는 움직임에 흥미를 갖고 있다. 작품이 서투른 형태로 표현하는, 누구의 것인지도 알 수 없는 막막한 궤적에 흥미를 갖고 있다. 이 좌절은 나중에 글을 쓰는 사람들이나 읽는 사람들을 매료시키지는 않지만, 이 좌절이야말로 정신의 중심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분명한 표식이 되는 것이며, 아르토의 여러 가지 설명은 이 사건에 관해 놀라운 빛을 던지고 있다.
- 모리스 블랑쇼, <도래할 책>, 심세광 옮김, 그린비(2011), '아르토' 71쪽
블랑쇼는 자크 리비에르가 놓친 것, 즉 그(아르토)가 '자신의 사고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쓸 수 있었던 시와의 사이에서 이상한 상관관계 또한 느끼고 있었다는 것, 정신이 부재하게 되고서야 비로소 만들어지는 작품들 속에 있는 극단적인 것,까지 짚어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시가, 사유하기의 불가능성이라는 사유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이는 드러날 수 없는 진실이다. (...) 이것은 단순히 형이상학적인 곤란함이 아니라 어떤 고뇌가 만드는 황홀이다. 그리고 시는 이 부단한 고뇌이고 "어둠"이며, "영혼의 밤"이고 "절규하기 위한 목소리의 결여"이다.
- 같은 책, 75쪽
밑줄과 메모를 헤집고 '결여의 필연성', '사유하기의 불가능성이라는 사유', '부재와 공허의 지점' 같은 표현들을 찾아낸다. 많은 표현들이 공허와 無를 가리키고 있지만, 무엇보다 새삼 건드리고 가는 표현은 '살아 있는 결여'.
존재는 존재가 아니라 이러한 존재의 결여이다. 삶을 쇠퇴시키고 포착하기 힘든 무참한 금단으로부터 나오는 절규로밖에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으로 만드는 살아 있는 결여인 것이다. (78쪽)
블랑쇼에 의하면, 이때 공허는 '활동하는 공허'이다. 무력은 결코 충분한 무력이 아니고, 불가능은 불가능하지 않다. 이 싸움은 아르토가 추구하려는 싸움이기도 한 것이다.
"아르토는 공허를 거스르고 공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쓰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공허에 몸을 내맡기고 공허를 표출하며, 공허로부터 표현을 이끌어 내려고 쓰고 있다."
- 같은 책, 79쪽
"영감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영감이 결여된 순수한 지점에 있다"라는 말이라니!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블랑쇼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맺고 있다.
"괴로워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일까?"
# 괴로워하는 것은 사유하는 것인가
이 일련의 두서없는 독서 노트의 파편들과 나의 헤맴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정리할 수 없는 정리를 한다.
- 아무것도 아닌 자,가
- 아무런 이유도 발견하지 못하는 순간,에
- 영화와 시와 시간과 침묵과 언어와 무를 생각하다가
- 타르코프스키와 만델슈탐과 첼란과 아르토를 가로질러 블랑쇼의 문장으로 되돌아와서는
-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와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로 수렴되려는 일련의 과정.
그리고 이런 자문 :
나의 결여는 살아 있는가.
(2021-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