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 연습

강지이 시 '궤도 연습 3'에 부쳐

퇴근길 열차 안에서 노을을 얼굴에 담은 사람들을 보았다

모두 같이 빛나는 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집의 불을 밝히려 거의 사라진 노을을 데리고 간다

너무 밝은 것은 함께 갈 수 없다


- 강지이, '궤도 연습 3' 전문, <수평으로 함께 잠겨보려고>, 창비, 2021



노을 빛이 가득한 퇴근길 열차. 노을 빛에 물든 사람들의 얼굴. 노을에 반짝거리는 물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표정. 환하게 타오르던 노을이 서서히 사그라질 때. 강렬한 빛이 주는 순간의 감응.


노을이 사라지고 불 꺼진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집의 불을 밝히려 거의 사라진 노을을 데리고 가"는 사람들,이 중요하다. 그리고. 너무 밝은 것은 함께 갈 수 없다,는 시적 진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사라져가는 빛을 간신히 끌고 어두운 집을 밝히러 돌아가는 마음이 시일 것이다.


시인의 이름이 낯익다. 다른 시편들을 읽다가 '수술'이라는 시를 보고 '강지이'라는 이름을 기억했다.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을 조금만 벗어나면 매우 조용한 공간이 나타난다 먼지가 쌓여있는 침대 불이 들어오지 않는 복도 어떤 단어든 소리 내어 말해도 바람 소리에 묻혀 사라지는

저 침대에 누워 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누워서 누군가를 기다렸던 것 같다

침대에 누워

누군가를 기다리는 과정

옷깃 사이로 바람이 들어오고

안구엔 먼지가 천천히 내려앉는다

아무도 이곳을 알지 못할 것이다

알코올 냄새와 같이

누워 있다


- 강지이, '수술' 전문


당시 시인 L은 이 시를 대놓고 비판했다. "잘못 뽑은 거죠." 2017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당선작으로 선정된 이 시를 두고 그가 한 말이다. 소위 '등단용' 시로는 너무 간결하다 싶긴 했어도, 잘못 뽑았다는 그의 평가엔 고개를 조금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시적 경향이나 취향에 부합하지 않는 시라는 것은 이해했지만.


당시 심사평에 의하면. "구체성과 몽환성, 선명한 이미지와 신비한 여백"이 주요했던 듯하고. "상황에 잘 조율된 언어의 넓은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는 것. 짧은 순간에 시가 들어서는 정밀함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당시엔 별로 주목하지 않고 넘어갔으나.


몇 년이 지나 우연히 이 시인의 첫 시집과 마주친 오늘. '궤도 연습 3'이라는 시가 눈에 띄어 들여다보다가. "짧은 순간에 시가 들어서는 정밀함"이라든가 "언어의 넓은 정적"이라는 말을 새삼 생각해본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무엇으로부터?)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와 최근 출간된 이디스 워튼의 <석류의 씨>를 느슨하게 읽던 참.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두 책의 공통점은 '여성(혹은 여성성)'이라는 코드 아래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징후)'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라는 부분을 공유한다는 것. '이름 붙일 수 없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인간은 불안과 두려움을 느낀다. 위의 두 여성 저자가 이러한 심리적 징후를 '글쓰기'로 연결시켰다는 것도 공통점이라면 공통점.


'이름 붙일 수 없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또 다른 텍스트(들) 앞에서 뒤척이던 내가 딴짓하듯 시선을 던진 텍스트(들)조차 이 두 가지 것에서 자유롭지 않구나. 이 시점에서. 눈에 들어온 강지이의 또 다른 시.


열심히 무엇을 쓰려고 해

아니 굳이 쓰지 않아도 좋다 쓰지 않고 일을 하든 무엇이든 그것은 쓰는 것과 동일할 것이다


그런데 너를 사랑하는데 어떡하지?


나는 사실 시 쓰는 자의식이나 사랑 같은 단어는 어떻게든, 평생 쓰지 않고자 했고


아는 게 많지 않은데 안다고 하지 않으려 했고


내 지나간 모든 어떤 피해 사실은 피해가 아니라고 생각하려 했고


비가 오고 밥을 먹으면 토하고 너무 많은 시간이 있으면서 없다는 것에 너무 쉽게 어떤 것에 스스로를 투영하게 된다는 것에 그래,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에


비장한 무언가를 비웃고만 싶다


- 강지이, '비가 지나가면 알림을' 부분


'이름 붙일 수 없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생각들은 얼핏 흐릿하고 모호한 풍경들로 나를 데려가는 듯싶다가 어느새 무겁고 진지하고 비장한 무언가로 내 손목을 끌어당긴다. "비장한 무언가를 비웃고만 싶"은 심정을 알 것도 같고.


심정을 알아주는 것 같은 시를 읽고 싶은 심정이랄까. 예컨대. 너무 여러 개의 서랍을 열어두고 어떤 서랍에 어떤 것을 넣어야 할지 생각하느라 머리가 복잡해진 자에게 다가온 '서랍' 같은 시.


서랍을 하나 장만했어요

바닥에 내려놓는

희고 네모난 것입니다


무엇을 넣어야 할까


넣으려 다짐한 것들은

들어가지 않아서


요즘엔 그래서


서랍에 저를 넣어두고 다니며

서랍만큼만 생각하고 있어요


(중략)


그런데


어떤 커다란 흰 새는

여전히 창공에서

날고 있고


그럴 때

아주 가끔

서랍에 대하여


다시

대신

무엇을 넣어야만 하는 걸까

하는


- 강지이, '서랍' 부분


그러니까. 서랍에 무엇을 넣어야 할까,를 생각하다가. 문득 나를 넣어두고. 나를 넣어둔 서랍만큼만 생각하기.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격언은 '자기 해석'의 출발점이자 어쩌면 모든 것. 찰스 테일러는 인간을 "자기를 해석하는 동물"로 정의했고. 리쾨르가 지향하는 해석학은 그의 저서 중 하나인 <타자로서 자기 자신>이라는 책 제목이 말해주듯 '타자처럼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타자 이해를 통해 자기 이해에 이르는 우회 철학'으로서의 '자기 해석학'이다.


효과적 자기 해석을 위해. 일단. 서랍은. 하나씩. 장만하는 것으로.

궤도는 심플할수록 좋으니까. 자기 이해를 위한 궤도 연습.


"나를 이해한다는 건 가장 머나먼 우회를 하는 것이다." - 폴 리쾨르


(20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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