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도로 공사

김경후의 시, '야간 도로 공사'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짓밟힐 길을 깔기 위해

오랫동안 짓밟힌 길을 파낸다


이 길에서 나는 몇 글자나 바꾸었나

열대야 두시

이 길에서


팔월의 부글대는 검은 타르와 역청

부글대는 증기와 거품

아무리 많은 글자를 바꿔도

열대야 두시

이 길에서


후진하고 또 후진하는

파내고 또 깔리는

오랫동안 짓밟히고 짓밟힐 자들

오랫동안 짓밟힐 글자들 글자들


이 길엔 이길 수 없어, 아무것도


이 길에선 말이지

바꿀 게 없어, 한 글자도, 이 길에선

언제나 야간 도로 공사 중


눈부신 타워라이트

롤러차가 뜨겁고 무겁게 굴러가고 있다


- 김경후,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 창비(2017), '야간 도로 공사' 전문




동네 보도 블록이 파헤쳐지고 다시 메꾸어진다.

작년에도 그랬고 그 전 해에도 그랬다.

그렇게 계절이 지나간다.


물끄러미 길을 바라본다.

작년에도 그랬고 그 전 해에도 그랬다.

얼마나 많은 글자들이 지나갔나.

나는 몇 글자나 바꾸었나.


벽 같다고 생각한다.

무수히 벗겨지고 새롭게 발리는 벽지들.


헐벗은 빈 벽이 흉한 모습을 드러낼 때조차 벽은 벽지보다 강하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짓밟힌 것은 그러므로 짓밟는 것보다 강한가?


짓밟히고 짓밟는 것은 모두 사라진다. 그러므로 결국 존재보다 시간인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야간 도로 공사의 시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눈부신 타워라이트도 무거운 롤러차도.

무수히 파헤쳐지고 무수히 깔리는 길을 따라 흐르는 시간 외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글자나마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놓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내려놓는 것과 놓아버리는 것은 다르니까.


오늘도 후진한다. 짓밟힐 글자들을 바라보며.


부글대던 팔월도 지나가고 있다.


(2021-8-24)





keyword
작가의 이전글무엇의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