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n 08. 2020

고독한 여인의 초상

천경자 화백에 대한 단상


엄마는 천경자 화백을 좋아했다. 집에 화가의 그림이 걸려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하다 못해 포스터로 인쇄된 그림이 액자에 담겨 있었던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어디선가(잡지 등에서) 오린 듯한 작은 그림 조각들이 자석에 의지하여 냉장고에 매달려 있는 정도였다. 집에는 천경자 화백이 쓴 수필집도 두어 권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그녀의 그림을 처음 보게 된 것도 그 수필집 표지에 실려 있던 그림을 보면서일 것이다. 아마도 <황금의 비>였거나 <사월>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고(孤)>였거나.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올라갈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어린 마음에 여자의 초상이 조금 섬뜩하게 느껴졌다. 


어두운 낯빛, 툭 튀어나온 광대, 도드라진 입술, 짙은 음영이 드리운 눈가, 이글거리는 눈(내겐 그렇게 느껴졌다),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하면서도 (가깝게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내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듯한 시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기이하도록 밝게 감싸고 있는 화사한 빛깔의 꽃들이라니. 이 기묘한 대조가 나를 낯설게 했으리라. 


나는 엄마가 왜 천경자 화백의 그림 속 여인들을 좋아했는지 모른다. 묻지도 않았거니와, 아니 물어야 하는 것인지조차 몰랐던 게다. 아무리 조숙했다지만 나는 그저 어린애였던 것이다.


황금의 비 (1982)



올 여름 8월에 천경자 화백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했다. 편안하게 잠을 자듯 세상을 떠났다,고 전하는 큰딸의 말이 사무친다. 

엄마도 주무시다 돌아가셨다. 그러고 보니 엄마가 세상을 떠난 것도 8월이다. 


나는 거의 30년이 지나고 나서야 천경자 화백의 그림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 보게 되었다. 엄마 덕분에 눈에 익은 여인의 초상들이 하나 둘씩 지나가며 나를 응시한다. 

독특하고 개성이 뚜렷한 화풍,이라는 진부한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폴 고갱의 원시적 생명력이 느껴지기도 하고, 에곤 실레의 헐벗고 쓸쓸한 영혼의 풍경이 펼쳐지는 것 같기도 하며, 그녀가 세계를 돌며 그린 풍경화를 보면 앙리 루소의 이국적이고도 꿈결 같은 이미지가 전해지기도 한다. 또 어찌 보면 빌리 홀리데이의 젊은 시절 모습 같기도 하다. 까만 머리에 커다란 치자꽃을 달고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한 빌리 홀리데이의 사진이 연상되기도 하는 것이다.    


고(孤) (1974)


어찌 되었든 강렬하다. 흐릿하지 않다. 그녀의 작품을 대표하는 여인의 초상을 두고 굳이 하나의 단어로 표현해야 한다면, 나는 ‘고독’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두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면 ‘고독과 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녀는 부나 명예를 원하지 않았다. 최근 읽은 그녀의 말이 또박또박 걸어온다. 


다만 그림을 계속해서 그릴 수 있는 세계로 뚫고 가고 싶었던 것이 나의 참된 꿈이요, 운명이라는 것을 지금 알아차린 것 같다.


내 슬픈 생애의 22페이지 (1977)


‘미인도’ 위작 논란으로 절필까지 선언했던 천경자 화백. 평소 자식처럼 자기 그림을 아끼던 그녀가 ‘자기 그림도 못 알아보는 정신 나간 화가’ 취급을 받았으니 그 정신적 상처와 고통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때로 찬사 일변의 시선을 보내다가도 변덕스럽고 심술궂게 돌아서는 것이 세상의 시선이다. 그러한 세인(世人)의 시선이 꼭 아니더라도 어차피 자기 영혼에 골몰하는 자들의 피로는 유독 남다르고 깊다, 는 생각이 든다.   


엄마의 고독과 꿈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잘 안다고 여겨왔으면서도 문득 자식으로서 이를 헤아린다는 것이 얼마나 요원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너무 가깝기에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 너무 가까이 있기에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우리는 잊고 살아간다. 어렸을 때부터 늘 어딘가에 놓여 있던 천경자 화백의 그림 속 여인들을 나는 잘 보지 못했다. 엄마의 영혼에 대해서도. 


돌아가시고 난 후 평소 엄마가 보던 어느 책 사이에 끼워져 있던 엘리어트의 시 ‘황무지’를 발견하고 나는 목 놓아 울었었다. 엄마가 아픈 몸을 일으켜 필사해놓은 둥글둥글한 글씨체가 톱날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4월은 잔인한 달, 그러나 엄마는 천경자 화백의 <사월>의 꽃도 좋아하지 않았던가. 생전 그토록 좋아했던 하얗고 푸른 꽃들을.  


사월(四月)



타인의 고독과 꿈을 헤아린다는 것은 얼마나 쓸쓸한 일인가. 게다가 평소 너무나 가까이 있어 보이지 않았던 사람의 것이라면 더더욱. 


(2015-11-13) 


 

매거진의 이전글 멍 때리는 계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