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 때리기의 효용성에 대하여
멍 때리기 좋은 계절이다, 라고 쓰려다 보니 여기는 가을이 아니다. 아니 가을은 가을이되 전형적인 한국의 가을이 아니다. 그러니 이 말도 적절치 않다. 사실 멍 때리기는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사람을 가릴 뿐.
멍 때리기,라는 표현을 써본 것은 근래의 일이다. 남편 덕(?)이다. 주말이나 이른 아침 혹은 밤 시간에 그는 베란다에 나가서 무작정 아무 생각 없이(없는 것처럼) 강과 하늘과 나무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때로는 무심하게 때로는 뚫어지게.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는 사색이라는 말을 거부한다. 그건 단지 ‘멍 때리기’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밑도 끝도 없고, 어떤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되는 대로 자기 의식을 흐르는 강물처럼 내버려 둔다는 것이다.
멍 때리다. 왠지 사람이 좀 열없게 느껴진다. 열없는 색시 달밤에 삿갓 쓴다,라는 재미있는 속담도 있다.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뜬금없는 짓을 하는 경우를 이르는 말이다. 부정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이게 꼭 그렇게만 볼 게 아니다. (좋게 말하면) 일종의 몰아상태로 설명될 수도 있겠다. 그 몰아상태, 즉 평소의 자기 상태가 아닌 상황에서 - 즉 이성으로 반듯하게 매무새를 갖추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뭔가 색다른 것을 퍼 올릴 수도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나만의 열없는 생각일지도.)
촘촘하니 빠져나갈 구멍 없는 그물코 안에서 평소와 다른 그 ‘무엇’을 내보낼 방도는 없다. 어느 때는 덩치가 제법 크게 걸리적거리는 이물감을 자기 안에서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이게 도무지 평소의 쫀쫀하게 짜인 그물코 사이로는 나올 생각을 안 한다. 제 몸피를 쪼개기 싫다 이거지. 그렇다면 의식적으로 몸은 말한다. 그물코를 좀 느슨하게 벌려야 하지 않을까. 그 이물감이 뭔지는 확인해봐야 하잖아. 잘게 쪼개져 있는 것 말고, 덩어리로 한번 확인해보자구.
그래서 사람은(모든 사람이 아니고 이러한 특이한 열망을 가진 열없는 사람에 한해서) 술을 마시는 건가. 자기 방어 기제를 느슨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정당화의 일환으로 나는 대학교 시절 술을 마시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게 꼭 내 잘못만은 아니다. 대학교 때 타 대학 심리학 교수가 주관하는 대학생 연합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쉽게 말하면 젊은 마루타, 임상실험대상이었다. 소위 프로이트의 자유연상기법이 우리들에게 실험(?)되었는데 이게 나에게는 도통 먹혀 들지가 않았다. 교수님은 나의 자아 방어 기제가 너무 단단해서일 것이라고 했다. 알코올의 힘을 빌려 실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했다. (옳지 않다). 그러고 보니 예전 어느 한 후배는 내게 “누나는 자의식이 너무 강해”라고 투덜거렸다. (자기가 뭔데 내 자의식에 불만인가!)
뭐 꼭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겠지만 어찌 되었든 술이라는 묘약이 내 안의 그물코를 성기게 만들고 그리하여 그 안에서 빠져 나오는 내 것 같지 않은 내 것을 (마치 제3자인 양) 투쟁하듯 살펴보는 재미도 꽤 쏠쏠했다.
그 와중에도 이성의 끈을 단단히 잡으려 했던 것은 비단 타인의 시선 때문만은 아니었다. 성겨진 그러니까 열없는 상태에 빠진 내 안의 이물질들을 확인하려면 (실험 대상도 나요 관찰자도 나이니) 어떻게든 적어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꿈 일기'와도 비슷하여 의식과 무의식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요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내 무의식을 넋 놓고 쫓아가더라도 끈 떨어진 연처럼 지켜보고만 있어서는 안 되고 어떻게든 의식의 양식을 빌려 같잖은 꼴이라도 갖춘 형상으로 눌러 앉혀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 무슨 말을 하려다 여기까지 왔지......? (이것이 멍 때리기의 한계이다.)
아, 멍 때리기의 효용성이다. 그러니까 멍 때리기는 아무 생각 없는 듯하면서도 의외로 자기 내부로 시선을 돌려 무언가 이색적인 것 하나쯤을 찾아내기도 한다는, 뭐 그런 '유용함(?)'을 이야기하려 했던 모양이다. 아무 생각 없이 바닷가를 거닐다가 우연히 작고 반짝이는 조가비 하나를 주워 올리는 격이랄까.
그러니 가끔 (할 일을 미뤄두고)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아이에게 잔소리하는 내가 마뜩잖은 것도 나 또한 어렸을 때 그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습관은 꽤 커서까지 이어졌는데, 그런 점에서 학교 가는 좌석 버스 안은 멍 때리기에 최고의 장소였다. 일반 버스보다 요금이 비싸다는 게 흠이었지만. 바글대는 사람들 사이에 끼여 육체적으로 멍해지는(무감각해지는) 것보다는 훨씬 쾌적한 단절의 상태에서 몽상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기에 기꺼이 감수할 만한 흠이었다.
청계천 고가를 건너 광화문을 통과하는 코스는 제법 훌륭했다. 지금이야 없어졌지만 당시 청계천 고가 양 옆으로 펼쳐진 흉물스러운 옛 건물들은 도시의 쇠락과 비루한 풍경을 온 몸으로 보여주었고, 광화문을 통과할 즈음엔 활기차고 세련된 도시의 풍경이 대조적으로 펼쳐졌다. 돌아오는 길에 마주하는 오래 된 상가와 주택가 골목의 풍경도 빼놓을 수 없었다. 고백컨대 나는 가끔 학교 수업을 빼먹고 이 순환버스(광화문을 종점으로 다시 서울 동쪽으로 돌아오는)의 '순환'에 몸을 맡긴 적도 있었다. 멍 때리면서 말이다.
그때야 '멍 때린다'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던 것 같다. 좀더 고상(?)한 표현으로 바꾸자면 '몽상' 혹은 '공상' 정도 될까. 음......아니다. 멍 때리기,라는 어감 자체가 주는 무목적성(몽상이나 공상도 딱히 목적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을 대체하기에는 모자람이 있다. 그저, 시간을 잊고 생각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기, 정도가 그나마 좀 친절한 설명이 되려나. (자기 검열 없이) 내버려 두면 의외로 쓸 만한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차마 이것을 '사색'이라고는 못하겠다. 왜냐하면 개중 9할이 엉뚱하고 하잘것없으며 사소하고 싱거운 생각들인데 어쩌다 얻어 걸린 1할의 생각을 '사색과 명상'이라는 이름으로 멋지게 포장할 재간이 나에겐 없다.
멍 때리기는 멍 때리기이다. 점심 시간에 잠시 멍 때리다가 이 멍 때리기에 대한 생각을 떠올린 것도 그냥 얻어 걸린 것뿐이니까.
그러고 보니 작년 이맘때(10월) 서울 광장에서 제1회 멍 때리기 대회도 열리지 않았던가. 하도 재미 있어 남편에게 알려주었더니 여봐란듯이 우쭐해 했다. 자신의 ‘멍 때리기’ 철학을 이제야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듯이.
멍 때리기의 계절은 사시사철이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들어갈 수 있다. 사람이 가끔은 넋 놓고 지내기도 해야 인간적이지 않겠는가. 이성의 동물이라는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에밀 아자르(그러니까 로맹 가리)는 <자기 앞의 생>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맺었다.
"사랑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이렇게 맺고자 한다.
"멍때려야 한다."
삶이 가끔 시답잖다 느껴질 때 혹은 꼭 죄는 그물처럼 답답하다 여겨질 때에는 특히 더.
2015-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