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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n 28. 2022

적정 온도에 관하여

서로의 온도를 안다는 것 

- 내가 차가워?

- 아니.

- 그럼 뜨겁나?

- 아니.

- 그럼 미지근하단 얘기?

- 아니.

- 그럼?

- 적절해.



# 나의 온도


누군가는 나를 차갑다 했고 누군가는 나를 따뜻하다고 했다. 언젠가는 스스로를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언젠가는 차가운 사람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언 손을 녹이듯 무언가 따뜻하게 마음을 덥혀 다정해지는 자신을 경험하기도 했다가, 차르륵 얼음이 채워지는 듯 차가워지는 마음을 인식할 때도 있었다. 차갑거나 뜨겁거나 혹은 미지근하거나.


그의 말처럼, 나는 적절한 온도의 인간인가? 적절하다는 것은 좋은 말로 적정 온도.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어정쩡한, 미지근한, 미온적인 상태. 몸의 온도에 관해 말하는 것이라면, 나는 체질적으로 차가운 사람이고. 명리학적으로 말하자면, 물(水)과 쇠(金)의 기운이 강한 사람. 봄과 여름보다는 가을과 겨울에 가까운 사람.


# 부모의 온도


어머니 A와 아버지 B는 불과 물의 관계. 사주를 보러 가면 영락없이 이렇게 말하더라는 A의 말을 당신 생전에 자주 듣곤 했다. 서로 상극이라며 푸념하는 소리. 명리학적으로 그 말들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지금. B는 자신을 상징하는 일간이 물, 차갑고 습한 일주를 지녔다. A는 일지와 월지에 불을 깔고 있는 데다가 전반적으로 뜨겁고 건조한 사주. B는 늘 춥다고 했던 것 같고, A는 늘 덥다고 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현재 많이 춥다. 워낙 춥다는 말을 달고 사는 양반이지만. 몸이 정상이 아닌 만큼. 춥다,는 말의 빈도수도 배로 늘었다. 저체온증을 주의해야 하는  환자에게 온도와 습도 조절은 특히 중요하다. 문제는 여름 장마철에 에어컨을 가동하기 어렵다는 . 함께 사는 동생에겐 극기 훈련과 다름없는 .


아버지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동생과 함께 지내는 시간도 늘어났다. 아주 춥거나 아주 덥지 않은 이상, 나는 춥다,라는 말을 연발하고, 동생은 더워 죽겠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나는 아버지 B 일간과 동일하고, 동생은 어머니 A 사주 구조와 놀랍도록 유사하다(일주와 월지가 동일하다). 아버지는 동생이 엄마의 성정을 그대로 닮았다고 하고(발산의 성질). 나는 (한때는 거부했으나) 아버지의 성향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는 것을 점차 인정하게 되었다(수렴의 성질).


# 온도를 안다는 것


문득 이런 생각. 아버지는 차가운 사람인가 뜨거운 사람인가. 어렸을 적엔, 아버지가 냉정하고 건조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커가면서, 뜨거운 기운을 숨기고 사는 사람이구나 생각하기도 했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는 알게 모르게 평생을 지배한다. 악한 사람 선한 사람을 구별할 수 없는 것처럼, 차가운 사람 뜨거운 사람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우리는 대체로 악하고 간헐적으로 선할 수도 있고. 대체로 선하고 간헐적으로 악할 수도 있다. 간헐적으로 뜨거워지거나 간헐적으로 차가워지거나. 차갑게 태어났으나 뜨거운 것에 둘러싸여 자기 본연의 성질을 잃었을 수도 있고. 뜨겁게 태어났으나 차가운 것에 둘러싸여 자기 본연의 성질을 발휘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버지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적도 없지만, 아버지를 도통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힘든 시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순간에도 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을 씨앗처럼 품고 있었다는 것. 잘 안다고 생각했던 순간들 또한 내가 모르는 심층의 구조가 표면적으로 반영된 일시적 효과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다만. 소소하게 궁금한 것들은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여 적절한 때에 질문과 응답으로 발현되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혹은 ‘나중에 말해줄게’와 같은 지난 말들을 소환하여 되묻고 이야기를 듣는 타이밍이 지금이어야 한다는 감각만큼은 분명해졌다는 것.


# 대화 - 나중은 없다 


그러니, 대화.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필요하다. 궁금한 것을 묻고 그때의 상황과 사실과 입장과 마음을 들어보는 . 노희경 작가의 최근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도 말하고자 했던 . 어릴  어머니( 결정에 따른 암울한 청소년기)로부터 받은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인물인 동석(이병헌 ) 말기 암으로 죽어가는 어머니 옥동(김혜자 ) 마지막 여행길에 오르면서 오랜 세월 묻지 못했던 것들을 따져 묻기로 결심한다. 그때  그랬냐고. 그때 어떤 마음이었냐고. 동석이 좋아하는 여자 선아(신민아 ) 영향이 크다. 아버지의 자살,이라는 어릴  트라우마에 묶여 있는 선아는 (고인에게) 묻고 싶어도 물을  없는 자신의 상태에 비해, 마음속 응어리진 질문을 시원히 따져 물을  있는 기회가 남아 있는 동석의 상태가 낫다는 점 넌지시 알려준다.


물론.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말기 암 환자에게 과거 특정 시기의 아픈 점들을 상기시키고 당시의 상황을 해명해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다. 포인트는 이런 것일 테다. 물을 수 있을 때 물을 것. 말할 수 있을 때 말할 것. 나중은 없으니.


# 적정 온도를 찾아서 


주말에 아버지 집에 건너가 다시 일주일을 지내다 올 예정이다. 응급실에서, 수술 후 병실에서, 입원실에서, 그리고 퇴원 후 집에서, 지난 두세 달간 나는 많은 것을 물었고 많은 것을 들었던 것 같다. 충분한가? 충분할지도. 어쩌면 이번엔 이런 질문을 할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뜨거운 사람인지 차가운 사람인지. 이런 우문에 아버지 역시 이렇게 답할 확률이 높다. 차가운 것도 싫고 뜨거운 것도 싫어. 적절한 게 좋지.


나는 어떤가? 열광에 열광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열광하던 마음이 적절히 식어 미지근하게 남아 있는 지금의 상태가 만족스러운 것도 아니다. 하지만 또 이런 생각. 뜨겁거나 차갑거나 양단을 원했던(적지근한 것이 싫었던) 내가 결국 수렴된 적정 온도는 미지근한 상태인지도. 우린 모두 각자의 적정 온도를 찾아 끝없이 열기와 습도를 조절하는 과정에 있는 건지도.


동생은 아버지와 합의점을 찾은 듯하다. 적정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선에서 에어컨을 간헐적으로 가동하는 것으로. 주말에 아버지 집으로 건너가 다시 한 방 한 침대를 써야 하는 우리 자매도 어떻게든 각자의 적정 온도를 찾게 될 것이다. 서로의 적정 온도를 크게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우리는 적정 온도가 필요하다. 자신에게도, 서로에게도.


(202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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