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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l 01. 2022

혼밥 & 함밥

혼자, 함께, 홀로

# 혼밥은 외로워

아버지 집에서 2주간 지내다 돌아온 후. 일주일에 적어도 2-3일은 혼자서 저녁을 챙겨먹었을 아들. 하교 후 바로 학원을 가야 하는 어느 저녁. 무엇이 먹고 싶냐고 물었다.


- 집밥.


아버지 집에서 하루 세 끼를 건강식으로 챙기다 보니 집밥보다는 외식, 한식보다는 한식 이외의 것이 당길 수밖에 없는 터라, 아이 밥만 차려주고 빈이 오면 그때 저녁을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 역시 집밥이야,라고 말하며 후르륵 맛있게 먹던 아들이 문득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 엄마는? 같이 안 먹어요?

- 넌 바쁘니까 먼저 먹어. 난 나중에 아빠랑 먹을게.

- 그러지 말고 같이 먹지......? (그렇게 세 번을 권함)

- 왜 오늘따라?


다른 때보다 유난히 같이 먹자고 조르는 게 낯설었지만. 다음과 같은 아들의 한마디에 나는 곧바로 수저를 챙겨들고 식탁에 앉았다.

 

- 혼자 먹으면 외로워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외롭다니. 혼자 있는 시간을 누구보다 즐기는 녀석인데.


- 핸드폰 그만 보라고 잔소리하는 엄마도 없고, 그동안 자유롭고 좋았을 텐데?

- (부인하지는 않는 웃음) 그래도 먹을 땐 혼자가 외로워......


그렇게 (혼자 먹는 밥이 외롭다는) 아들과 마주앉아 소박한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나는 어떤가? 혼자 밥을 먹으며 외롭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던가?


# 혼밥 혹은 함밥

'혼밥'이라는 말이 일반화되기도 한참 전. 난 혼자 밥을 먹는 경우가 많았고, 또 싫지 않았다. 싫기는커녕 자유롭고 편한 때가 더 많았다. 학생 시절에도, 직장 생활 중에도, 해외에 거주하거나 체류할 때도. 난 혼자 밥 먹는 게 싫어,라거나 난 혼자서는 밥을 안(못) 먹어요,라고 말하는 이들을 만나면 놀랍고 신기했다. 호치민에서, 타이페이에서, 퀘벡이나 몬트리올에서, 혹은 워싱턴이나 뉴욕에서 혼자 맛있게 먹었던 식사들을 떠올려본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여러 가지 메뉴를 시킬 수 없다는 것. 훌륭한 맛을 함께 만끽하고 공유할 대상이 없다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혼자 먹으면 맛이 없어. 같이 먹으면 더 맛있는 것 같아. 아버지가 늘 하던 말.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전국 각지를 혼자 여행했던 아버지에게, 낮과 밤이 뒤바뀐 동생의 생활 패턴으로 집에서도 혼자 식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아버지에게, 혼밥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암 진단을 받은 후 두 딸이 번갈아가며 끼니를 챙겨드리는 지금의 상황도 '어쩔 수 없는 것'이긴 마찬가지이지만.


나날이 입맛을 잃어가는 아버지의 세 끼 식단을 위해 나와 동생은 이런저런 고민과 시도를 거듭하고 있다. 암 환자들에게 처방해주는 식욕촉진제는 최후의 카드. 아직까지 적은 양이나마 식사를 하는 모습에 안도감을 느끼지만. 같이 먹어야 더 맛있다,는 그의 지론이 정작 같이 먹는 순간에 제대로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아이러니.


그래도 '함께 먹는 밥'이기에 덜 외로울까.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아무래도 아버지용 음식과 나/동생용 음식이 구분될 수밖에 없기 때문. (건강식단에 질린 동생은 심지어 본인이 좋아하는 생선을 먹고 체하기까지 했다). 보면 먹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해. 아버지는 우리가 가끔 먹는 음식(자극적인, 단짠단짠 분식이나 면류)의 시각적 효과에 동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냄새를 맡자마자 혹은 한입 맛을 보자마자 물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혼밥(혼자 먹는 밥)을 맛있게 먹는 것도 좋지만, 함밥('함께 먹는 밥'을 이렇게 불러보기로 한다)을 맛있게 먹는 것은 더한 축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식구

식구는 '같이 밥 먹는 입'을 뜻하는 거잖아. 빈이 자주 하는 말. 그렇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식구(食口)란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이다. 함께 밥 먹는 것의 중요성. 함께 밥 먹는 사람의 중요성. 한 집에 함께 살지는 않지만 두 집을 오가며 끼니를 같이하는 것. 요즘 내가 하는 일이다. 아침 저녁으로 불을 피워 차린 식사가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집에서 아버지 끼니만 따로 챙기고 바깥에서 우리끼리 먹는 경우도 있었다. 기력이 쇠한 아버지와 식당으로 이동하는 것이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대부분의 식당 밥이 그에게 마땅치 않았으므로. 번잡한 식당 테이블을 피해 음식만 포장 주문해서 집으로 가져와 함께 먹는 경우도 있었다. 코로나 이후 사람들로 북적이는 장소는 가급적 피해온 아버지였기에 집에서 편안한 식사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온 식구가 같이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그가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빈과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건너온 어느 일요일이었다. 너희들 먹는 것, 사람들 먹는 것도 구경하고 싶어.


그간, 함께 먹어도 혼자 먹는 것 같은 기분이었을까? 그런 느낌은 서글픔 혹은 외로움에 가까운 성질의 것일 수도. 혼자 먹어도 외롭고 함께 먹어도 외롭다면. 함께 먹는 것이 나을 수도. 이왕이면 여러 명이서. 사람들로 시끌벅적한 곳에서. 꼭 식구가 아니더라도 낯선 이들과 섞여 ‘함께 먹는 행위’에 동참한다는 위안 혹은 활력 같은 것일 수도 있겠지. 아버지는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이 싫었는지도 모른다. 환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고립된 장소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는 것 같은 기분. 날 환자 취급하지 마,라거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할게,라는 식의 힘 없는 말들은 의미심장한 것이었구나. ‘식구’라는 말에서 ‘먹다’ 혹은 ‘끼니’에 방점을 찍을 게 아니라 ‘함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구나. 뭐 이런 생각.


# 혼자, 함께, 다시 홀로

그런 생각을 해본  있다. '혼자'라는 말은 외롭지만 '홀로'라는 말은 고독하다고. 혼자,라는 말은 어딘지 모르게 수동적이지만, 홀로,라는 말은 왠지 모르게 능동적으로 다가온다. '홀로'라는 말이 풍기는 '자발적 고독' 뉘앙스 때문일까. 80년대 고딩들의 책받침을 장식했던 서정윤의 시가 '혼자서기' 아닌 '홀로서기'였다는 , 페소아의 시집 제목을 '시는 내가 혼자 있는 방식' 아닌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으로 번역한 것도  같은 맥락이겠지.


그래서 또 이런 생각. 아버지는 지금 '혼자'가 아닌 '함께'가 필요하고. '홀로' 견디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나 또한 ‘함께' 속에서 '홀로'의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이 필요하고.


혼자 먹는 밥은 외롭지만 홀로 먹는 밥은 외롭지 않다. 함께 속의 혼자는 외로울 수 있지만 함께 속의 홀로는 고독할 뿐이다.


삶이란. 혼자 태어나서 함께 살다가 홀로 죽는 것,인지도 모른다.


(202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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