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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l 04. 2022

안락사에 관하여

웰빙과 웰다잉의 경계에서

아버지가 안락사에 대해 알아보았다고 했을 때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랬군요, 정도의 반응. 아버지라면 그럴 수 있지. 어딘지 달관한 듯한 평소 그의 생각이나 말들을 생각해보면. 생전에 엄마는 아버지에 대해서 ‘절간에 들어가 면벽 수도를 하면 딱 어울릴 사람’으로 묘사하곤 했다.


- 그래서……알아보신 결과는요?

- 안락사는 스위스나 네덜란드 같은 나라에서만 가능하대.

- 맞아요.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점차 공론화되는 분위기예요.


(아닌 게 아니라. 최근 한 신문사는 1면의 상당 부분을 할애한 것도 모자라 무려 4면을 더 할애해 웰다잉과 안락사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기도 했다. 출처: 2022년 6월 18일자 중앙선데이.)


안락사에 대해 알아보았다는 아버지의 말에 화들짝 놀라기는커녕, 그랬구나, 정도의 덤덤한 반응으로 일관한 나의 태도는? 나라면 그럴 수 있지. 평소 존엄사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은 입장이었으니까.


‘안락사’라는 말이든 ‘존엄사’라는 말이든 혹은 ‘조력 존엄사’라는 말이든. ‘최빈도 죽음’(최근 어느 기사에서 읽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거쳐가는 죽음의 양상, 다시 말해, 요양병원, 응급실, 중환자실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을 의미한다)과는 대척점에 있는 말이다. 어쨌든 특정한 상황(회복이나 치료가 불가능한 병으로 죽어가는)에서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고자 하는 이들을 의학적으로 돕는 행위는 ‘윤리’의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몇 년 전, 배우 지성이 의사로 나오는 의학 드라마 <의사 요한>을 챙겨 보곤 했는데, 드라마 자체의 완성도보다는 ‘안락사’라는 (사회적으로 조심스럽고 예민한) 문제를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안락+사, 라는 말이라니. 안락한 죽음,이 가능한가? 안락하게 죽는 것은 모든 인간의 바람일 터. 안락사, 라는 단어는 ‘안락하게 죽는다’라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표상하는 말처럼 들린다. 적어도 덜 고통스럽게 죽는 것. 최대한 고통을 완화하는 죽음의 방식.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이런 문제는 자살의 방법과도 연결된다. 한 방에 깨끗하게 죽을 수 있는 권총 자살(그러나 폭력적이다), 혹은 백합을 가득 채운 방에서 잠이 드는 낭만적 자살(그러나 섬뜩하다). 목을 매거나 손목을 긋거나 가스로 질식사하는 것은 신문기사나 소설, 영화를 통해 흔히 접하는 방식이지만 고통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안락한 죽음과는 거리가 멀다.


자면서 죽고 싶어. 엄마가 생의 끝자락에서 자주 하던 말. 자면서 죽게 해 주세요, 하나님 아버지. 엄마의 기도는 이루어졌고, 어느 새벽 나는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흐느낌 속에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엄마가…엄마가…”가 전부였다.


엄마의 죽음이 미친 영향일까, 평소 아버지 자신의 생각이었을까.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는 수면제를 차곡차곡 모았다고 한다. 한 알 두 알씩. 언젠가 불가피한 때(?)가 오면 모아둔 수면제를 한꺼번에 털어 넣고 세상을 깔끔하게 하직하겠다는 (나이브한?) 생각을 그가 할 때도 있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고. 시간이 한참 지난 뒤, 그렇게 모아둔 수면제가 어느 날 퍼뜩 생각났을 때, 문제의 수면제를 어디에 보관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더라는 것. “어디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이런 이야기엔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블랙 코미디.


아버지의 증상에 관한 한 나를 가장 근심하게 만들었던 것은 통증 문제. 다행히 아직 본격화되고 있지 않지만. 병원에서 처방해준 2단계 진통제를 어제부로 여섯 번째 복용했다는 사실은, 그간 마음을 비우고 오는 것을 오는 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나의 결심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킨다. 절대로 참지 마세요. 참지 말고 드세요. 아버지의 남은 나날을 그나마 안락하게(존엄하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들 중의 하나란 고작 이런 것이었다.


몇 년 전, 시어머니가 갑작스레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두 달 만에 돌아가셨을 때. 마지막 순간까지 쾌적하고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도록 도와준 것은 호스피스 의료진과 스태프들의 전문적이고 따뜻한 태도 그리고 적절한 진통 케어의 힘이 컸다. 물론. 말기 암 환자를 위해 고려해야 할 가장 큰 요소는 두 가지라는 점도 배웠고. 하나는 통증 케어, 다른 하나는 가족과 함께하기. 남은 삶의 질을 위해서 통증 케어는 필수이고, 가족들로부터 분리되었다는 혹은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심리적으로/정서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


웰빙(Well-Being)보다 웰다잉(Well-Dying)이 화두인 시대. 죽음은 추상적이지만 죽어가는 것은 구체적이다. 그러고 보니 정확히 3년 전 여름, 나는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완화병동에서, 그리고 호스피스 임종실에서 ‘죽어가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타자의 ‘죽어감‘ 혹은 ‘죽음’을 목격한다는 것은 많은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당시 나는 블랑쇼를 읽고 있었고(물론, 정신없이 집과 병원을 오가느라 곧 중단되었지만), ‘죽음’이라는 명사형이 아닌 ‘죽어가다’라는 동사형에 사로잡혀 있었다. ‘죽음’이라는 명사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이지만, ‘죽어가다’라는 동사형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이다.


안락하게 죽는 것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폭넓은 의미에서, 존엄하게 생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가능할지 모른다. 존엄하게 죽어간다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갈 수 있는 한) 가고 싶은 곳을 가고. 고요한 것을 원하면 고요하게, 시끌벅적한 것을 원하면 시끌벅적하게. 가급적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것을 하는 것. 생각해보면, 산다는 게 이것이 전부 아닌가. 버킷 리스트,와 같은 거창한 표현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소박하다(나는 이미 이것에 관해 물은 바 있다). 우리(두 딸과 사위와 손자)와, 집에서, 혹은 집 근처 공원이나 산책로에서, 혹은 탁 트인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함께 보고 함께 있는 것.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침묵 속에서 함께 있기.


웰빙과 웰다잉은 구분은   있을지언정 구별할 수는 없는  개의  아닐까? ‘ 살기혹은 ‘ 죽기라는 너무 노골적인가? 아니. ’ 죽어가는 만큼 ‘ 사는  없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태어난 이후 조금씩 죽음을 향해 (죽어) 가는 과정에 있으니.


그러 나는 ‘ 살고싶은 만큼 ‘ 죽고싶은 것이고.

나뿐 아니라 타자들도 그러하기를 바라는 것이고.


(202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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