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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Sep 13. 2022

검은 테이블 위의 정물

시와 손톱 그리고 영혼

아버지가 호스피스에 입원한 후 병실에서 24시간 상주한 지 일주일이 되어간다. 격일로 동생과 교대할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 밤새 쪽잠을 자고 동생과 교대한 후 돌아온 아버지 집은 일종의 베이스캠프가 되어가는 중이다. 씻고 먹고 자기 위한 임시 막사와 같은.


아버지가 없는 집. 거실 창가 옆 아버지의 책상을 잠시 바라본다. 나와 동생의 어릴 적 모습이 담긴 크고 작은 사진 액자들. 컴퓨터 스크린과 자판. 통증을 잊고 어딘가에 집중하고자 읽기 시작한 시집 한 권. 펼쳐진 시집 옆으로 가지런히 놓인 손톱깎이. 손톱깎이 밑에 놓인 단정하게 접힌 휴지.


검은 테이블 위의 사물들. 아버지를 상기시키는 정물로 남게 될 것이다.


# 검은 테이블 위의 자두


문득. 15년 전 기억으로 되돌아간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집에 도착했을 때. 거실 식탁 위엔 자두 몇 알이 놓여 있었다. 슬픔으로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도 불구하고. 검은 식탁 위에 놓인 빨간 자두의 이미지가 아직도 선연히 남아 있는 것은 왜일까. 자두는 엄마가 좋아하던 과일. 해외에 있을 때 잠시 한국에 들러 찾은 엄마 산소 앞에서 통곡을 하다시피 울었던 적이 있다. 그때 올렸던 과일도 자두. 엄마를 생각하며 울었는지, 엄마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며 울었는지, 당시 (견디기 힘들었던) 나의 상황을 호소하며 울었는지, 알 수 없지만. 와르르. 버텨온 시간들이 일시에 무너지며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렇게 자두는 막막하고 먹먹한 순간을 환기시키는 과일이 되었고. 그 연원일지도 모를 ‘검은 테이블 위의 자두’는 세잔의 ‘사과 정물’만큼이나 중요한 모티프로 내게 남았는지도. 그 모티프를 받쳐주었던 검은 테이블은 이후 아버지의 책상으로 변신했고. 15년이 지난 오늘. 그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인 사물들은 이제 아버지를 상기시키는 정물로 남게 되겠지.


# 조상을 굶긴다는 것에 관하여


기일이 돌아올 때마다 엄마의 제사상에 자두를 올리면 어떨까 생각하곤 했다. 전통의례 따위는 잊고. 올해엔 간소하게 제사상을 차리고 평소 엄마가 좋아하던 음식을 올리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일은 엄마의 기일. 올해엔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 집안에 아픈 이가 있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오래된 통설. 아버지가 호스피스에 입원하기 몇 주 전. 나는 이 부분에 대해 아버지의 의견을 물었다. 아버지다운 답변. 예로부터 그런 말이 있긴 했지. 지내도 되고 안 지내도 되고. 너희들 마음 가는 대로 해.


언젠가 빈은 이렇게 말해준 적이 있다. 집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조상을 굶긴다고 하잖아. 산 사람을 잘 보살피지 못했다는 거지. 이제 와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오는 대목이다. 일단 두 가지 측면에서.


1) 조상=신? - 기도와 원망 사이에서

첫째, 조상의 정의는 어디까지인가? 돌아가신 나의 직계존속 및 방계혈족(들)은 모두 조상인가. 사전적 정의에 따라 ‘돌아간 어버이 위로 대대의 어른’을 조상으로 간주한다면 엄마도 조상에 해당하는 것인데. 조상을 기린다는 것은 어디까지 기억한다는 것인가. 15대? 20대? 끝도 없이 위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인류의 기원과 맞닿게 되는 것이 아닌가? 다시 또 끝도 없이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철학자와 과학자가 천착해온 기원의 문제, 즉 우주와 생명에 관한 궁극적 질문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다른 것을 존재케 하며 스스로 존재하는 것. 그렇다면 그건 ‘신’의 개념이잖아. 그럼 나의 조상은 결국 신으로 연결되는가? 조상과 기원을 생각하는 한 인간은 종교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군. 집에 우환이 생기면 그건 조상을 굶겨야 할 일이 되는 것이고? 불행이 닥쳤을 때 신에게 공물을 바치며 비는 행위와, 신(조상)을 굶겨가며 각성을 요구하는 행위 사이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인간은 기도와 원망 사이에서 흔들리는 존재인지도.


2) 망자의 의무?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둘째, 죽은 자(귀신)는 산 자를 보살필 의무가 있는가. 그 대가로 제삿밥을 얻어먹는 건가. 영생을 희구하기 위해 신을 믿는 것이 도구적(목적적) 신앙인 것처럼, 산 자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고 망자를 탓하는 것이 ‘조상을 굶긴다’라는 (이 다소 심술궂은) 말의 본의라면. 신이나 귀신이나 참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인간적인 책무를 짊어지고 있는 신(귀신)이라면 다소 억울할 법도 하지 않은가. 왜 신(귀신)은 인간의 소망을 들어주어야 하는가. 천지만물 중 왜 유독 인간의 소망을? 소망(=욕망)할 줄 아는 피조물이 인간뿐이어서? 소망을 들어주는 신,이라는 환상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 손톱과 느릅나무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나는 아버지가 읽다 만 시집과, 시집 옆에 놓인 손톱깎이, 그리고 그 밑에 가지런히 접혀 있는 휴지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인데. 저 휴지 속에 무엇이 있을지 나는 안다. 아버지가 깎고 모아둔 손톱이 들어 있을 테지.


말기암 진단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버지는 우리를 이끌고 평소 자주 산책하던 호수 공원으로 데려갔다. 아니. 우리가 아버지를 차와 휠체어에 태우고 호수 공원으로 모셔갔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호수의 일부를 돌며 아버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천천히 산책을 하던 도중. 그가 어느 지점에서 멈추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벌떡 휠체어에서 일어나 어딘가를 향해 휘청거리며 걸어갔다. 정자를 사이에 두고 대칭으로 서 있는 느릅나무 두 그루를 가리키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 내 무덤이야.

- 뭐라고요?

- 내 무덤이라고.

- 그게 왜 아빠 무덤이에요?

- 내가 죽고 나서 쉬고 싶을 때 여기로 내려올 거야. 내 손톱 발톱 깎은 것 여기에 묻어두었거든.

- 일종의 표식처럼?

- 그렇지. 산책하다 내가 보고 싶으면 이 느릅나무 있는 곳으로 와.


# 손톱과 영혼  


이후, 손톱과 영혼의 문제에 관하여 아버지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은 6월 초순.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 여기 내 책상 위에 놔둔, 휴지 접어놓은 거 네가 치웠니?

- 네, 버렸는데요.


아버지의 책상을 청소하며 내가 무의식적으로 버린 듯한 휴지조각. 아버지가 깎고 모아놓은 손톱이 그 안에 들어 있었던 것. 얼마 전 그가 느릅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당신이 세상을 떠난 후 손톱이 묻힌 곳으로 찾아와 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깎은 손톱을 바깥에 묻는 것은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이후에 생겨난 습관이라고 나는 생각했으나. 아버지의 신체 일부에 귀속되었던 물질(손톱 및 발톱)을 땅 속에 묻음으로써 모종의 의미를 부여하려는 생각은 훨씬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 아니, 그럼, 지금까지, 아니, 아프기 이전부터, 계속, 죽, 그렇게, 손톱을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았단 말씀이에요?

- 응, 그렇지.

- 단 한 번도?

- 단 한 번도.


처음 듣는 소리다. 처음 알게 된 이야기. 나는 졸지에 삶의 막바지에 이른 아버지의 손톱을 쓰레기통에 버린 당사자가 되어버렸다. 평소 미신을 믿지 않던 아버지는 어디로 갔는가?


- 가만 보면,  은근히 의외인 면이 있어요. 미신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인데.

- 이건 미신이 아니야. 그렇다고 애니미즘도 아니지. 그냥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더 강해.

- 땅에 묻히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 그렇지.

- 쓰레기통에 버린 손톱들도 결국 땅에 묻혀요.

- 다른 쓰레기들과 함께 묻히는 것과, 내가 특정한 장소에 따로 묻는 것은 다른 거 아니냐.


그렇긴 하다. 우리는 시신을 쓰레기와 함께 묻지 않는다. 시신,에 부여하는 의미만큼 그는 유기체로서 작동하는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부속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 뿐. 무엇이 다른가. 아버지가 의미를 부여해온 그래서 지금까지 지켜온 습관과 루틴에 내가 의도치 않은 균열을 일으킨 셈. 그 사실이 머쓱하기도 하고 때아닌 ‘손톱과 영혼’의 문제가 의아하기도 해서. 나는 ‘사후생’에 대한 아버지의 생각을 묻기에 이르렀고.


#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 사후생? 죽음 이후라……그거야 알 수 없지.

- 그렇죠, 알 수 없는 거죠.

-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 것이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것이고.

- 아빠는 어느 쪽에 가까운데요?

- 글쎄. 난 있다,는 쪽을 믿고 싶어.

- 있다,고 믿어야 손톱 묻힌 곳으로 영혼도 내려올 테고?

- 그렇게 되는 건가.

- 있다고 생각하면 있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것. 그건 신의 존재와도 비슷하지 않아요?

- 그럴 수 있지.

- 그렇다면 아빠는 신이 있다,는 쪽에 가깝나…?

- 난 무신론자에 가깝지만 어떤 거부할 수 없는 힘, 인간이 가늠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 힘이 있다고는 믿는 편인데. 그게 신이라면 신일 수도 있고.


이런 대화라니. 문득. 종교 자체엔 중립적이지만 세속화되고 제도화된 특정 종교의 행태엔 상당히 비판적이었던 아버지의 평소 입장을 떠올렸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아버지는 종교적 인간이다. 특정 종교를 갖지 않은 비종교인. 그러나 종교적(어쩌면 철학적) 사유를 거부하지 않는,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수용하려는 태도. 오래전에 읽은 알랭 드 보통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가 떠올랐다. 예컨대 이런 문장들.


“종교란 하늘나라에서 인간에게 내려준 것이거나, 아니면 완전히 엉터리에 불과한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우리가 버리게 될 때, 문제는 더욱 흥미로워질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종교가 우리의 발명품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발명품은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두 가지 필요성 -그러나 세속 사회에서는 어떤 특별한 기술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두 가지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생겼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 첫째는 몸속에 깊이 뿌리박힌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충동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필요성이다. 둘째는 직업상의 실패, 꼬인 인간관계, 가족의 죽음, 자신의 노화와 사망 등에 대한 우리의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끔찍스러운 고통에 대처해야 할 필요성이다.”

- 알랭 드 보통,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박중서 옮김, 청미래, 2011, 13쪽


무신론자인 아버지를 위한 종교란 ‘교리가 없는 지혜’인지도. 시와 손톱. 검은 테이블 위에 놓인 정물은 그 지혜를 바라는 마음의 일환인지도. 교리가 없는 지혜를 지향하는 또 다른 비종교인인 나 역시 종교적 인간인지도.


(202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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