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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Oct 04. 2022

어머니에게 돌아가다

회귀로서의 죽음

- 더 늦기 전에 어머니한테 다녀와야겠어.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어머니(그러니까 나의 친할머니) 산소에 다녀오고 싶어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 마지막으로 네 엄마도 보고 싶고.


아버지는 ‘아버지의 어머니’와 ‘나의 어머니’ 둘 다를 보고 싶어했다.


먼 길이었다. 아버지 집에서 양평까지는. 다행이었다. 아버지의 체력을 고려할 때. 할머니의 산소와 엄마의 산소는 가까웠으니.


8월 둘째 주. 힘겹게 찾아간 할머니의 산소. 내겐 몇십 년 만이었다. 알아볼 수 없는 묘원과 기억나지 않는 봉분. 휘청거리는 몸으로 아버지가 절을 올렸다. 어쩌면 생전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모르는. 아버지는 무덤을 향해 말했다. 담담히. 


- 어머니, 나 이제 곧 어머니한테 가요.


아버지가 아버지의 어머니에게 한 말이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뒤돌아선 아버지는 부축을 받으며 차에 올랐고 곧 아내의 묘에 도착했다.


(여보, 나도 이제 당신 곁으로 가.)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엄마의 묘 앞에서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침묵의 소리.


블랑쇼는 두 가지 죽음을 구분한 바 있다. 현재의 죽음이 있고 영원의 죽음이 있다. 영원의 죽음은 인칭과 관계없이 우주에서 영원히 반복되는 사건이다. 이 죽음은 또한 형이상학적 죽음이다. 대조적으로 현재의 죽음은 두려움과 슬픔으로 다가온다. 특히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그렇다. 또 자신의 죽음은 항상 두려운 것으로 느껴진다. 이런 죽음은 현상학적 죽음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안에 들어온 삶의 관점에서 죽음을 보는 것이 현상학적 눈길이고, 거꾸로 삶 안에 포함된 나의 입장에서 죽음을 보는 것이 형이상학적 눈길이다. 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한 인간에게 ‘자기’란 모든 것이다. 내가 아무리 고통을 당해도 남이 그것을 대신해줄 수 없고, 어머니의 고통이나 죽음이 서러워도 내가 그것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살’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하면 우주의 관점에서 내가 무슨 큰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나는 거대한 내재면에서 나온 하나의 개체일 뿐이다. 그래서 내재면을 사유하는 입장에서 볼 때 죽음이란 결국 고향을 찾아가는 것일 뿐이다.


- 정동호 외, <철학, 죽음을 말하다>, 산해, 2004, 이정우, ‘죽음은 자연으로의 회귀이다’, 275-276쪽


철학자 이정우는 들뢰즈의 '내재면 plan d'immancence' 개념을 동북아의 기(氣) 일원론과 나란히 놓는다. 들뢰즈가 말하는 "개체들이 그로부터 나와 그리로 돌아가는 물질적 터"로서의 '내재면'은 동양 사상의 자연 자체, 물질 자체, 기(氣)와 다르지 않다는 것. (이때의 '물질'은 생명과 정신을 포괄하는 궁극의 실체를 가리킨다.) "내재면은 생명 자체이며, 또 스피노자의 신=실체=자연(自然)에 다름 아니다"라는 문장으로 요약될 수도 있겠다. 이 지점에서 다시 들뢰즈의 '잠재성(virtualité)' 개념이나 '강도(intensité)' 혹은 '특이성(singularité)' 개념과 이어지지만. 여기에서 이 복잡다단한 개념에 대해 더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또 말할 필요도 없겠지. 나는 단지 동서를 관통하는 공통의 이미지, 즉 '자연 - 대지 - 어머니 - 자궁 - 고향'과 같은 일련의 흐름을 말하고 싶은 것이고. 자연으로부터 와서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둥근 원(圓) 운동의 한 지점 혹은 사건을 죽음이라고 본다면. 아버지가 말한 저 단순한 한 마디 "어머니, 나 이제 곧 어머니한테 가요"라는 말은 '어머니=고향=자연=죽음'으로 '되돌아간다'는 (어쩌면 몹시 진부한) 시적/철학적 메타포를 환기시키는 셈이다. 


안소니 홉킨스가 80대에 이르러 치매 노인으로 열연한 영화 < 파더 The Father> 잊을  없는 마지막 장면은 이렇다.  (올리비아 콜맨 ) 위시하여 주위의 모든 것이 의심스럽고 혼란스럽기만  안소니(안소니 홉킨스 ) 극도의 혼돈과 두려움 끝에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를 찾는다.


I want my mommy. I want her to come and fetch me. I want to go home. (엄마를 원해요. 엄마가 와서 나를 데려가길 원해요. 집에 가고 싶어요.)


어린 아이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엄마를 찾는 80대 노인 안소니가 요양원의 간호사 품에 안겨 우는 장면은 오래도록 강렬한 잔영으로 남는다. 


mommy(엄마)=home(집),이라는 클리셰는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라는 말이 가진 이중적 의미, 즉 탄생(生)과 회귀(死)를 동시에 아우르는 강력한 상징성 또한 끝없이 반복될 것이고. 


당신의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아버지의 길이 너무 고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2022-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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