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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Sep 21. 2022

계획은 계획대로 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획하기

- 내가 이걸 마시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네.


빈의 말이다. 빈은 나의 남편이다. 연초. 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하면서 그는 이러저러한 단백질 음료들을 주문해 아버지 집으로 배송시켰다. 아버지 집 근처 스포츠센터를 알아보고, 열탕이 구비된 시설 좋은 곳으로 1년 회원권을 등록해드리더니, 체계적이고 안전하게 근육 운동을 하시라고 PT도 끊어드렸다. 딸보다 사위가 낫나.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 말은 옛말. 장인 사랑은 사위,라는 말도 성립한다.


# 당플랜,은 플랜대로 되지 않고


‘뉴케어 당플랜’은 빈이 아버지를 위해 배송시킨 영양 음료 중 하나였다. 당뇨환자를 위한 프리미엄 균형영양식. 암 진단을 받기 직전 아버지가 당플랜을 먹고 토하는 바람에, 이후로 당플랜은 못 먹겠다고 하는 바람에, 토하는 장면을 지켜보던 동생마저 다시는 그 냄새를 맡고 싶지 않다고 하는 바람에, 많은 양의 당플랜은 갈 곳을 잃었다. 먹을 사람이 없었기에. 주말에 아버지 집을 방문한 빈은 부엌 한편에 가득 쌓인 당플랜 낱개 팩들을 주섬주섬 커다란 쇼핑백에 담기 시작했다.


- 어쩌려고?

- 내가 가져가서 먹어야지 어쩌겠어.


그렇게, 장인을 위해 주문한 당플랜은 뜻하지 않게 사위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빈은 아침에 출근할 때 당플랜을 하나씩 가져가게 되었다. 뜻밖의 루틴. 내가 이걸 마시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네.


플랜은 플랜한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는 것이다. 계획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하면서도 행하는 인간의 행위. 계획할 수 없는 것을 계획하는 것도 인간이다. 계획하는 것만으로도, 계획한 대로 흘러갈지도(혹은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갖고 싶은 마음의 발로일까.


#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능력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떠올린다.


신의 벌을 받아 인간의 모습으로 버려진 천사 미하일은 죽어가는 자신을 거두어준 구두수선공 세몬과 그의 부인 마트료나와 함께 살며 구두 직공으로 일한다. 6년의 세월 동안 오직 세 번의 미소만 지었던 미하일. 신의 용서를 받아 하늘로 올라가기 직전 그는 세 번의 미소에 대해 설명한다. 신이 자신을 땅에 보내며 깨달으라고 한 세 가지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세 가지 진리를 깨달은 뒤에야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


1년을 신어도 모양이 변하거나 뜯어지지 않는 장화를 주문하러 온 부유한 신사를 보고 미하일은 두 번째 미소를 짓는다. 신사가 제공한 값비싼 가죽으로 미하일이 만든 것은 장화가 아닌 (죽은 사람에게 신길) 슬리퍼. 그는 신사의 어깨 뒤로 죽음의 천사를 알아본 것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사람은 날이 저물기 전에 죽을 거라는 것도 모르고 1년을 준비하는구나.’


-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순영 옮김, 문예출판사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능력’이라는 것(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기에)을 깨달았기에 미하일은 미소를 지었던 것. 해가 지기도 전에 죽게 되지만 이를 미리 알지 못하는 인간은 미래를 계획하며 ‘오늘-지금’ 구두를 주문하는 존재인 것.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능력’이 주어진다면 계획 같은 것은 세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행하는 ‘계획’의 조건 아닌가.


그렇다면.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능력,이 부재한다는 것을 아는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니 그 역시) ‘계획’을 세울 것이다. 계획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중요한 차이. 죽음의 특정한 날을 알지는 못하지만 ‘언젠가 죽는다’라는 막연한 회피보다는 언제라도(당장 오늘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죽음의 임박성’을 자각하며 살아가는 것.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것도 결국 ‘삶의 조건으로서의 죽음’을 매 순간 의식하라는 요청 아니던가.


어쩌면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을 향한 존재(das Sein zum Tode)’의 의미인지도. 하이데거에 의하면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die eigenste Möglichkeit)’이므로.


(2022-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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