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n 24. 2022

복도에서

병원 복도에서, 생의 복도에서

종합병원 복도를 오래 서성거리다 보면

누구나 울음의 감별사가 된다


울음마다에는 병아리 깃털 같은 결이 있어서

들썩이는 어깨를 짚어보지 않아도

그것이 병을 마악 알았을 때의 울음인지

죽음을 얼마 앞둔 울음인지

싸늘한 죽음 앞에서의 울음인지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 복도에서는 보이지 않는 불문율이 있다

울음소리가 들려도 뒤돌아보지 말 것,

아무 소리도 듣지 않은 것처럼 앞으로 걸어갈 것


마른 시냇물처럼 오래 흘러온

이 울음의 야적장에서는 누구도 그 무게를 달지 않는다


- 나희덕, '이 복도에서는' 전문, <어두워진다는 것>, 창비, 2001




# 복도 1 

4월 말. S종합병원 암병동 복도. 벽에 기대어 울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아무렇게나 구겨 신은 샌들 차림에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또래의 여자. 눈물로 범벅이  얼굴. 흐느낄 때마다 들썩이는 어깨. 가족 누군가가 판정을 받았구나, 나는 직감한다. 바로 전날,  역시 같은 복도에서 그렇게 벽에 기대어 울고 있었지.


S병원 초진 -> 응급실 ->  병원 이전 -> 응급 수술 -> 다시 조직검사를 위한 S병원 입원까지, 20일가량의 여정은 충격과 불안과 극도의 피로와 초조함으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코로나 시국으로 10시간 만에 응급실에 들어갔고,  진단을 위한 입원까지는 3주가 걸렸다. 이토록 종합병원 입원을 간절히 바란 적이 있던가.


보호자 분은 복도로 잠깐 나와 주세요. 조직 검사를 끝낸 다음 , 오전 회진을 돌며 병실을 찾은 주치의는 침상에 누운 아버지를 잠시 살펴본  나를 복도로 불러냈다. 췌장암 말기, 생명 연장, 항암 여부, 환자의 의지, 가족의 결정, 등과 같은 말들이 흘러나왔다. 2 , 응급실에서 전문의로부터 이미 '막 내 전이' '췌장암 4 추정' 같은 말들을 들었으므로. 나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되어 있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예상하고 있던 결과를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전해 들었을 뿐인데.  무리의 의료진을 끌고 바쁘게 다음 병실로 향하는 주치의 교수를 야속하게 바라보며. 나는 멍하니 복도를 걸었다. 아버지가 있는 병실에서 멀리 떨어진 복도 끝까지. 그리고 벽에 기대어 울었다. 마치 "그것이 병을 마악 알았을 때의 울음" 것처럼.


# 복도 2

어쩌다 이 시를 다시 읽게 되었을까. 몇 년 전, 나희덕 시인의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에 실린 몇몇 시들이 나의 시선을 끈 적은 있어도. ‘이 복도에서는’이라는 시는 당시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왜일까. 20년 전, 엄마의 뇌졸중 진단 소식을 들은 후 아산병원 복도에서 하염없이 걸었던 기억을 떠올릴 법도 했을 텐데. 불 꺼진, 어둑한, 인적 없는 복도를.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음속 등들도 하나씩 차례대로 꺼지는 듯한 그 느낌을. 당시 복도를 걸으며 나는 울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겨자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다는 기억만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 왜 그 옷이 기억날까. 뭣이 중헌디. 어쩌면 슬픔과 나르시시즘의 결합인지도. 엄마의 병을 막 알았을 때의 울음 대신 나는 엄마의 병에 슬퍼하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엄마를 생각하고 근심하며 코트 깃을 여미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또 다른 나,에 대해 생각하는 뒤얽힌 자의식. 타인의 고통은 절대로 타인의 고통 자체만으로 내게 오지 않는다. 거기엔 나의 고통, 나의 불안, 나의 근심이 모조리 투영되어 있다. 이제 와 해보는 생각.


# 복도 3 

의사를 만나기 위한 기다림의 장소, 병원 복도. 기다림은 복도에서 하염없이 이어지고, 만남은 진료실에서 순식간에 끝난다. S종합병원 소화기내과 외래 진료. 초진은 싱겁게 끝났다. 췌장 끝 혹이 커서 악성일 확률이 높다,라는 말뿐. 동네 병원에서 CT를 찍을 때 왜 조영제 투여를 하지 않았나요? 이런 갑작스러운 의사의 질문에 환자의 입장에서 제대로 된 즉답을 하기란 불가능하다. 조영제를 투여한 CT와 그렇지 않은 CT의 차이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의학지식이 없는 일반인들에게는. 마치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죗값을 치르듯 환자와 보호자는 의사 앞에서 핀잔을 듣고 주눅들기 십상이지. 조직 검사를 해야 암인지 아닌지를 판정할 수 있고, 그러려면 반드시 입원을 해야 합니다. 입원을 하려면 최소 3주 이상 대기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의사에게 직접 들은 것은 아니다. 간호사, 혹은 다른 간호사, 혹은 또 다른 상담 간호사, 혹은 원무과 직원, 혹은 입원실 배정 담당자 등등. 환자는 자연스럽게 을의 입장이 된다. 병원은 갑, 환자는 을. 어쩔 수 없다. 아쉬운 쪽이 늘 을이니까.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고, 묻고, 설명하고, 부탁하고, 사정하고, 읍소하고, 다시 설명하고, 다시 사정하고. 우는 아이 젖 준다,는 말처럼 징징대다 보면 한 번쯤 더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줄까 하여.


# 복도 4 

만우절이었다. 아버지의  의심 소견을 처음으로 들은 날은 공교롭게도 4 1. 이후 숨가쁘게 지나갔던 4  달의 기록을 이제야 다시 들춰본다. 기록이라기보다는 다급한 메모들. 아버지의 상태, 검사들, 의사() 소견(), 간호사() 파편적인 정보들. 4월은 잔인한 ,이라는 클리셰는 잊고 싶지만. 진정 4월은 잔인한 달이었고.


의심과 희망의 경계에서 억누르고 있던 울음이 처음 터진 곳은 응급실 복도였다. 조직 검사를 해야만 확실하게   있다는 애매한 말만 반복하며 자리를 뜨려는 소화기내과 전문의를 붙들고 조영 CT 결과를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부탁했던 . 의심했지만 의심했던 결과를 의사의 입을 통해 듣는 순간. 나는 마치  순간을 위해 울음을 참아온 것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외과 전문의가 급하게 나를 찾았고. 암도 암이지만  다급한 것은... 충수가 터진 것으로 확인되니 오늘내일 안으로 응급 수술을 해야만 합니다. 저희 병원에선 불가능하니 응급 수술이 가능한 다른 협력 병원을 알아봐 드릴게요. 길게 울음을 이어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그날. 나는 정신없이 헤맸고, 틈틈이 울었다. 응급실 복도에서.


# 복도 5 

거듭되는 고민과 대화 끝에 항암을 결정했다. 아버지가 평소 그토록 거부했던 생명연장을 위해. 아이러니. 항암을 권하는 소화기내과 의사의 의견이 받아들여진 셈이다. 그는 항암을 담당하는 혈액종양내과 교수를 연결시켜주었고. 새로운 주치의와의 초진을 기다리며 다시 복도에서. 늘 그렇듯 여러 가지 질문들을 준비했고. 그러나 의사와의 상담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끝났다. 항암 불가. 저희 쪽에서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의사는 아버지를 복도로 내보내고 보호자만 남으라고 했다. 소화기내과 교수님은 항암을 권하셨는데요, 항암을 할 수 없는 상태인가요? 패닉 상태에 빠진 내게 의사는 말했다. 위험합니다, 지금 상태에서 항암제를 쓰면 곧바로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말문이 막힌다는 것은 이럴 때 쓰는 말. 준비했던 질문들은 무의미했다. 아이러니. 복도를 나서며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눈물을 참기 위해 잠시 다른 쪽 복도를 어수선하게 서성였고. 로비를 함께 빠져나가면서 잠시 얼이 빠진 듯 허둥대는 내게 아버지가 말했다. 정신 차려. 정신을 차려야 했다. 


# 복도 6 

이후. 병원은 바뀌었지만 병원 복도의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집과 아버지 집을 오가며. 아버지 집과 병원을 오가며. 앞으로 또 어딘가의 복도에 나는 서 있겠지. 어떤 표정 혹은 어떤 울음으로 어떤 상황을 맞이하게 되겠지. 준비해도 준비되지 않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세 번의 죽음을 통해 배웠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또 무언가를 준비한다. 준비해도 준비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마음을 또 준비하고. 준비는 미래를 향하지만 준비의 마음은 현재에 머문다. 함께-있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란 이런 것. 지금-여기-함께-곁에-있음. 다가올 것을 기다리는 생의 복도는 그 길이를 가늠할 수 없으니까. 


(2022-6-24)

이전 10화 죽어가는 자를 위한 돌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