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Oct 10. 2022

희미해지다

목소리, 눈빛, 손짓

우리가 보기에

그가 점점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감각이 그를 떠났다

천천히 그는 하나의 기념물이 되어갔다


음악의 귀 조가비 속으로

들어섰다 돌 숲 하나


그리고 얼굴 피부

죄였다

멀고 메마른

눈 단추 두 개로


그에게 남은 것은 단지

촉각뿐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는 손으로 했다


-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 시전집, 김정환 옮김, 문학동네, 2014, <헤르메스, 개와 별>(1957) 중 부분, 147쪽.


아버지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천천히 하나의 기념물이 되어가는 중인가. ‘멀고 메마른/눈 단추 두 개로’ 가끔 나와 눈을 마주칠 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손으로 원하는 것을 말할 때. 허공에 손을 뻗어 종종 무언가를 잡으려 할 때. 모든 감각이 희미해져도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은 청각. 눈동자가 흐려질 때마다 그를 부른다. 아빠, 아빠. 그의 손을 잡는다. 누군가 당신 옆에 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


9월 4일. 태풍 힌남노가 올라오고 있대요. 비가 많이 와요. 빗소리 들려요? 열어놓은 병실 창문으로 빗소리가 이어진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목소리로 혹은 눈빛으로 혹은 손으로.


# 비 그리고 타인의 죽음


9월 6일. 건너편 침상 환자가 임종했다. 아버지가 입원할 때부터 그 자리에 있던 환자였다.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에, 췌장암이라는 병명도 같았다. 태풍 힌남노의 영향으로 비가 많이 온 날. 점점 희미해지던 환자는 밤 11시경 임종실로 옮겨졌고, 자정을 넘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종했다. 아내인 보호자 아줌마가 임종실에서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마지막 짐을 챙기는 그녀와 작별인사를 했다. 그녀는 내게 고맙다고 했다. 밤낮으로 남편의 곁에서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끼니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았고 막바지엔 감기 몸살로 링거까지 맞았다고 했다. 그럴 만도 하죠. 내가 말했다. 나는 간간이 끼니 대용의 음료와 과일을 그녀에게 건네주었고, 내 점심용 샌드위치를 반으로 갈라 나눠주기도 했다. 감기로 목소리가 변한 그녀에게 따뜻한 물에 오곡차를 우려 손에 쥐여주기도 했다.


남편의 임종 후 병실을 떠나는 아줌마의 손을 잡아주었고, 흐느끼는 그녀를 안아주었다. 건강하세요. 나는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불과 열흘 전까지만 해도 생면부지였던 사람이다. 그날,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고 자주 병실을 서성댔다.


임종한 환자가 있던 건너편 창가 자리엔 새로운 환자가 들어왔다. 60대 초반의 간암 환자였고, 50대 중반의 아내가 주보호자였다, 교대 없이 힘들어하던 그녀는 어느 날 허리를 삐끗했다고 말하며 난생처음 겪는 허리 통증이라고 했다. 그럴 만도 하죠. 나는 말했다. 오랜 척추 질환으로 터득한 정보를 알려주었고, 그녀가 침을 맞으러 간 한의원에서 겪은 황당한 일에 같이 분개하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한 달이 지났다.


10월 10일. 건너편 침상 환자가 임종했다. 지난번처럼 비가 많이 왔고, 자정이 한참 넘은 시각이었다. 짐을 챙기러 온 보호자 아줌마는 담담해 보였다. 오후 3시경부터 10시간 넘게 임종실에 있느라 많이 지쳐 보였다. 막판에 너무 힘들어하는 남편을 보며 빨리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나는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안아주었다. 별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생면부지였던 사람이다.


호스피스 입원 후, 지난 45일 동안 병실을 함께 쓴 환자 네 명이 임종했다. 그중 짧지 않은 기간을 함께 보낸 2명의 보호자와는 알게 모르게 가까워졌다. 동병상련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무엇.


살면서 이토록 낯선 타인과 슬픔을 공유하고 위로한 적이 있던가. 모르는 사람의 손을 잡아주고,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등을 쓸어주며 안아주기까지 했던 적이. 죽음이라는 사건은 타인을 향해 조건 없이 열리는 계기를 마련하는 듯하다.


타인과 나의 만남을 무한과의 관계로서 사유할 것을 제안한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은 무한의 흔적”이라고 말했다. 이 알 듯 모를 듯했던 말이 문득 생각나는 건 왜일까.


이날, 나는 병실에서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수면안정제로 간신히 잠든 아버지 곁에서.


겨울을 재촉하는 비.


날이 밝자, 밤새 내리던 비가 거의 그쳤다.


(2022-9-4 ~ 2022-10-10)





이전 08화 아버지는 동생을 여보, 하고 불렀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