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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Oct 06. 2022

인풋과 아웃풋

먹기 그리고 배설

- 콧줄 끼웁시다.


늘 그렇듯 담당 교수 K의 진단과 지시는 간결하고 명쾌하다. 호스피스 입원 25일 차. 아버지가 뱉어낸 녹색 점액은 좋지 않은 신호였다. 쌓인 담즙을 배출하지 않으면 구역감과 구토가 지속되고 폐렴도 올 수 있는 상황. 콧줄을 한번 끼웠다 참지 못하고 빼버린 아버지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학습된 고통을 반복해야 한다는 심리적 두려움 때문인지 콧줄은 좀처럼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극도의 괴로움을 호소하는 아버지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콧줄과의 사투. 환자, 의사, 간호사, 보호자, 간병인 모두가 매달려야 했다. 간신히 성공했으나 아버지는 이미 탈진한 상태. 오전 내내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했다.


# 콧줄을 끼운 날


처음 콧줄을 고려했던 것은 순전히 '먹기'를 위한 방법적 모색의 일환이었다. 된장국이 먹고 싶다,는 아버지의 말 한마디로 시작된 '된장국 프로젝트'의 시작점이라고나 할까. (물론 아버지는 아직까지 된장국을 먹지 못하고 있다.)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 목으로 넘긴다,는 감각. 그 만족감을 주기 위해 콧줄을 시도했던 것이다. 음료를 입 안에 넣고 삼키자마자 쪼르르 다시 콧줄을 통해 바깥으로 배출되는 시스템. 장폐색으로 인해 음식물이나 가스가 장을 통과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혀끝에 느껴지는 미각과 가스 배출을 돕기 위해 콧줄을 다는 것. 말 그대로 넣자마자 빼는 식이다. 그러나 넣을 수 있는 것도 지극히 제한적이어서, 건더기가 있어서는 안 되고, 점도가 있어서도 안 된다. 끈끈한 액체를 제외하면 가능한 (맛이 느껴지는) 음료는 보리차나 옥수수수염차와 같은 차 종류, 거즈에 거른 식혜즙이나 배즙 같은 것에 한정된다. 그래도 얼음조각이나 물 몇 모금에 만족해야 했던 혀의 입장에선 다채롭고 풍성한 맛의 향연과도 같지 않을까. (물론 이 또한 오래가지는 못했다. 아버지의 콧줄은 이제 섬뜩한 녹색  담즙을 빼내는 용도로만 주로 사용되고 있다.)


# 먹는다는 행위, 그 눈물겨움에 대하여


장폐색,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들었던 것은 4월 초 응급실에서였다. 탐독하듯 의학용어를 찾아가며 해독(!)한 아버지의 응급 기록지에 '경증 마비성 장폐색(mild paralytic ileus)'이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 심각한 정도가 아닌 경증 증상임에도 나는 전전긍긍했다. 모든 것에 노심초사하고 과민하게 반응했던 4월. 다행히 아버지는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식욕 증진과 식단을 고민했던 시기가 그나마 좋은 때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먹을 수는 있었기에.


식욕은 인풋을 가능하게 한다. 나날이 식욕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위해 식욕촉진제,라는 마지막 카드까지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인풋이 가능하다는 것은 아웃풋이 원활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한동안 식욕(인풋)과의 전쟁을 치르다가 어느 시점부터 배설(아웃풋)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진통제의 흔한 부작용으로 변비가 악화된 것. 아웃풋의 문제는 설사 혹은 변비. 동생과 나는 아버지의 설사 일지 혹은 변비 일지까지 기록하게 되었다. 설사보다 더 무섭다는 변비 앞에서 나는 인풋과 아웃풋의 원활한 흐름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 자연스러운(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이는) 흐름이 끊어지거나 막힐 때 신체는 고장이 나는 것. 아버지가 호스피스에 입원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도 결국 장폐색 때문이었으니까. 장이 작동하지 않아 아웃풋이 불가능하게 된 상태. 아웃풋이 불가능하면 인풋도 불가능하다.


말 그대로 들어가는 게 있으면 나오는 게 있어야 하는 것. 거꾸로 말하면, 나오는 게 있어야 들어갈 수도 있는 것. 신체가 인풋과 아웃풋의 기능을 상실할 때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지 않았던가. 먹을 수 있다,는 것. 인풋과 아웃풋의 흐름이 자연스럽다,는 것은 일상의 축복이다. 아버지의 콧줄을 통해 나는 새삼 '먹는다는 행위'의 눈물겨움을 체감한다.


# 밥을 먹다 - 삶을 씹는 거룩한 의식


소설가 박경리의 시집을 읽은 적 있다. <토지>를 완독하지는 못했어도. 소박하고 간결한 시들이었다. 그중 '의식'이라는 시가 눈에 띄어 옮겨 적었던 것이 벌써 10년 전 일. 문득 이 시가 떠올라 전문을 옮긴다.  


저녁밥 대신

창가에 앉아

콩을 까먹는다

삶의 의식

엄숙하지만

성가실 때가 많다


청춘 한가운데선

본능으로

밥을 먹었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

삶을 씹는

거룩한 의식이라는 것을


- 박경리, <우리들의 시간>, 마로니에북스, 2012, '의식' 전문


‘밥을 먹는다’는 눈물겨운 행위는 ‘삶을 씹는다’는 거룩한 의식으로 이어진다. 나날이 이 거룩한 의식을 치를 수 있다는 것. 그 엄숙한 축복을 인식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삶을 꼭꼭 씹어 삼킬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피트 닥터의 애니메이션 영화 <소울>에서 영혼 22번이 인간의 몸을 빌려 처음 피자 한 조각을 먹는 장면이 생각난다. 스파크! 맛있다는 쾌의 느낌.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를 위해 '스파크'를 찾는 여정이 이 순간과 거의 등가를 이룬다.


“A spark isn't a soul's purpose."


목적은 스파크가 아니다. 스파크는 목적이 아니다. 사는 것은 목적하지 않는다. 그냥 사는 것. 살아가는 것. 


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대사도 이것 아니었나.


“I do know…that I'm going go live every minute of It."


영혼 22번이 피자를 맛보며 느낀 그 감정이 곧 ‘스파크’ 아닐까. 그토록 찾아 헤맨, 인생의 의미 혹은 목적이라고 생각해온 ‘스파크’가 일상의 작은 체험으로 환치되는 순간. 몸의 감각을 통해 불현듯 열리는 이 예상치 못한 ‘스파크’ 지점을 우리는 먹는 순간 혹은 일상의 아주 미세한 순간에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순간을 살다(live the moment)’라는 나의 모토와 겹쳐지는 텍스트를 접할 때에도 나는 ‘순간을 사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나는 요즘 매 순간을 살고 있는가, 하는 자문.


# 배설의 또 다른 메타포


내게 ‘순간을 사는’ 경험은 ‘기록’으로 이어질 때 좀 더 ‘살아 있게’ 된다. 기록을 통해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순간의 경험은 그 본래적 특성인 ‘소멸’을 유예하는 효과를 낳는다. 유예의 과정에서 약간의 변형과 왜곡 혹은 오류가 수반될 수는 있어도, 그 순간의 경험이 ‘거기-있었음’을 증명하는 데에는 충실한 역할을 수행한다.


경험은 인풋이고 기록은 아웃풋이다. 순간의 경험이 ‘먹기’라면, 그 내적 경험을 바깥으로 꺼내는 작업은 ‘배설’이 된다. 유기적 신체의 배설(排泄)은 정신적/언어적 배설(排說)이라는 또 다른 메타포를 낳는다는 생각. 


호스피스 입원 , 아버지에겐 수시로 관장과 좌약이 처방되었다. 오래도록 딱딱하게 굳어변을 어떻게든 빼내야 하므로. 배설(排泄) 시급함.


나는 어떤가? 정신적/언어적 만성 적체에 시달려온 지난 몇 개월. 나는 이제야 찔끔찔끔 무언가를 내보내고 있다. 배설(排說)의 절실함.


(2022-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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