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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Oct 09. 2022

아버지는 동생을 여보, 하고 불렀다

섬망에 관하여

- 내가 누구야?


4월 말. 암 소견 이후 간신히 S병원에 입원한 첫날, 아니 다음날 아침이었다. 아버지가 눈을 뜨고 내게 건넨 첫마디는 ‘나는 누구냐’는 질문. 덜컥 겁이 났다. 멀쩡하던 사람도 몸에 계속 약물이 주입되고 낮인지 밤인지 모를 환경에 오래 노출되면 가벼운 섬망 증세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기 동일성의 문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동일한 정체성으로 유지되는 것.


-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는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고. 아버지는 평소의 아버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아버지의 정체성으로 돌아왔다.


# 섬망이라는 이상한 세계


- 수면제는 절대 드시지 마세요. 섬망 증세 나타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8월 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외래로 호스피스 진료를 받았다. 불면을 호소하는 그에게 담당 주치의가 처음으로 한 말은 수면제를 먹지 말라는 것. 수면제를 고려했던 우리로서는 깜짝 놀랄 만한 말이었다. 평소 수면제 복용을 거부했던 아버지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무뚝뚝한 의사에 대해 신뢰를 쌓기 시작했다.


그랬기에. 호스피스 입원 후 한밤중에 아버지가 간호사에게 수면제를 요청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나와 동생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우려했던 대로 섬망 증세가 나타났고, 아버지는 워커에 의지해 복도를 활보하고 다른 병실에 억지로 들어가려다 제지당하자 소리까지 질렀다고 한다. 잠들기 위해 수면제를 원했으나 잠들기는커녕 이상한 세계로 빠져버린 아버지. 다음날 아버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몽유병자처럼.


이후 간간이 이상한 말과 행동을 보이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대화의 맥락을 유지하는 선에서 약간 엉뚱하다 싶은 돌발 발언의 차원에 머무는 정도였다. 신체적으로 몹시 힘든 날엔 섬망 증세가 더 심해지는 듯했다. 콧줄을 끼우기 위해 사투를 벌인 날, 오전 내내 몸을 떨던 아버지는 오후 들어 이치에 맞지 않는 말만 늘어놓았다.


섬망(譫妄, delirium). 헛소리 섬(譫), 망령될 망(妄).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섬망은 신체 질환이나, 약물, 술 등으로 인해 뇌의 전반적인 기능장애가 발생하는 증후군이다. 주의력 저하와 의식 수준, 인지 기능 저하를 특징으로 하며, 그 외 환시와 같은 지각의 장애, 비정상적인 정신운동 활성, 수면 주기의 문제가 동반되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가장 먼저 감지된 것은 언어 능력에 온 이상 신호였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단어를 기억해내지 못하더니 어느 순간 엉뚱한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예컨대, '식혜'라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한참을 입속에서 우물거리다 어느 순간 '죽'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아예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김찜)를 만들어내는 식이었다. 언어 기능 저하는 인지 기능 저하를 가져온다.


어느 날 아버지는 동생에게 여보,라고 불렀다 한다. 깜짝 놀란 동생이 무의식적으로 네? 라고 대답하자 돌아온 말은 문장이 아닌 두 개의 단어였다고. '볼기짝'과 '음료'. 차츰 이성적 대화가 힘들어지고 있는 시기였다. 문장 단위보다는 단어 혹은 음절 단위로 분절되는 언어를 구사하는 상태. '여보'는 (죽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볼기짝'은 신체적 고통을, '음료'는 본능적 욕구를 호소하려던 게 아니었을까. 의식 수준이 저하되면서 남게 되는 것은 식욕과 고통과 애착의 문제로 수렴되는 것일까.


박연준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시인은 아픈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고통스러운 애증의 관계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뱀이 된 아버지'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버지를 병원에 걸어놓고 나왔다

얼굴이 간지럽다


아버지를 병원에 '걸어놓은' 딸에게 아버지는 처제, 하고 부른다.


반항도 안 하고

아버지는 나를 잠깐 보더니

처제, 하고 불렀다

아버지는 연지를 바르고 시집가는 계집애처럼 곱고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아버지의 팥죽색 얼굴 위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다

미소처럼,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지나가는 뱀을 구경했다


기운이 없고 축축한 - 하품을 하는 저 뱀


- 박연준,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문학동네, 2012, '뱀이 된 아버지' 부분


알코올 중독증과 우울증에 걸린 아버지에 대해 시인이 2008년에 쓴 글을 읽기도 전에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그녀의 첫 번째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창비, 2007)을 읽고 "아버지를 돌보는 '나'에게서 지극한 사랑과 끔찍한 피로가 동시에 느껴졌다"고 말한다.


그녀를 슬프게 하는 것이 대체로 주변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나를 슬픔에 빠뜨리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를 슬프게 할 수도 있는 그 사람들은 셋인데, 그중 하나는 아버지다. - 신형철,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해설 중


나를 더욱 슬프게 한 것은 점점 가라앉는 자신의 인지 상태를 인지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엉뚱한 말을 하고 나서 "내가 왜 이런 이상한 말을 하지?"라는 즉각적인 반성, 딸의 생일 날짜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자책으로 일그러진 얼굴, 가만히 눈을 감은 아버지가 "내가 이상한 소리 하지 않도록 집중하는 거야"라고 말할 때의 표정 등과 같은.


어느 날은 자신의 얼굴 앞에 오른쪽 검지 손가락을 들어 올리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뭐 하시는 거예요? 내가 묻자 아버지는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 일도초연.

- 그게 뭔데요?

- 점 하나에 집중하면 그 점이 점점 커지는 것처럼. 이렇게 집중하면 내가 초연해지겠지.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그렇게 기억해달라고도 했다. 일도초연,이라니. 아버지가 조합해낸 말일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나름, 치열하게.


# 무의식을 읽다


말실수나 꿈에서 무의식이라는 인간 심연의 진실을 엿보고자 했던 프로이트. 점점 늘어나는 헛소리와 횡설수설에서 지난 세월 아버지를 사로잡은(혹은 붙들어온 혹은 괴롭혀온 혹은 얽어매온) 욕망(혹은 두려움 혹은 불안)을 읽는다. 병원을 회사 혹은 법정으로 착각하고. 당장 만나야 하는 누군가는 판사 아니면 정치인이다. 빚이 남았을 리 없는데 왜 빚이 남았는지 자꾸 묻고. 자신의 자리와 위치에 대한 불안을 호소한다. 예컨대 이런 식.


- (내 이름을 부르며) 나 사퇴할까?

- 네?

- 여기서 그만두는 게 좋지 않을까?

- 여기가 어딘데요?

- 높은 자리.

- 왜요?

- 사람들이 자격도 없으면서 그 자리에 있다고 욕하지 않을까.


나는 잠시 생각하고 아버지에게 묻는다.


- 어떻게 하고 싶으신데요?

- 나를 가장 낮은 자리로 놓아줘.

- 네,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우리의 대화는 일단락된다. 또 다른 예. 엑스레이를 찍으러 갔다가 병실로 돌아오는 길. 정신없는 병원 로비를 지나고, 영상의학과 직원의 지시에 따라 힘들게 휠체어에서 몸을 일으켜야 하는 일련의 상황을 아버지는 면접 과정으로 인식한 듯하다.


- (내 이름을 부르며) 방금 면접 본 거 말이야.

- 네.…..?

- 나 여기 취직하기 싫어.

- 그럼 취직하지 마세요. 괜찮아요.


그렇게 또 아버지를 안심시키며 대화는 일단락되고. 나는 아버지의 지난 세월과 그 시간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수반되었을 심리 상태를 막연히 짐작해볼 뿐이다. 젊은 시절의 꿈과 욕망, 고난을 관통하며 느꼈을 절망과 불안, 좋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 등에 대하여. 의식의 기능이 느슨해지면서 뚫고 나오는 무의식의 표지랄까.


그나마 이런 식의 대화를 (어느 정도의 맥락과 상황에 맞추어) 나눌 수 있는 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불면이 며칠째 지속되면서 섬망 증세가 악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는 이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으로 일관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환각 증상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고, 환시와 환청은 그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잠을 자야 했다. 불면은 섬망을 악화시킨다. 그러나 수면제 투여 후 섬망이 심해진 적이 있었기에 의료진은 수면안정제를 쓰는 것에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딜레마. 잠을 자면 아버지의 의식이 조금이나마 선명하게 되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수면제 때문에 섬망이 더 악화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 속에서. '잠이 든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 잠이 든다는 것


잠이 들고, 다시 ‘나’라는 동일성을 획득하며 깨어나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레비나스가 말하듯 “익명적 존재 속에 하나의 존재자(주체)가 자리잡기 위해서는 자기를 떠났다가 다시 자기에게로 회귀하는 일이 가능해야 한다. 즉 자기 동일성의 작업 자체가 가능해야 한다.” 의식이 늘 깨어 있다면, ‘깨어 있는’ 의식으로서의 자기 동일성을 획득할 방법이 없다. 오로지 의식은 잠이라는 망각 또는 무의식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 있어야만 ‘깨어 있는 것’으로서 자신이 동일함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의식은 잠을 자는 능력이다.” 잠은 의식, 즉 주체의 근본이 탄생하는 ‘자리’가 된다. 자리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사물로서의 의식은 잠을 ‘기반(base)’으로 삼아, 이를 디디고 서야만 비로소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의식이 된다. (...) 세계의 초월적 근거는 의식이며, 의식의 초월적 근거는 잠이다. 철학은 의식의 항구적인 각성상태라는 기반 위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의식의 사라짐과 되돌아옴의 기반인 잠으로부터 탄생했던 것이다.

- 서동욱, <일상의 모험>, 민음사, 2005, '잠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모리스 블랑쇼도 이야기했듯 “잠을 자는 것은 우리에게 낮을 약속해주는 명백한 행위이자, 우리의 깨어 있음을 달성하는 놀라운 행위”인 것이다.


사실 죽음에 가장 가까운 임사 체험은 잠이다. 우리는 매일 죽음,을 간접 체험하는 것인지도. 매일 죽음의 세계로 들어갔다가 삶의 세계로 돌아 나오는 반복을 통해 우리는 의식을 강화하고 자기 동일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죽음이라는 비지(非知)의 세계가 '거기-있음'을 감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전적 정의에도 '잠들다'라는 말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1) 잠을 자는 상태가 되다.

2) (비유적으로) 사물이 움직이지 않게 되다.

3) ‘죽다’를 완곡하게 이르는 말.      


아버지가 (1번의 의미에서) 잠들기를 바라면서도 (3번의 의미에서) 잠들지는 않기를 바라는 양가감정. 어찌 되었든 현재 아버지의 심신은 (2번의 의미에서)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이행되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또 하나 확실한 것은. 아버지가 나를 슬프게 한다는 것.


슬픔을 통해 사랑을 확인하는 것은 슬프다.


(2022-9-22 ~ 202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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