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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Sep 30. 2022

꺼져가는 촛불

촛불이라는 메타포

입원 20일 차. 호스피스 센터장인 담당 교수 K에게 물었다. 아버지의 상태에 대한 객관적인 입장을 듣고 싶다고. 우리의 대화는 (늘 그렇듯) 병동 복도에서 이루어졌다.


- K: 촛불이 꺼져가듯, 그렇게 생명이 천천히 소진되어간다고 보시면 됩니다. 

- 나: ......

- K: 급격한 변화가 올지, 서서히 꺼져가는 상태가 될지, 그건 우리로서도 알 수 없네요. 다하시는 날까지 최대한 편안하게 계시다 가실 수 있도록 돕는 것밖엔......

- 나: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고. 그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꺼져가는 촛불. 문득 이어령 선생의 말이 떠올랐다. 김지수 기자가 (암 선고 이후 생의 막바지에 이른) 이어령 교수와 나눈 인터뷰집 <마지막 수업>을 읽게 된 것은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고 곧이어 항암 불가 판정까지 받은 때였다. 삶과 죽음에 관한 인간 이어령의 육성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는 점에서 그의 여타 책들보다 좀 더 깊숙이 읽을 수 있었는데, 책의 끄트머리에 담긴 그의 말은 이런 것이었다.


"이건 비밀인데 말이지...... 지금껏 살아온 중에 제일 감각이 느리고 정서가 느린 게 지금이라네. 그게 진실이야. 죽음을 앞둔 늙은이가 절실한 시를 쓸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아. 하나님이 잘 만드셨어. 내가 지금 20대 30대의 감각으로 죽음을 겪고 있다면, 지금처럼 못 살아. 내 몸은 이미 불꽃이 타고 남은 재와 같다네."


- 김지수-이어령,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열림원, 2021, '마지막 선물' 중에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서서히 모든 감각이 둔화되어가는 아버지를 보면. 이어령의 말마따나 '인간이 생생하게 고통받을 것을 염려하여 감각조차 무디게 만든 신'에게 감사해야 할 일인지도. 아버지는 분노도 절망도 슬픔도 그리움도 아닌 어떤 '정적(靜的)'인 상태에 빠져 있다. 정적,이라기보다는 정체된,이라는 형용사가 더 어울릴까. 정체(停滯). 사물이 발전되거나 나아가지 못하고 한자리에 머물러 그치게 되다,라는 의미에서.


호스피스 입원 한 달째. 정확히 말하면 32일 차. 눈을 감고 누워 있던 아버지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 나아질 거면 더 나아지든가, 나빠질 거면 더 나빠지든가. 그대로 머물러 있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흔들리는 아버지를 본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감각만큼은 또렷이 느낀다는 아버지. 나는 담당 교수의 말을 떠올리며 <마지막 수업>의 마지막 문장들을 겹쳐 놓아본다.


"촛불도 마찬가지야. 촛불이 수직으로 타는 걸 본 적이 있나? 없어. 항상 좌우로 흔들려. 파도가 늘 움직이듯 촛불도 흔들린다네. 왜 흔들리겠나? 중심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야. (...) 촛불과 파도 앞에 서면 항상 삶과 죽음을 기억하게나. 수직의 중심점이 생이고 수평의 중심점이 죽음이라는 것을." (같은 책)


어쩌면 흔들리는 것은 ‘흔들리는 아버지’를 지켜보는 ‘나’인지도. 촛불,이라는 메타포에 흔들리는 또 다른 촛불로서.


(2022-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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