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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Sep 30. 2022

끝을 맞이하다

임종에 관하여

- 난 참 이상해. (아버지가 말한다.)

- 뭐가요? (내가 묻는다.)

- 내가 생각해도 내가 이상해. (아버지가 다시 말한다.)

- 그러니까 뭐가요? (내가 다시 묻는다.)


5월 초의 어느 날. 항암 불가 판정을 받은 후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불쑥 꺼낸 말이다.


- 처음에 암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말이야. 남들은 막 슬프고 절망스럽고 그렇다는데. 난 아무렇지도 않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아버지에게 나 역시 담담하게 말한다.


- 아빠가 좀 의연한 편이잖아요. 노심초사하고 안달복달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닥치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랄까. 초연하다고 해야 하나. 한때는 아빠의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적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런 것 같기도 하다'는 짧은 답변만 남긴 채 더 이상 말이 없었다.


# 해밀, 죽음의 장소

 

그로부터 4개월 후, 집에서 거의 일상에 가까운 생활을 해온 아버지는 서서히 상태가 나빠져 결국 호스피스에 입원하게 되었다. 호스피스 병동 복도에 놓인 2인용 소파에 나란히 앉은 우리.


- 죽음이 두렵다는 생각이 드세요?

- 아니. 그런 건 별로 없어. 지난 번에도 말했지만.


우리 부녀는 닮은 구석이 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아버지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딸이나.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아니’라고 답하는 아버지나. 공교롭게도 우리가 이야기를 나눈 소파 건너편은 임종실이다. 방문 앞에 적힌 이름을 바라본다. 해밀방. 따뜻하고 다정하다. 해밀,이라는 말은 ‘비 오고 맑게 개인 하늘’을 뜻한다. 나는 ‘비 오는 삶’과 ‘맑게 개인 사후’를 떠올린다. 탁한 이승과 맑은 저승이라니. 부질없는 이분법적 메타포. 그러나 임종실 이름을 ‘해밀’이라고 지은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군. 사후,라는 비지(非知)의 세계를 맑게 개인 하늘로 비유한 것이 아닌가.


그날은 입원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다소 컨디션이 좋아진 아버지는 복도에서 워커(환자용 보행기)에 의지해 살살 걷는 것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누우면 죽는 거야. 걷는 게 사는 거야. 평소 당신의 지론대로. 단 한두 바퀴를 돌더라도 걸을 땐 활기를 찾는 듯 보였다. 몇 바퀴를 돌고 복도 소파에 잠깐 앉았는데. 공교롭게도. 누군가 임종하고 난 직후였다. 침울하게 어수선한 분위기.


- 누가 갔나?

- 누군가 돌아가셨나봐요.

- 우리 옆방 사람인가?

- 모르겠어요.


잠시 침묵. 입속에서 말을 고르다 고작 바깥으로 나온 말이 ‘죽음이 두렵냐’라는 질문이었던 것. 아버지와 나누어온 그간의 대화 과정을 고려한다면, 나의 이 질문엔 ‘나는, 당신이, 다가오는 죽음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는 함의가 깔려 있다.


# 임종, 죽음을 대면하다


아버지는 가끔 도사 같은 말을 할 때가 있다. 어록을 남기고 싶을 정도. 예컨대. 호스피스 입원 전, 병원에서 처방해준 진통제를 가급적 먹지 않고 통증을 버티려는 아버지를 설득하려 들면. “죽음을 대면하려면 어느 정도의 고통은 견뎌야 하는 거야”라는 답변을 한다든가. "어차피 무(無)에서 온 것이니 다시 무로 돌아가는 것은 자연의 순리다"라는 말이라든가. 나는 ‘죽음을 대면하다’라는 아버지의 말에서 ‘대면하다’라는 말을 곰곰 생각해본다.


대면. 대면은 '마주봄'이다. 죽음을 마주보는 것. 임종(臨終)의 '임(臨)'자 역시 맞다, 임하다,라는 뜻인 만큼, 죽음을 대면한다,는 것은 임종,과 얼추 같은 의미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임종,이 수동적 뉘앙스를 풍긴다면, 죽음을 대면하다,는 말은 보다 능동적 의지가 깃들어 있는 듯하다.


#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죽음


'어느 누구도 타인에게서 그의 죽음을 빼앗을 수는 없다.' 물론 누군가가 '타인을 위해서 죽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언제나 '어떤 특정한 일에서' 타인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함을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누구를 위하여 죽음은 결코, 그로써 타인에게서 그의 죽음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현존재는 각기 죽음을 그때마다 스스로 자기 위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죽음은, 그것이 '있는' 한, 본질적으로 각기 그때마다 나의 죽음이다.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322쪽, 서동욱, <타자철학>, 반비, 166쪽에서 재인용)


하이데거에 의하면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을 뜻한다. 현존재의 끝으로서의 죽음. 그것은 단순한 종말이 아니라 "유한하게 실존한다"는 것을 일깨운다. 나의 본래적 존재 가능을 드러내주는 것은 오직 나의 죽음을 통해서라는 것. 죽음은 항상 '나의 죽음'인 것이다. 현존재의 죽음은 결코 타인에 의해서 대체될 수 없는 것. 나의 죽음은 나 자신만의 고유한 과제가 된다. 이 죽음의 각자성. 그러나. 과연 얼마나 많은 '죽어가는 존재자'가 자신의 죽음을 대면하며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끝까지 사유할 수 있을 것인가. 죽음이라는 한계에 의해 생겨나는 현존재의 존재 가능을 생각하며 죽어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죽음은 추상적이지만 죽어가는 것은 구체적이다. 나는 이 말을 여러 번 곱씹은 바 있다.


옆구리 통증이 그를 괴롭히는 정도가 점점 심해지더니 나중에는 잠시도 멈추질 않았으며, 입 안에서는 자꾸만 이상한 맛이 느껴지고 굉장히 역겨운 냄새가 나서 식욕이 떨어지고 기운도 빠졌다. 이제 더는 자신을 속일 수가 없었다. 무시무시하고 낯선 일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심각한 일이 이반 일리치의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아는 사람은 이반 일리치 한 사람뿐이었며, 주위 사람들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이 전과 다름없이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다른 무엇보다 이런 사실이 이반 일리치를 고통스럽게 했다.


-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순영 옮김, 문예출판사, 2016


"이반 일리치가 살아온 삶은 굉장히 단순하고 평범했으며 아주 끔찍하기도 했다." 소설 속 한 문장이다. 평범하고 안정된 삶을 영위하던 이반 일리치는 어느 날 불치의 병을 앓으며 죽음의 나락으로 추락한다. 육체적 고통만큼 끔찍한 것은 정신적 고통. 끊임없는 내적 갈등 속에서 그는 어느 날 영혼의 목소리를 듣는다. "네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이반 일리치는 답한다. "고통받지 않는 것. 그리고 사는 것." 영혼의 목소리는 다시 묻는다. "사는 거라고? 어떻게 말이냐?"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산을 오르고 있다고 생각하며 걸었지만 사실은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만약 그것이 '사는 것'이라면,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죽음을 기다리는 절망감과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사이를 오가며 이반 일리치는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을 실감한다.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그는 '자신의 삶이 잘못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에 맞추어 살아온 삶 전체가 거짓과 기만일 수도 있다는 생각. 부정과 분노와 절망으로 점철된 시간을 지나 이반 일리치는 '올바른 것'에 대해 자문한다. 눈을 감기 한 시간 전 마지막 성찰의 순간이 온다.


그 순간 이반 일리치는 구멍 속으로 떨어지면서 한 줄기 빛을 보았다. 그리고 비록 자신의 삶이 완전하지 못했다 해도 아직은 바로잡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올바른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침묵하며 귀를 기울였다. (...) 이 모든 고통에서 가족을 구해내고 자신도 벗어나야 했다. 그는 생각했다. '얼마나 근사하고 또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 '그런데 죽음은? 죽음은 어디 있지?' 이제는 습관처럼 익숙해져버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죽음은 어디 있는 거야? 대체 죽음이 뭐지? 죽음이 없었으므로 죽음에 대한 공포도 전혀 없었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갑자기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기쁠 수가!" 이 모든 일은 한순간에 일어났으며, 이 한순간의 의미는 이제 변하지 않았다. (...) "다 끝났습니다!" 누군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반 일리치는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 이반 일리치는 숨을 훅 들이마시다가 그대로 멈추더니 몸을 축 늘어뜨리며 숨을 거두었다. (같은 책, 마지막 부분)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인 인간. 죽음은 단순한 객관적 '끝'이 아니다. "끝났다"라고 '나의 죽음'을 선언하는 타인은 '죽어감의 주체'인 '나'가 경험하는 그 '끝', 다시 말해 '나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입회'할 뿐이다. 현존재의 가장 극단적인 존재 가능성으로서의 죽음. '죽는다'라는 말은 이렇듯 '유한하게 실존한다'라는 말과 맞닿아 있다. 죽음을 ‘대면한다’는 것, 즉 '마주본다'는 것은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 아닐까.


# 당하는 죽음에서 맞이하는 죽음으로


대학 시절, 죽음과 종교에 관심이 많았던 내게 최준식 교수의 ‘한국학’ 강의는 무척 흥미로운 것이었다. 한국 고유의 문화와 종교를 통해 종교학에 눈뜨게 해준 것도 그이다. 그의 최근 행보를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그는 아예 '죽음학' 연구의 선구자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한국죽음학회'를 발족하고, 학회의 표어로 "당하는 죽음에서 맞이하는 죽음으로"를 내세웠다고 한다. 죽음을 수동적으로 맞지 말고 보다 능동적으로 대하자는 의도라고.


최준식 교수의 <죽음 가이드북>에는 죽음학의 세계적인 권위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에 대한 소개가 나온다.


스위스 태생의 정신과 의사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1926-2004)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적인 죽음학자입니다. 대표 저서 <On Death and Dying(죽음과 죽어감에 대하여)>에서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는 단계를 5단계(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로 나눈 것은 고전 이론처럼 되었습니다.


- 최준식, <죽음 가이드북>, 서울셀렉션, 2019, '난 은하수로 춤추러 갈 거예요' 중에서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인생의 마지막 성장 기회'라고 말했다. 저자는 故이병철 회장이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 한 카톨릭 사제에게 던진 마지막 24가지 질문을 예로 들며 "인생의 마지막에 가장 중요한 문제를 탐구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요령 있게 마무리하려고 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 임종 때조차 이런 의문을 품는 사람은 희귀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중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영혼이란 무엇인가",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종교란 무엇인가"와 같은 것들이다. (출처: <잊혀진 질문>, 차동엽, 명진출판, 2012, 최준식, <죽음 가이드북>에서 재인용)


죽음이라는 경계에서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인생의 마지막 성장 기회’로 간주한다는 것이 과연 ‘죽어가는 자’에게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이는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자신의 철학적 분석의 예로 든 하이데거의 사유와도 맥락을 같이한다.


이반 일리치에게 비본래적인 삶과 세계의 자명성이 붕괴되고 그가 이러한 삶과 세계의 공허함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한계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을 통해서였다. 죽음은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자명성을  파괴하고 그 어떤 일상적인 세상의 가치로도 환원될 수 없는 독자적인 자기로 우리를 직면케 하는 힘을 갖는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죽음 앞에서 도피한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자신의 심연적인 근거를 직시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 죽음에 직면해서 이반 일리치는 전혀 다르게 죽음을 경험한다. 그는 삶의 막바지에서 죽음을 자신의 삶 전체를 뒤흔들면서 자신의 본래적인 가능성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일상적인 가능성들에 계속해서 집착할 것인지 결단하도록 촉구하는 사건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 박찬국,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읽기>, 제2장 ‘현존재와 시간성’ 중에서.


죽음을 대면한다는 것. 끝을 맞이한다는 것. 과연 나라면. 나는 나의 끝을 온전히 맞이할 수 있을까? 온전히 맞이할 수 있는, 결단할 수 있는 이성을 끝까지 붙잡고 있을 수 있을까?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나조차도. 그렇다면 지금 내가   있는 것이라곤. ‘라는 존재의 종말을 경험하는 극단적 사건에 대해 모종의 태도를 취할  있을 . 그것은 ‘ 고지하는 안녕(Goodbye) 아니라, 다가오는 것을 맞이하는 안녕(Hello / Bonjour)  것이다.


죽음이여, 안녕.


(202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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