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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Sep 14. 2022

밤 6시와 엉덩이

타인의 고통과 슬픔 혹은 나의 고통과 슬픔 

호스피스 입원 6일차 되는 날. 오전 9시 반경. 옆 침상은 퇴원 준비로 한창 바쁘고. 누군가는 병실을 나가고 누군가는 병실에 들어온다. 인 앤 아웃. 나는 무대를 떠올린다. ‘죽음의 무대’ 위에 함께 올라서서 ‘구체적 죽어감’을 관조하는 화자. 그게 현재 나의 포지션이 아닌가.


응급실에서 막 들어온 환자. 침상에 누워 있는 젊은 남자의 두 눈동자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있고. 오랜 기간 앓은 흔적이 역력하다. 침상 뒤를 따라온 보호자를 바라본다.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환자의 아내로 보이는 그녀는 엄청나게 큰 배낭을 양 어깨에 멘 채 속수무책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 간호사들이 환자를 안정시키고 여러 가지 의료 조치를 취하는 동안 남자는 계속 부르짖는다.


- 밤 6시에! 엉덩이! 밤 6시! 밤 6시에! 밤 6시! 엉덩이! 엉덩이!


이 기묘한 단어의 조합이 계속 귓속을 파고든다. 저녁 여섯 시도 아니고 새벽 여섯 시도 아닌 밤 여섯 시. 그리고 엉덩이. 그 어떤 인과관계를 상상하기 어려운 단어의 병치. 어떤 조사 혹은 어떤 단어를 채워 넣어야 의미를 가늠할 수 있을까. 그에게 밤 여섯 시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밤 여섯 시에 그에겐 어떤 일이 있었을까. 엉덩이는 밤 여섯 시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 아야. 아야.

- 어디가 아프세요?

- 엉덩이.


아, 엉덩이는 지금 현재 그를 괴롭히는 극도의 고통을 의미하는 거구나.


- 욕창이 굉장히 심한데요. 곧 뼈가 나올 것 같아요.


커튼 너머로 들려오는 간호사의 목소리. 아, 엉덩이는 욕창 때문이구나. 뼈가 드러날 정도로 괴사된 엉덩이. 타인의 고통. 타인의 고통. 나는 ‘타인의 고통’이라는 단어의 조합에 다시 사로잡힌다.


- 욕창 때문에 힘들어하시는 거죠. (간호사가 묻는다)

- 네. (아내가 답한다)

- 전신인가요.

- 네, 전신이요.


엉덩이뿐 아니라 전신이라니. 타인의 고통. 타인의 고통. 두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이 내게 전해지는 방식은 이미지와 상상에 의해 희미하게만 이루어질 뿐이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관음증적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는 (이미지화된) 타인의 고통을 비판적으로 지적한 바 있다. 타인의 고통을 전시하는 매체(사진 혹은 영상)의 스펙터클화를 겨냥한 것. 그렇다면 그 어떤 매개도 없이, 이렇게, 바로 옆에서, 죽어가는 자의 고통을 엿보고 들을 수밖에 없는 나의 감정은 어떻게 추스를 수 있을까. 단순히 ‘연민’으로 환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일까.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 이재원 옮김, 이후, 2004, 153쪽

 

내가 느끼는 이 기묘한 감정은 연민일 수도, 무력감일 수도, 무고하다는 감각일 수도, 안도일 수도, 뻔뻔함일 수도 있다는 것. 만약 뻔뻔함에 가까운 성질의 것이 있다면. 밤 여섯 시에 관한 호기심일지도 모른다. 밤 여섯 시를 부르짖는, 죽어가는 자의, 드러나지 않는 서사를 궁금해하는 것이야말로 ‘타인의 고통’ 앞에 선 나의 뻔뻔함이리라.


그렇게. 밤 여섯 시,와 엉덩이,를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반복해 외치던 그는 병실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임종실로 옮겨졌고. 곧 임종했다.


그와 아내가 나눈 (거의 마지막일지 모를) 대화를 옮겨 적는 나의 뻔뻔함을 그들은 용서해줄까. 며칠간 제대로 먹지 못했다는 아내의 말에 옆 침상 보호자가 공용 냉장고를 뒤져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피자 한 조각을 그녀에게 건넨다. 잠시도 환자 곁을 비울 수 없는 처지였던 그녀가 보호자용 간이 침대 위에 걸터앉아 피자를 먹으려 한다. 


- 피자! 피자! (남편이 외친다.)

- 응, 피자야. (아내가 답한다.)

- 피자! 피자! 

- 응, 그렇구나. 피자가 먹고 싶구나. 내가 의사 선생님한테 먹을 수 있는지 여쭤볼게. 


부드럽게 남편을 어르는 듯한 그녀의 어조에서 내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슬픔'밖에 남아 있지 않다. 아니, '슬픔'이라는 추상적 단어로 환원될 수 없는 그 무엇. 나는 그 무엇을 '슬픔'이라고밖에 표현하지 못한다. 타인의 슬픔(으로 추정되는 복잡다단한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남편은 피자,라는 단어를 두 번에 걸쳐 외쳤을 뿐이고, 아내는 그 외침을 두 개의 맥락으로 받아냈다. 동일한 반복과, 차이 나는 통역. 전자의 답변이 단순한 긍정이라면(이것은 피자가 맞다), 후자의 답변은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담고 있다. 발화자의 희망을 읽어내는 동시에(당신은 피자가 먹고 싶다), 그 희망을 배제하지 않은 채(당신이 피자를 먹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겠다) 부정(당신은 피자를 먹을 수 없다)을 은폐한다. 슬픈 거짓말. 


슬픈 거짓말. 두 단어의 조합을 가만 들여다본다. '거짓말'은 객관적 사실이지만, '슬픈'은 나의 감정이 투사된 주관적 형용사에 불과한 것 아닌가. 아내의 몇 마디 말이 분사하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나는 '슬픔'으로 환원할 수 있는가? 그 정동(情動)을 언어로 담아내려는 나의 시도는 가능한 것인가? 반성한다. 


그렇다면 나는 슬픈가? 슬픈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나'일지도. 거짓말,이라는 단어 앞에 놓일 수 있는 단어는 '슬픈'이라는 형용사밖에 없는가? 반성한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타인의 고통,과 타인의 슬픔,을 동시에 목도하는 자의 감정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가능한 일인가? 반성한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은 나의 고통과 슬픔으로 이어진다는 감각. 그 '연결'의 감각이 삿된 것은 아닌지 새삼 반성하기 위해 나는 이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마무리지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밤 6시'라는 단어를 끝내 수수께끼로 남긴 채. 그렇게. 여전히 뻔뻔한 채로. 


(202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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