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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Oct 11. 2022

죽음과 아버지

아버지와 글쓰기

- 언젠가 나에 대한 이야기를 써줘.


엄마는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 응, 언젠가.


나는 으레 이렇게 답하곤 했다.


그래서일까. 언젠가 가족에 대해 쓰게 된다면 그건 두말할 것 없이 엄마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언젠가’는 실현되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가신 직후에도, 돌아가신 지 15년이 된 지금도.


이제는 안다. ‘언젠가’는 없다는 것을. 막연한 미래를 겨냥한 ‘언젠가’라면 더더욱.


그렇다면 나는 엄마에 대해 어떤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 에르노가 <한 여자>에서 어머니에 대해 쓰는 자신의 글이 “전기도, 소설도 아닌, 문학과 사회학, 그리고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일 것이라고 말한, 그런 글을 쓰고 싶었던 것 같다.


# 아버지의 죽음, 아버지와 죽음


2022년 4월, 아버지는 말기암 진단을 받았다. 어느 날 느닷없이 밀어닥친 죽음의 선고. 드라마나 영화, 무수한 문학 작품에서 셀 수 없이 반복되는 흔한 이야기가 내 삶의 한가운데로 밀려들어온 셈이다. 나는 불현듯 무언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죽음’은 어린 시절부터 나를 붙잡아온 오랜 주제였고, ‘아버지’는 (누구나 그렇듯) 애증의 대상이자 한사코 거부해온 (나중엔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나의 정신적 닮은꼴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처럼, 전기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문학과 사회학 그리고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한 남자’에 대해 쓰겠다는 야심을 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역량 밖의 일이다. 아니 에르노는 그 ‘한 남자’, 즉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남자의 자리>라는 흥미로운 작품을 썼지만. 나는 아니 에르노가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쓰려던 것이었을까. ‘아버지의 죽음’에서, 혹은 ‘아버지와 죽음’에서, 무엇을 쓰고자 목적한 것일까.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한스 발둥이나 뭉크, 에곤 실레와 같은 화가들에 의해 형상화된 모티프인 ‘죽음과 소녀’처럼, 슈베르트에 의해 음악으로 재창조된 현악4중주 ‘죽음과 소녀’처럼, ‘죽음’이라는 단어와 ‘아버지’라는 단어를 나란히 세워놓고 이 둘의 병치가 가져오는 모종의 효과를 물끄러미 관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죽음. 혹은 죽음과 아버지. 그 효과가 나로 하여금 어떤 것을 쓰게 만드는지 되어가는 대로 지켜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나는 쓰면서 납득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일단 써야 했다. 언젠가,라는 말을 믿지 않기에. 닥치는 상황을 (일정한 거리두기를 통해) 관조할 만한 여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닥치는 상황을 닥치는 대로 기록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 보였다. 아니, 정확해지자. 나는 죽어가는 아버지를 견디기 위한 방식의 일환으로 ‘뭐라도 쓰기’를 택한 것이다.


# 아버지와 글쓰기


구실은 또 있었다. 아버지를 빌미로 한 글쓰기.


아버지의 마지막 나날을 담아두려는 일환으로 나는 틈틈이 (아버지 몰래) 그와의 대화를 녹음하곤 했다. 무더웠던 어느 날,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아버지는 두 가지를 말했다. 법조인이 되지 못한 것, 그리고 글쓰기. 법대를 가고 싶었지만 주위 환경으로 인해 원치 않은 전공 과목을 택했다는 것은 익숙한 이야기였다. 의외는 글쓰기. 아버지가 한때 작가를 꿈꾸는 문학 청년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장 후회되는 것 중의 하나가 글쓰기에 관한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 무엇을 쓰고 싶었는데요?

- 소설.

- 어떤 소설?

-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나는 아버지가 실제로 소설을 써보았는지 궁금해졌다.


- 소설 써본 적 있어요?

- 있지.

- 정말? 어떤 소설?

- 쇼펜하우어에 감화받아서 쓴, 뭐 그런… 그 사람이 쓴 대표적인 철학책 있잖아… 뭐더라…?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응, 그거.


쇼펜하우어라면 아버지의 스타일과 통하는 구석이 있다. 냉소적이지만 염세주의로만 흐르지는 않는. 그리고 어딘가 불교적인 사유. 아버지는 키에르케고르도 탐독했다고 한다.


# 즐김으로서의 글쓰기


섬망이 오기 전, 의식이 또렷할 때 아버지가 내게 해준 마지막 (유의미한) 말은 이런 것이었다.


- 계속 도전하고, 그 과정을 즐겨.


계속 무언가를 쓰고 도전해보는 것. 그 과정을 즐기는 것. ‘즐거움(plaisir 플레지르)으로서의 글쓰기’보다 ‘즐김(jouissance 주이상스)으로서의 글쓰기’를 지향하는 나의 성향을 아버지는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에 대해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이 기록들이 꼭 ‘아버지에 대한 것만은 아닌’ 글이 될 것이라고 나는 어렴풋이 짐작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잡문이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와 죽음이라는 화두를 놓고 어쩌면 나는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를 염두에 두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간병 일기도, 호스피스 일지도 아닌, 아버지와 죽음에 대한 잡다한 기록과 두서없는 단상들이 또 다른 잡문 더미로 남았다. 아버지의 상태, 아버지의 말들, 아버지와의 대화,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떠오르거나 불려온 생각들은 문학, 철학, 영화, 예술 등에서 자양분을 얻은 것이다. 자양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관련 텍스트로 되돌아가는 작업은 어느 정도의 시간과 집중을 요구했다. 병원에서 틈틈이 혹은 교대 후 짬을 내어 무언가를 쓰는 작업은 우울한 상황 속에서 나를 버티게 해주었다. 아버지의 말대로 나는 ‘고된 즐김’을 실천하고 있었는지도.


한 남자의 자전(autobiography)도 타전(biography)도 아닌 모호한 글들.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처럼 탁월한 자기기술지는 더더욱 아닌. 오혜진 문학평론가가 (평전과 인터뷰를 서술하는) 디디에 에리봉의 스타일을 가리켜, “타자의 삶을 서술하는 ‘평전’에서조차 그는 ‘신뢰할 만한 서술자’가 되기보다는, 자기도취적이고 유머러스한 자신을 드러내는 데 더 소질 있어 보였다”고 말한 것처럼, 나는 아버지를 빌미로 ‘나’에 관한 무엇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까.


아버지의 뜻이기도 하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모르는 대로, 되어가는 대로 쌓인 기록이 뜻밖의 구성과 우연한 순서에 기대어 기묘한 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없었다고는 볼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아버지는 암 판정을 받은 지 정확히 6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8월 말에서 9월 초가 고비가 될 것 같다고 스스로 예견한 것과는 달리. 항암을 받지 않으면 여명이 3.5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한 주치의의 예상과는 달리.

 

- 여기 모은 글들은 2022년 4월에서 2022년 10월까지 6개월간 기록한 메모와 노트를 바탕으로 구성한 것이다. 순서상 봄과 여름(4월~8월)이 먼저 와야 할 것이지만, 호스피스에 입원한 가을(8월 말~10월)의 기록을 먼저 두고, 입원 전 집에 머무는 동안의 봄-여름 기간을 나중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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