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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Sep 27. 2022

죽고 싶지만 된장국이 먹고 싶어

이성적 죽음과 코나투스

식욕이 문제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나는 틈틈이 울고 틈틈이 먹었다. 빈소에서, 화장터에서, 혹은 장지에서.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때론, 까무러칠 정도로 울고, 허겁지겁 밥을 밀어넣었다. 산 사람은 살게 마련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다. 그 어떤 슬픔도 식욕 앞에서는 잠시 주춤하게 마련이다. 입관의 과정을 지켜보며 목 놓아 울다가도 뜨끈한 육개장에 밥을 말아 꾸역꾸역 먹는 것. 거 참, 이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구나.


한때 (예상치 못한) 베스트셀러였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의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죽고 싶을 만큼 우울하지만, 동시에 매콤한 떡볶이를 먹고 싶다는 욕구. 죽음 충동과 삶의 본능이 동시에 공존하는 인간의 몸이야말로 이율배반의 장소 아닌가.


# 곡기를 끊는 것 vs. 맛을 보는 것


- 아무래도 곡기를 끊어야겠어.


점점 더 먹지 못하고 몸이 힘들어지는 상태가 되자 아버지가 내뱉듯 한 말이다. 몸무게는 50kg까지 빠진 상태. 평소 '자발적으로 곡기를 끊고 죽음을 맞이하는 수도승’의 사례를 간혹 이야기했던 아버지이기에, 역시 놀랍지는 않았지만, 이미 곡기가 거의 들어가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던 만큼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들리기도 했다. 아버지와 같은 노인에게 ‘곡기’란 곧 ‘밥심(쌀밥 식사)’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아버지는 말하곤 했다. 사람은 밥심으로 사는 거야.


- 이미 곡기가 끊어진 상태나 마찬가지예요.


나는 이렇게밖에 답하지 못했다. 식사를 전혀 못하고 한 끼에 간신히 뉴케어(환자식 음료) 한 팩을 마실 뿐이었으니, 아버지가 평소 말하던 ‘곡기’가 끊어진 지는 꽤 된 셈이었다.


-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잖아.


아버지가 힘 없이 말한다. 물론 알고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곡기를 끊다’라는 말은 아무 음식(=영양성분)도 섭취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아버지의 두 마디를 통역하면 이런 말이 될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스스로 곡기를 끊어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수도승처럼,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죽음을 앞당기고 싶다,는 뜻.


평소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입장을 견지했던 아버지였지만, 그 ‘연명’의 범위에 ‘강제로 영양을 주입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줄은 몰랐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얼마 뒤 아버지는 ‘장폐색’으로 급하게 호스피스에 입원하게 되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아버지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물조차 마실 수 없게 되었다. 견디기 힘들 만큼 입 속이 건조해지면 잘게 부순 얼음 한두 조각을 물고 있는 것만 겨우 허락되었다. 24시간 영양제와 진통제 줄을 꽂고 있는 아버지는 그나마 소변줄을 꽂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 이율배반, 죽고 싶지만 된장국이 먹고 싶어


동생이 교대로 병원에 있던 날, 아버지는 지나가는 말처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그냥… 그거 신청해서 가고 싶어.


그거,는 안락사,를 의미하는 것일 터였다. 입원 전, 집에서 내게 말한 이후 처음 꺼내는 말이기도 했다. 이렇게 사는 것은 의미 없다,는 심적 토로일 것이고.


그러나. 동생이 상주하던 또 다른 날. 천천히 워커에 의지해 복도를 돌던 아버지는 타 병실 앞에 놓인 환자 식판에서 된장국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한다.


- 된장국이 먹고 싶어.


아버지의 말에 동생은 ‘먹을 수 없음’을 상기시켰지만, 오전 회진을 도는 의사에게 아버지는 다시 한번 분명하게 말했다고 한다.


- 선생님, 된장국이 먹고 싶어요.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아버지가 있는 이곳 호스피스는 다른 곳에 비해 유난히 ‘환자 중심적’이다. 환자가 원하는 것은 가급적 들어주려고 애쓰는 것. 의료진에게 ‘된장국’은 환자의 위시 리스트 중 하나로 바로 접수되었고. 의학적으로 무리가 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된장국’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이 모색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단계는 맑은 유동식을 시도해보는 것.


# 천국의 맛


구토 가능성을 전제하고 의사가 ‘노엔피오’라는 환자용 맑은 음료를 처방해주었다. 포카리스웨트의 병원 버전이라고나 할까. 살짝 맛을 보니 배즙에 가까운 맛. 장폐색엔 금식이 기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수간호사를 찾았고, 그녀의 조곤조곤한 설명은 내게 모종의 깨달음을 주었다. 보호자의 염려(구토에 대한)도 이해하지만, ‘먹는다’는 행위, 먹음으로써 입 안에서 ‘맛을 느끼는’ 감각은 환자에게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 그 감각을 상실할 때 환자는 크나큰 절망감에 빠진다는 것.


캔에 박힌 음료의 이름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노엔피오(NO-NPO). NPO는 Nothing Per Oral, 즉 금식을 의미한다. 노엔피오는 말 그대로 No-금식, 금식을 하지 않는다,라는 뜻. 노엔피오를 컵에 따라 숟가락으로 조금 떠서 아버지 입에 넣어드린다. 얼음 조각에만 의지해온 아버지의 혀가 20일 만에 ‘맛’을 느낀다. 그것도 ‘단 맛’을. 그 순간. 아버지의 표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희열과 황홀과 행복과 서글픔이 복합된 표정. 아버지가 남긴 한 마디는 다음과 같다.


- 천국 같아.


아무것도 먹을 수 없다,는 절망감은 그토록 큰 것이었구나. 맛을 느낀다,는 쾌감은 그토록 큰 것이었구나. 나는 단지 보호자로서 아버지의 몸에 영양제와 수액이 계속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에만 안도했던 것이구나. 의학적 판단에만 기대어 아버지에게 오로지 안전한 옵션만을 강조해왔던 것이구나. What a wake-up call!


단맛과의 조우,를 생각하자,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피아니스트>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유대계 피아니스트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애드리언 브로디 분)은 나치를 피해 천신만고 끝에 살아 남지만, 어느 폐가에서 먹을 것을 찾던 중 한 독일인 장교와 마주친다. 장교의 요청으로 스필만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오랜 굶주림과 추위로 쇠약해진 스필만이 더럽고 곱은 손으로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주하는 장면은 이를 감상하는 독일인 장교의 복잡다단한 표정과 더불어 강렬한 감응을 불러일으킨다.)


다락방에 숨어 있는 스필만을 위해 독일인 장교는 빵과 잼이 들어 있는 꾸러미를 건네주고 떠난다. 손가락으로 잼을 찍어 입 속에 넣고 맛을 느끼는 스필만. 그때 스필만이 지은 표정과 아버지의 표정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천국에 온 듯한, 천국의 맛을 느낀 표정.


# 니체의 ‘자연적 죽음’과 ‘이성적(합리적) 죽음’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요구된 작업을 달성한 후에 기계를 꺼버리는 것이 합리적인 것인지, 아니면 기계가 스스로 멈출 때까지, 즉 못쓰게 될 때까지 움직이게 두는 것이 합리적인 것인지' 물음으로써 '합리적인 죽음'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나는 비자유의지적(자연적)인 죽음과 자유의지적(합리적)인 죽음을 말하고 있다. 자연사는 모든 이성으로부터 독립한 죽음, 참으로 '비이성적인' 죽음이며...


- 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 '제2장 방랑자와 그 그림자', 185 중에서 (강두식 옮김, 동서문화사, 2007)


니체가 말한 ‘자연적 죽음(자연사)’이 '비이성적 죽음'으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이성적 죽음’은 ‘자살’이나 ‘안락사’와 같은 예민한 문제를 건드리기도 한다. 니체가 겨냥한 ‘자연적 죽음’은 이성적 의식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자기통제가 불가능한 육체만을 무기력하게 작동시키도록 방치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관점일 것이다. 기계가 다했다는 것,은 유기체로서 인간의 몸이 그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는 의미보다는, 그 몸을 자기 통제권에 두지 못하는 이성의 상실을 의미하는 쪽이 더 크지 않을까.


아버지가 처음 안락사 이야기를 꺼냈을 때, 당신이 직접 알아보기도 했다는 말을 전했을 때, 나는 우리나라에선 아직 불법이다,라는 건조한 답변만 했을 뿐이다.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말은 이런 것이었다.


- 너희들도 힘들고……

 

너희들도 힘들고. 바로 이 말. 하이데거 식으로 말한다면 ‘실존적 인간으로서 죽음을 결단하고 죽음에로 앞서 달려가는,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 아버지를 바라보았던 나의 시각은 이 말 한마디로 흔들렸다. 아버지 스스로의 의지보다는 ‘우리들(주변의 타인들)이 힘들까봐’라는 이유를 첨언했다는 것. 타인의 사정을 헤아린다는 것은 타인의 사정을 헤아리는 자신의 마음도 헤아려 달라는 뜻 아닐까. 죽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지만, 그것이 꼭 (순수하게 혹은 반드시) 죽겠다는 의지만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노인들이 흔히 말하는 ‘늙으면 죽어야지’라는 표현과 다를 바 없는 것인지도.


# 코나투스의 이면


실존적 죽음 혹은 이성적 죽음을 원하지만 동시에 음식을 맛보고 싶은 본능적 욕구 앞에서 괴로워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문득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 개념을 떠올린다.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기 보존'으로서의 코나투스 원칙은 '이성적 죽음'을 배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은 자기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음식을 거부하거나 자신을 죽이는 일이 없다. (......) 인간이 자기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존재하지 않고자 노력한다거나 다른 형상으로 변하고자 노력한다는 것은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있다는 말만큼이나 불가능한 이야기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성의 지도에 따라 인간이 두 가지 악 중 더 작은 악을 선으로서 간주할 수 있다"는 말도 남겼다. 자유인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이성적 완전성을 영원히 상실하는 더 큰 악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판단된다면 그는 그것을 선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더 작은 악(을 받아들임)으로써 더 큰 악을 피하는" 선택은 '더 나은 대안이 전혀 없어서 이성의 관점에서 최선으로 보이는 것을 선택하는 경우'일 수도 있는 것이다.


<Think Least of Death>의 저자 스티븐 내들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스피노자의 논리에 근거하여 이성이 자신의 존재 지속을 끝내라고 조언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에티카>를 통틀어 가장 감명 깊고 인상적인 정리 중 하나인 "자유인은 죽음에 대해 가장 적게 생각하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고찰에 있다"라는 명제와도 아주 잘 들어맞는다. 자유인이 자신의 이성적 덕을 보존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고려할 때, 그의 정신을 차지하는 것은 실제로 목전에 닥친 죽음이나 세속에서의 존재가 끝난다는 생각이 아니다. 사실 그는 죽음에 대해 가능한 한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 대신 자신의 형상적 본질을 이루는 뛰어난 코나투스와 자신의 덕을 이루는 이성적 인식에 주목한다.


- 스티븐 내들러, <죽음은 최소한으로 생각하라>, 연아람 옮김, 민음사, 2022, 247-248쪽 중에서


곡기를 끊다,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본다. 이 엄청난 의지. 본능을 거스르는, 불가능에 가까운 시도. 시누이의 시어머니가 그랬다고 했다. 모든 주변을 정리하고, 스스로 요양원으로 들어가, 마지막 나날엔 스스로 곡기를 끊고 돌아가셨다는 그분. 생전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분의 빈소에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하이데거가 이렇게 죽을 수 있었을까, 니체가 이렇게 죽을 수 있었을까. (물론 하이데거는 심장마비로, 니체는 정신병으로 죽었으니, 둘 다 '실존적 죽음의 결단'이나 '이성적 죽음'과 같은 철학적 개념을 몸소 실천할 수 있는 기회는 상실했다고 보아야 하겠지만.)


이성적 죽음에 대한 사유와 자기 보존의 욕구 사이에서 흔들리는 존재가 인간이라면. 아버지는 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내게 그 생생한 흔들림을 보여준 셈이다. "곡기를 끊어야겠어" 그리고 "된장국이 먹고 싶어"라는 단 두 마디로.


(2022-8-21 ~ 2022-9-26)


"일체의 모든 법은 먹는 행위로 인하여 존재하며 음식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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