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대만으로 : 한 해의 마지막 날에
며칠 전, 거의 모든 짐을 싸서 대만으로 부쳤다. 가구와 전자제품이 딸린 집에 들어와 살다 보니 내 것이랄 만한 것이 거의 없다. 펼쳐놓고 보니 짐이랄 만한 것은 책과 옷가지가 대부분이다. 새로 이사할 집의 천고가 낮아 (그나마 유일하게 우리 것이라 할 수 있는 가구인) 책장 8개마저 눈물을 머금고 한국의 창고로 보내야만 했다. 우리 것이랄 만한 전자제품이라고 해봐야 고작 헤어 드라이어, 전동칫솔, 프린터, 그리고 작은 오디오가 전부이다. 그나마 전압이 맞지 않아 이마저도 포기하게 생겼다.
어쩌면 떠돌이 생활, 또 어쩌면 간소하고 단출하게 사는 유목민의 생활이 싫지만은 않다. 그나마 별 거 없는 세간살이인데도 끄집어내어 정리하자고 드니 꾸역꾸역 버릴 것이 나온다. 혹시나 하고 놔두었던 것은 역시나 하고 버리게 되는 것들이다. 제때 버리지 못한 물건들은 유예기간을 거쳐 다소 불손한 이미지마저 풍긴다. 청하지 않았으나 굴러들어온 적잖은 불청객들을 처리하느라 나는 몇 날 며칠을 단순노동으로 보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노동이라고 짐을 부친 다음날부터 정신을 못 차리고 아팠다. 감기 몸살. 지난 한 달 남짓 분주하고 변칙적인 일정으로 일상의 리듬이 교란되어서일 것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침대를 둘러메고 종일 누워 있으니 저녁 무렵 아이가 머리맡에 서서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본다. 제 딴엔 걱정이 되었는지 이마도 짚어주고 다리도 눌러주며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하루 종일 잤는데 밤에 어떻게 또 자요?”
“그러게 말이다. 약 먹고 누워 있으면 또 잠이 오겠지.”
“내 방법을 알려줄까요? 엄마가 자라고 하는데 잠이 안 올 때 이 방법을 써요. 그럼 잠이 와요.”
“후후, 그래? 그게 뭔데? 엄마도 알려줘.” 나는 힘 없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My Favorite Things를 생각하면 돼요.” (아이는 요즘 영화 <Sound Of Music>에 단단히 꽂힌 상태이다.)
“예를 들면?” 나는 자꾸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물었다.
“걷기라든가, 달리기, 아니면 친구들이랑 축구 하며 노는 거, 그리고 내가 골을 넣는 장면을 상상하는 거예요. 테니스 치는 것도 생각하구요, 내가 페더러나 조코비치하고 게임을 해서 이기는 장면도 상상하고…….”
“이야, 그거 참 좋은 방법이네. 엄마도 오늘 해봐야겠다.”
의기양양해진 아이는 오지랖을 넓힌다.
“그러니까, 엄마는 커피를 좋아하니까, 커피를 마시는 장면이라든가, 책을 좋아하니까 책을 읽는 거 뭐 그런 거를 상상해봐요.”
나는 아이가 사랑스러워 눈물이 다 나올 뻔했다. 네가 나보다 낫구나.
남편도 아이도 다 잠들고, 종일 약 기운에 취해 있던 나는 왠지 정신이 맑아졌다. 정말이지 아이 말 덕분인가. 삭신은 여전히 쑤시고 목구멍은 따가운데도 나는 기어코 몸을 일으켜 휘적휘적 부엌으로 나왔다. 허기진 위장을 느끼며, 문득, 오래도록 푹 끓인 맑은 쇠고기뭇국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 11시가 가까운 시간에 냉장고에 남아 있던 무를 썰고 고기를 해동시켜 양념을 해댄다. 부엌 한 켠 의자에 앉아 노트북도 꺼낸다. 일단 (먹고 싶은지도 모르는) 뭇국을 불 위에 앉혀 끓여내고 있으니, 다음으로 (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말들을 되는 대로 앉혀 보고 싶어졌달까.
한 해가 가고 또 다른 한 해를 맞이하는 것에 무덤덤해진 지 오래다. 그럼에도 12월 31일에는 혹은 1월 1일에는 으레 무언가를 적기 (혹은 적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기) 마련인데, 올해엔 아이 덕에 단순하고 명료해졌다.
새해엔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사람 사는 데야 어디든 비슷할 테고, 낯선 곳에서도 익숙한 고민은 여전히 이어질 것이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나의 성향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새로운 풍경과 새로운 일상에도 기꺼이 설레고 기쁠 수 있기를.
아이 말마따나, 따사로운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서, 커피를 마시며, 무언가를 읽거나 쓰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지난 한 달간 나는 이 단순한 것을 하지 못해 다소 황량해졌던 게 틀림없다. 이렇게 '~인 게 틀림없다'고 쓰고 보니, 몸이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다.
새해엔, My Favorite Things를 누리는 삶. 이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