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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l 18. 2024

살 것만 같던 마음

이영광의 시 ‘어두운 마음’에 부쳐

모르는 어떤 이들에게 끔찍한 일 생겼다는 말 들려올 때

아는 누가 큰 병 들었다는 연락 받았을 때

뭐 이런 날벼락이 다 있나, 무너지는 마음 밑에

희미하게 피어나던

어두운 마음

다 무너지지는

않던 마음

내 부모 세상 뜰 때 슬픈 중에도

내 여자 사라져 죽을 것 같던 때도

먼바다 불빛처럼 심해어처럼 깜빡이던 것,

(…)

어두운 마음

어둡던 기쁜 마음

(…)

살 것 같던 마음

반짝이며 반짝이며 헤엄쳐 오던,

살 것만 같던 마음

같이 살기 싫던 마음

같이 살게 되던 마음

암 같은 마음

항암 같은 마음

- 이영광, ‘어두운 마음’ 부분, <살 것만 같던 마음>, 창비(2004)



무심결에 이영광의 시 한 편을 읽었다. 오랜만에 접하는 이름.

다 무너지지는 않는, 살 것만 같은 마음을 ‘어두운 마음’으로 이름 붙이는 것. 그런 마음이 시인의 마음일까.

한때 시를 쓴 적이 있어도 나는 ‘시인의 마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시를 쓴다고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어딘가 수상쩍다.

나는 시를 쓴 적이 있나? 혼자 내 마음대로. 시인지도 모르고, 시가 아닌지도 모르고, ‘왠지 시 같은 것’을 흉내낸 것은 아니고?

‘시적이다’라는 것은 과연 어떤 걸까. 노래 같은 것, 이미지 같은 것, 침묵에 가까운 음이 노래로 진입하는 기이한 통로 같은 것, 유령처럼 서성이는 이미지가 검은 잉크로 현상되는 과정 같은 것, 실재가 언어를 통과해 언뜻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 휘발되고 남은 흔적 같은 것…… 기껏해야 이런 말들만 이리저리 조합해볼 뿐이다.

브레히트가 말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분류할 수 없지만 분류되곤 하는) 시인이라는 부류의 ‘공통감각’일까. 그렇다면 나는 어느 쪽인가. 살아남아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는 마음? 살아남아서 부끄럽다,고 느끼는 마음? 이 둘을 구별할 수 있나?

다행이다+부끄럽다=슬픔. 만일 이런 공식이라면. 이런 양가감정이라면. 다행이다,는 밝은 마음(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부끄럽다,는 어두운 마음. 두 마음이 섞이면 어두운 마음으로 수렴되는가?

다행이다,라고 느끼는 것은 어쩌지 못하는 본능이다. 만일 내가 그 마음을 ‘어두운 마음’이라고 적었다면 나는 그 마음을 ‘정직하지 못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내가 부끄러워해야 할 대상은 소위 ‘어두운 마음’이 아니라, 마음 앞에 ‘어두운’이라는 형용사를 붙인 나의 ‘주저 없음’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살 것만 같던 마음’에 차마 ‘어두운 마음’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는 사람. 시인은 ‘살 것만 같던 마음’에 차마 ‘밝은 기척’을 낼 수 없는 사람. 밝은 기척 자체에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 그런 염결성이 없기에 나는 시인이 될 수 없는지도.

어둡고 무너지는 소식 속에서도 ‘살 것 같은 마음’ 때문에 우리는 살아간다. 그것이 ‘같이 살기 싫은 마음’이든, ‘같이 살게 되는 마음’이든. ‘그 마음’이 없는 상태가 ‘암 같은 마음’ 아닐까. ‘그 마음’이 있어야 ‘항암 같은 마음’이 되는 것 아닐까.

기라성 같은 시인의 이름 앞에서 딴지를 걸려는 심보는 아니다. 시인의 시를 오독한 것도 아니다. 만약 나라면. 시의 제목을 ‘어두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살 것만 같던 마음’으로 정했을 것이다. 시집 제목이 그러한 것처럼.

다시 시작한 항암으로 죽을 것 같다는 L의 마음을 떠올려서일 수도 있다. 무너지는 마음 속에서 희미하게 피어나던 ‘살 것만 같은 마음’이 있어 그녀는 항암을 포기하지 않았다. L의 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도, 완쾌 후 재발 소식을 들었을 때도, 나는 ‘살 것 같던’ 내 마음에 기대어 L도 ‘살 것만 같은 마음’이 되어주길 바랐다. ‘살 것 같던’ 내 ‘어두운 마음’을 인식했지만 부끄러워하는 대신 응시하기로 했다. 응시로 퍼올린 에너지를 친구의 ‘살 것만 같은 마음’에 보태기로 선택하는 것. (물론 보탤 수 있다는 전제하에.)

어두운 마음을 탓하기엔 생이 너무 짧다.

(2024-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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