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텍스트의 주인이 되는 대신 씨앗을 파종하는 게 주된 업무이고, 그러다 시간이 좀 지나면 잡초와 지루한 싸움이나 벌이는 정원사 혹은 산파의 역할을 수행하는 중이다. 이야기에는 완벽한 통제가 도저히 불가능한, 고유의 타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는 나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자신감이 없고 우유부단하며 쉽게 현혹당하는 사람들.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들.
- ‘여행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올가 토카르축, <방랑자들>
작가는 화자의 입을 빌어 스스로를 ‘자신감 없고 우유부단하며 쉽게 현혹당하는,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들’ 중 하나로 포지셔닝하고 있지만. 결국 씨앗을 파종하고 정원사 혹은 산파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이야기(글쓰기)를 추동하는 근원적 힘이 아닌가. 산파를 자처했던 소크라테스의 대화술이 플라톤에 의해 최고의 철학/문학 작품으로 태어났듯.
(쓰기에 관해서라면) 자신감 없고 우유부단하며 쉽게 현혹당하는 나. 단순하고 무지한 나. 내가 텍스트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나를 필요로 하기를 바라는 마음. 텍스트가 불러주는 신호를 보다 민감하게 포착하기 위해 공간을 바꾸고 루틴을 바꾸는 것. 내가 여행이라는 단어에 품은 기대는 이러한 것이었을 텐데. 일상을 벗어난 시공간에서 새로운 루틴 만들기.
치앙마이로 떠날 때는 두세 권의 책을, 독일로 떠날 때는 너덧 권을, 싱가폴로 떠날 때는 예닐곱 권을 챙겼다. 전자책까지 합친다면, 염두에 둔 책들은 스무 권이 넘는다. 그런데?
거의 읽지 못하고 전혀 쓰지 못한다. 읽고 쓰는 뇌의 회로가 그나마 건전하게(?) 작동하는 때는 ‘탈 것’ 위에서이다. 비행기 혹은 기차. 프랑프푸르트행 비행기 안에서 차도하의 시집을 읽고, 싱가폴행 비행기 안에서 프랑수아 줄리앙을 읽은 것이 그나마 집중해서 텍스트를 읽었던 시간. 프랑크푸르트에서 스트라스부르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무언가를 끄적이긴 했다. 좌표. 동선. 궤적. 성좌. 아비 바르부르크(그에게 스트라스부르란?). 필립 라쿠-라바르트와 장-뤽 낭시. 기타 잡다한 생각의 파편들. 파편은 파편일 뿐이다.
스트라스부르에서 하이델베르크로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 최근 번역/출간된 바타유의 소설집을 읽으려고도 했다. 마치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장면처럼. (기차 안에서 줄리 델피는 에단 호크에게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을 들어 보여준다. 이때 그녀가 읽고 있던 책이 바타유의 <마담 에두아르다/시체/눈 이야기>이다). 그러나 기차 안에서 나는 피로한 눈을 감고 있거나 혼자 저녁 먹을 장소를 검색하느라 바빴다.
싱가폴에서는 상황이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바디우와 지젝의 책을 챙겨갔던 나는 뜻하지 않게 (중간에 걸려온 친구와의 전화 통화로) 종교 관련 서적을 뒤적이게 되었다. 특정 신앙이 없는 비종교인으로서의 우리가 어찌하여 이토록 종교적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초기 불교와 초기 기독교, 인간 붓다와 인간 예수(성인이기 이전에 역사적 인간이자 혁명적 사고를 가진), 숫타니파타와 도마복음에 대한 것 등등. 친구는 빅 맨스필드의 <불교와 양자역학>을 언급했고, 나는 ‘표층 종교와 심층 종교’를 말한 종교학자 오강남의 책을 언급했다. 각자 최근에 혹은 예전에 꽂힌 종교(철학) 관련 책들을 주고받았다. 문제적 인간 도올 김용옥이 거론된 것은 물론이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도올의 책을 읽고 강의를 들어왔던 것.)
그렇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목적지를 특정하지 않은 산책처럼. 우연히 만나고 부딪치는 것들에서 뜻밖의 자극을 받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주저앉는 것에는 주저함이 없다.) 엉뚱한 힌트를 얻고 엉뚱한 생각을 더 밀고나가 보는 것.(현혹에 몸을 맡긴다.) 더 나아가서 나 자신과 정직하게 마주하는 시간을 갖는 것.(단순하고 무지한 나와 만난다.)
“자신감이 없고 우유부단하며 쉽게 현혹당하는 사람들.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들.”
파종, 정원사, 산파. 어쩌면 여행자(=쓰는 자)의 자질이란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2025-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