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킷사텐 여행>에 부쳐
4월의 첫날. 도쿄에 있다. 벚꽃은 절정. 날씨는 겨울. 만우절에 걸맞게. 거짓말처럼. 춥다. 심지어 비와 바람. 체감 온도는 5도 이하.
벚꽃을 바라보는(촬영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봄인데 옷차림은 겨울이다. 일본 사람들의 벚꽃 사랑이 유난하다는 것은 오래 전 일본에 거주할 때 이미 느낀 것이지만. 도심 속 호텔 정원에 조성된 벚꽃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 하니 그야말로 벚꽃 정서 가득한 계절이다.
출장 동행의 좋은 점. 공교롭게도 벚꽃 시즌의 절정인 때여서. 눈은 호사. 다만 옷차림만큼은 비 바람에도 지지 않도록.비 바람에 지지 않는 일본인들의 벚꽃 사랑을 어제 우에노 공원에서 새삼 확인한다. 롱패딩까지 입고 나섰는데도 바람에 몸을 움츠리던 나는 우에노 공원 초입 풍경에 놀라고 만다. 월요일 점심경. 수많은 사람들이 잔디밭에 자리를 깔고 벚꽃 피크닉에 여념이 없다.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에도 아랑곳없이.
사실 나의 목적지는 우에노 공원이 아닌 도쿄대학 내에 있는 산시로 연못(산시로노이케).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에 나오는 주인공 산시로가 자주 드나들던 연못이라 하여 ‘산시로 연못’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우산을 펴든다. 우에노 공원의 시노바즈 연못 주변을 둘러싼 벚꽃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별 감흥이 없다. 날씨의 문제인가, 나의 문제인가.) 공원 서쪽으로 나와 도쿄대 방향의 언덕길을 걸어 올라간다. 바람까지 불어 손이 시리다. 마스크와 장갑까지 장착. 나 또한 비에도 바람에도 지지 않는 산책을 계속할 결심. 그렇게 기어코 산시로노이케를 찾아간다. (이 연못에 대해서는 나중에 적어보기로 한다. <산시로>에 대한 소설가 김연수의 흥미로운 해석과 더불어. 안 되면 할 수 없고.)
우에노에서 도쿄대 주변 혼고 거리까지 이어지는 소위 ‘나쓰메 소세키가 걸었던 길’을 알게 된 것은 <도쿄 킷사텐 여행>이라는 책을 통해서이다. S의 소개로 장바구니에 담아 두었다가 마침 도쿄 일정이 있어 출발 며칠 전에 구매했다. 이동 중에 별 생각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읽으려던 것이었는데. (이번 도쿄행에는 종이책을 가져오지 않기로 마음먹었기에) 유일한 종이책이자 뜻밖의 재미와 자극을 주는 컨텐츠가 되었다.
단순히 차와 커피를 파는 카페가 아닌, 예술가들의 문화 살롱 역할을 해온 역사적 공간으로서의 킷사텐(きっさてん, 喫茶店).
어렵게 찾은 도쿄대 내 산시로노이케에서의 ‘비현실적’(이렇게밖에는 표현이 안 된다)인 느낌을 벗어나. 도쿄대 정문으로 걸어나온다. 어제 염두에 둔 또 다른 목적지는 도쿄대 정문 건너편에 자리한 킷사텐 ‘루오’. 프랑스 화가 조르주 루오의 이름을 딴 소위 화랑 킷사이다.
다양한 킷사텐들 - 예컨대 류이치 사카모토와 무라카미 하루키가 사랑했다는 재즈 킷사, 클래식을 틀어주는 명곡 킷사, 샹송을 틀어주는 샹송 킷사, 아르헨티나 음악을 들려주는 탱고 킷사 등등 - 의 레트로 감성과 오랜 세월의 흔적 그리고 공간에 층층이 스며 있는 역사적 일화들까지.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맥락을 더듬으며 들어서면 그 공간은 단순한 상업 시설에서 역사적 장소로 재의미화된다. 결국 이야기의 힘.
고서점가 진보초로 방향을 잡는다. 여전히 비가 오락가락. 이세이도나 센쇼 그란데 같은 고서점을 들러 기웃거리다가. 일본에서 최초로 비엔나 커피를 소개했다는 킷사텐 ‘라드리오’를 찾아간다. 생각보다 웨이팅 라인이 길지 않아서 10분가량 기다렸다가 입장한다. 최초라는 타이틀은 힘이 세다. 물론 (650엔에 걸맞는) 특별한 맛은 아니다. 어떤 특정 공간을 음미하는 값을 지불하는 것일 뿐. 샹송을 틀어주는 킷사텐답게.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들이 흘러나온다. 일어설 즈음에는 밀로드(Milord)가 들린다.
<도쿄 킷사텐 여행>에는 ‘비 내리는 도쿄에서는 킷사텐’이라는 소제목이 있다. 미야자와 겐지의 시 <비에도 지지 않고>가 등장하는 대목이다. 37세에 요절한 그의 숨겨진 원고들을 <미야자와 겐지 전집>으로 세상에 내놓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문학/예술의 킷사텐 ‘모나미’를 소개하는 식이다.
어제가 오락가락 비 모드였다면. 오늘은 하루 종일 비 모드. 이번 일정 내내 비가 올 것 같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창가 테이블 바깥으로. 벚꽃을 배경으로 쏟아지는 빗줄기와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벚꽃 잎들이 바람에 떨어지는 것도 보인다. 이 비가 지나면 벚꽃도 질 것이다.
너무 오랜만에 와본 도쿄. 딱히 가보고 싶은 곳도, 딱히 해보고 싶은 것도 없는 상태에서 출발했지만. 막상 옛 기억을 더듬어 지도를 살펴보면.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렇다면 오늘도 우산을 펴들고 킷사텐?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이왕이면 킷사텐이라는 공간에서 무언가를 듣고 무언가를 읽고 무언가를 적어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2025-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