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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들 2 - 기노쿠니야에서 만난 한강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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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첫째 주. 도쿄. 신주쿠. 기노쿠니야 서점 본점. 일본문학 섹션.


사방이 일본 문학 서가. 그중 북쉘프 한 줄 전체가 한강 코너. 한 칸 혹은 두 칸도 아니고.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 우리나라 작가가 일본 수도의 중심에 위치한 대형 서점에서 차지하는 위상. 노벨 문학상 수상이라는 놀라운 사건도 사건이겠지만. 이번 계기를 통해 ‘번역의 힘’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것도 반가운 일.


데보라 스미스의 영어 번역이 기여한 부분은 결코 작지 않다. 그의 번역으로 2016년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상을 받은 것이 신호탄이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이후 이탈리아어판 <소년이 온다>, 스페인어판 <채식주의자>, 프랑스어판 <작별하지 않는다>가 줄줄이 각 나라의 (외국)문학상을 수상했다. 그간 한국 문학을 일본어로 번역해온 사이토 마리코가 <작별하지 않는다>로 요미우리문학상 연구/번역 부문을 수상한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가를 살펴보다 발견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 한강 코너 한 구석에 한승원의 작품 한 권이 진열되어 있다는 것. 이데 슌사쿠(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일본어로 번역하기도 했다)가 번역한 한승원의 장편 <달개비꽃 엄마>가 그것. 소설가 한승원의 딸로 한강을 기억하던 때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일종의 역전. (물론 역전된 지 오래이지만.)


나 역시 한강을 한승원의 딸로 먼저 인식했고, 그의 작품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인력이 아닌 척력이 작용했달까. 맨부커 상을 받고 나서야 <채식주의자>를 주목하게 되었고. 그러나 여전히 읽지 않고 있다가. 한국에 돌아온 해던가. 프랑스에 살고 있는 M 역시 잠깐 한국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약속을 잡고 만났을 때 그녀의 손에 들린 <채식주의자>를 보았다. 어쩌다 한 번씩 한국에 들어오는 M이 공수해가는 책들. 다음 해에 만났을 때 M의 손엔 이소호의 시집 <캣콜링>이 들려 있었고. 심지어 이소호 시인 낭독회에도 다녀왔다고 했다. M이 '폭력'이라는 주제에 민감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내게 <채식주의자>는 '폭력'이라는 키워드로 다시 한번 각인되었다.


그렇게 나는 <채식주의자>를 시작으로 (뜻하지 않게) 일련의 한강 소설을 읽게 되었다. <채식주의자>를 읽을 때 고개를 갸웃거리며 읽었던 순간들을 숨기고 싶지는 않다. 문득 떠오른 질문. 한강은 소위 '예술가 소설'을 지향하는 작가인가? 채식주의자에서 내가 읽어낸 폭력은 상당히 피상적이었고. 주인공(인 것처럼 보이지만 주인공은 아닌) 영혜는 모종의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객관적 상관물, 아니 객관적 상관'인'으로 느껴졌다. 내게 이 소설은 '폭력'이라는 상징과 '예술'이라는 지향이 '분열과 소멸'로 수렴되는 과정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하나의 클리셰처럼 굳어진 소위 '식물-되기'라는 상상력은 훨씬 이전의 단편 '내 여자의 열매'에서 그 씨앗을 발견할 수 있을 텐데. '내 여자의 열매'를 씨앗으로 뿌려 맺은 열매가 <채식주의자>인 셈이다. 20년에 가까운 시차를 감안할 때, 내가 이유리의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문지, 2021)에 실린 첫 번째 작품 '빨간 열매'에 훨씬 더 매력을 느낀 것은 이상한 일일까. 이유리의 것이 작정하고 쓴 환상 소설이라면, 한강의 것은 작정하지 않았지만 어딘가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시야가 또렷하지 않고 뿌옇게 가려진 듯한 느낌이랄까. 90년대 윤대녕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랄까... 물론 '환상 서사'라는 렌즈로 한강 소설을 읽을 수는 없다. 전작을 읽지 않은 나로서는 <그대의 차가운 손>을 근거로 <소년이 온다> 이전을 '예술가 서사'를 지향하는 작가의 면모가 좀더 두드러진 시기가 아닐까 생각해볼 뿐이다.


<그대의 차가운 손>은 <채식주의자> 연작 중 '몽고반점'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는 작품인데. 솔직한 인상은 이렇다. 서사가 주는 흡입력은 강한데, 어딘가 모르게 작위적이다.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작품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상징의 의미는 무엇인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는지 생각하고 따라가는 것(다소 목적 지향적인 읽기)도 중요하겠지만. 부분들이 펼쳐내는 다이내믹과 리듬 자체에 감응하는 과정을 빼놓을 수도 없다. 노벨 문학상 선정 이유로 자주 인용되는 '시적 산문'이라는 표현에 방점을 찍는다면 더더욱.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한강 문학의 성취는 <소년이 온다>에 이르러 확연해진다는 생각.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문학적 여정을 짚어볼 때 좀더 또렷이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어쩌다 보니. 또 길어진 글. 기노쿠니야 서점에서 만난 한강 작품의 존재감이 반가워 시작한 글인데. 번역의 중요성과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명제가 좀더 공고히 뒷받침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해서 한강이 한국을 대표하는 혹은 최고의 작가로 간주되는 것에 선뜻 동의할 수는 없다. 예술의 영역에서 객관적 최고란 있을 수 없기에. 각자의 최선이 어떤 환경과 조건에서 최고의 상태로 빛날 수 있는지가 관건일 뿐.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세계 곳곳에서 조명될 수 있는 가능성이 보다 넓게 열렸다는 것. 그리고 가속화될 것이라는 것. 그것만큼은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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