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감 vs. 배신-감 @타이페이 단골 카페에서
타이페이 티앤무 지역, 큰길 사거리 모퉁이에 자리잡은 단골 카페. 모퉁이 창가에 앉아 있으면(주로 앉는 자리이기도 하다)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원하든 원치 않든) 바라보게 된다. 이른 아침, 발걸음을 서두르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등굣길에 나선 학생들이다.
# 이상한 배신감: 침 뱉는 어린이
늘 같은 후줄근한 체육복 차림(아마도 교복 대용인 듯)의 중고등학생들 사이로, 그날 따라 하얀 바탕에 파란 가로 줄무늬가 그어진 티셔츠를 입은 꼬마 남자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8살 혹은 9살쯤 되어 보이는 앳되고 귀여운 얼굴.
어른들에게 노동의 일과가 그러하듯 이 아이 또한 학교라는 의무에 충실하기 위해 부족한 잠을 달래가며 이른 아침 집을 나섰을 것이다. 그 흔적을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약간 한쪽으로 쏠린(솟은) 머리카락(베개맡을 떠나온 지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통통하게 부어 있는 눈 주위, 등에 멘 (물통이 꽂혀 있는) 커다란 파란 책가방, 방금 전까지 비를 내리다가 순식간에 해를 내어놓는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축축히 접혀 손에 들린 장대 우산. 아이의 모습이 하도 귀여워 나는 잠시(꼬마가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이 순수한(?) 어린이의 모습을 유리창 밖으로 지켜보았다.
무슨 근거에서 순수하다고 느꼈을까? 아이의 다음 (반전) 동작에 흠칫 놀라기까지 나는 그리 생각했던 게 틀림없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익숙한 표정과 동작으로 탁- 하고 길바닥에 침을 내뱉을 때까지 말이다. 배신감이란 표현은 이런 때에도 쓸 수 있으리라. 딱히 순수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설명할 수 없더라도, 왠지 그러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그것을 저버렸으니 배신은 배신이지.
# 믿음은 습관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믿음이란 얼마나 습관적(혹은 관습적)인가? 아이가 길바닥에 침 한 번 뱉었다고 해서 ‘어린 아이의 순수함’이라는 오래 된 인식이 통째로 날아갈 수는 (물론) 없다. 그러나 보편적인 개념은 그 자체로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 특히 개개인(혹은 개개의 사물)의 크고 작은 배신(?)으로 어느 순간 불현듯 자신(언어로 이루어진 개념)의 부재를 드러낸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우리는 습관적으로 어떤 단어 앞에 으레 특정 수식어를 달아주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어린이’라는 말에 ‘순수한’이라는 관용어를 붙이는 것처럼.
# 배신-감: 틈 벌리기
그러니까 나는 “이 순수한 어린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말할 게 아니라 “이 알지 못하는 어린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해야 더 적절했을 것이다. 뭐 꼭 대단한 신념을 저버리게 해야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통념을 비껴가는 사소한 일에도 우리는 배신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니, 기존 사고방식의 틀로부터 조금이나마 ‘틈’을 벌린다는 차원에서 어쩌면 (쓸 만한) '배신-감'이라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인생 자체가 배신의 연속이다. 왜냐하면 삶을 지속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믿음(혹은 희망)’인데, 매번 우리는 그 믿음을 저버리는 일들과 부닥치게 되니 말이다. 오죽하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말이 관용구처럼 쓰일까. 속을 줄 알면서도 우리는 짐짓 믿는 체하며 나아가는지도 모른다. 속아주는 것. 그것은 속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속았다며 분노하는 것이 배신감이라면, 속을 줄 알면서도 속아주느라 생겨난 잉여 감정은 뭐라 불러야 할까. 철학자 데리다가 일반적인 ‘차이(difference)’의 개념으로부터 ‘차연(differance)’을 구분해낸 것처럼 뭐 그럴 듯한 말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럴 깜냥이 안 되는 나로서는 그저 ‘배신’과 ‘감’ 사이에 하이픈 하나를 더 넣어 물리적 휴지(休止)를 주는 것에 그칠 뿐이다.
그날, 그 줄무늬 옷의 어린 아이는 무슨 잘못이 있던가? 아무 잘못도 없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볼썽사나운 (어른의) 표정까지 흉내 내며 찍- 하고 침을 내뱉은 것밖엔. 그러니까 그 일은 나를 분노케 할 정도로(즉 ‘배신감’에 몸을 떨 정도로) 확고한 믿음을 저버리게 한 경우가 아니라는 말이다. 대신, 관습의 틀로부터 조금 틈을 벌려(즉 속아주는 ‘배신-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막연한 습관적 믿음에 경종을 울려준 셈이다.
# 습관적 믿음에 경종을
침을 뱉었다고 순수한 어린이가 순수하지 못한 어린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를 생각할 때 자동으로 솟아오르는 ‘순수’라는 단어의 정의를 어떻게 내릴 것인가? 이것이 핵심이다. 객관적이라기보다 주관적인 것에 가깝다는 것을 인식한 순간, 우리는 섣불리 ‘순수한 어린이’라는 표현을 (아무 곳에나) 쓰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될 것이다.
어디 이것뿐일까? 우리의 인습적 사고에 어깃장을 내볼 만한 것들이. ‘하면 된다’라는 사고방식(긍정 과잉일 수도 있다), ‘칭찬은 고래도 춤 추게 한다’라는 생각(칭찬 중독에 걸릴 수도 있다), '양적 축적이 질적 변화를 가져온다'는 법칙(양적 축적만 있고 질적 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포기란 없다’는 결연함(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전문가는 다르다’는 생각(전문 분야밖에 모를 수도 있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는 말(인내만 쓰고 열매는 아예 안 맺힐 수도 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속담(새마다 생체 리듬이 다를 수도 있다), 등등.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더라? 아, ‘배신감’이 아닌 ‘배신-감’은 우리의 정신을 단련시키는 데 오히려 유익할 수도 있다,는 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2016-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