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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n 08. 2020

부대낌의 미학

홍콩 소호의 PMQ에서 (feat. 김훈 산문 '목수')



"나는 놀기를 좋아하고 일하기를 싫어한다. 나는 일이라면 딱 질색이다. 내가 일을 싫어하는 까닭은 분명하고도 정당하다. 일은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부지런을 떨수록 나는 점점 더 나로부터 멀어져서, 낯선 사물이 되어간다. 일은 내 몸을 나로부터 분리시킨다. 일이 몸에서 겉돌아서 일 따로 몸 따로가 될 때, 나는 불안하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소외된 노동으로 밥을 먹었다.

(…) 목수들은 허리춤에 여러 가지 연장을 차고 있었다. 젊은 목수들의 연장은 아름다웠고, 그들의 망치질이며 톱질과 대패질은 행복해 보였다. 세상의 재료들을 재고, 자르고, 깎고, 다듬어서 일으켜 세우고 고정시키는 자들의 기쁨으로 그들의 근육은 꿈틀거렸고, 날이 선 연장들은 햇빛에 빛났다. 아아, 연필과 지우개는 잊혀져야 마땅하리라……

(…) 망치로 못대가리를 때리는 소리는 듣기에 편하다. 소음이 어째서 편안하고 아름답게 들리는가. 그 의문이 또 나를 들볶았다. 아마도 그 소음은 인간의 근육의 힘이 이 세계의 재료들과 직접 부딪치면서 발생하는 소리이기 때문에 듣기에 편안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소음을 편안해하는 내 마음은 나 자신의 결핍이고 불행일 것이었다.

(…) 나는 옥수수 먹기보다 옥수수나무 쳐다보기를 더 좋아한다. 옥수수잎은 난초처럼 깔끔하고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거칠고 싱싱한 힘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거기에 바람이 스칠 때, 잎들이 부대끼며 서걱거리는 소리는 늘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사랑을 꿈꾸게 한다.

(…) 공사중인 집의 처마 끝에 매달려 못질을 하는 젊은 목수는 그 아름다움으로 나를 주눅들게 한다. 그러나 누구의 삶인들 고달프고 스산하지 않겠는가. 나무통이 좁아서 뿌리가 비어져나온 옥수수를 들여다보면서 나는 새로운 슬픔으로 지나간 슬픔을 위로한다. 옥수수잎에서, 먼 바람 소리가 들린다. 놀다 보니 봄은 다 갔고, 내 사랑하는 젊은 목수들은 집을 다 짓고 어디론지 가고 없다. "

김훈, 산문 ‘목수’ 중에서




소외된 노동이라면 나 역시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나 하지 않기로 한다. 소외된 노동의 내역 자체를 굳이 읊고 싶지도 않다. 단지, 15년 전쯤, 회사 선배와 나누었던 대화만이 아련하게 떠오를 따름이다.


타고난 네트워크 감각과 뛰어난 언변으로 능수능란하게 (업무적) 인간관계를 풀어내던 선배였다. 때로는 달래고, 때로는 사정하고, 때로는 아부하고, 때로는 으름장을 놓고, 때로는 반듯한 정공법을 활용하고, 때로는 귀엽게 협박할 줄도 아는 그네의 기술은 늘 감탄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날 선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펑크 난) 원고 청탁 전화를 어렵사리 마치고 난 참이었다.


“아무래도 난 점점 더 사악해지는 것 같아. 내 몸에 겉돌지 않는 일은 없을까. 머그 컵 하나라도 내 손으로 직접 빚어 만들어서 알음알음 팔며 지낼 수 있으면 딱 좋겠는데.”

늘 자신만만하고 자신의 일에 열정적이었던 그네였기에 퍽 의외의 말로 여겨졌다. 마감으로 푸석푸석한 얼굴을 하고 나는 선배에게 말했을 것이다. 적극 동의한다,고. 그러나 슬프게도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뭔가를 만들어내는 (손)재주가 없다고. 달리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작가 김훈 역시 어느 봄인가 글쓰기를 작파하고 놀면서, 사물과의 직접적인 부대낌을 업으로 삼는 목수의 일을 내심 부러워했음이 틀림없다. 스스로 말했듯 그것은 그 자신의 결핍이고 불행일 것이었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볼 수 있을까? 못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연필과 지우개와 종이만으로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글자’라는 물적 바탕을 이리저리 꿰어 맞추고 붙였다 떼었다 하며 세계를 일으켜 세우기도 균열을 내기도 하는 사람 아닌가?  이 또한 물적 재료와 몸을 부대끼며 기쁨과 슬픔의 근육을 꿈틀거리는 일 아닐까? 물감이나 먹을  다루는 화가의 근육이 그러할 것이고, 나무와 돌, 쇠를 다루는 조각가의 근육도 그러할 것이다.


홍콩 소호에 자리잡은 PMQ 내의 한 가죽 공방


홍콩 소호에 자리잡은 PMQ(신진 예술가들을 위한, 공예와 디자인 중심의 복합 문화 예술 공간)의 한 가죽 공방에서 나는 벽에 걸린 연장들을 사진에 담았다. 매끄럽고 우아하게 재단된 가죽 제품들은 아름다웠다. 저 연장들로 가죽을 재고 자르고 다듬고 이어 붙였을 것이다. 제품들은 매우 심플한 디자인 위주였고 별다른 장식도 없었으며 소위 명품 브랜드가 그러하듯 로고 따위로 저 자신을 돋보이게 하지도 않았다. 그 단순함은 뜻밖에도 내게 물질이 주는 아름다움을 상기시켰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과의 부대낌’으로 변형된 물질의 아름다움이라고 해야 할까. 도구로서의 인간이 직접 투영됨으로써 변용된 미니멀한 물질 말이다.


옥수수잎들끼리 부대끼며 내는 소리든, 인간과 사물이 부대끼며 내는 소리든, 혹은 인간과 인간이 부대끼며 내는 소리든, 거기엔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들어 있다. 해와 바람이 살갗에 와 부대낄 때 느끼는 설렘처럼.


김훈의 표현대로 "새로운 슬픔으로 지나간 슬픔을 위로"할 수 있을 것 같다. 슬픔끼리의 부대낌 속에도 아름다움이 있는 것처럼.  


(2016-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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