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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n 08. 2020

스탠리 가는 길

제자리인 듯 제자리일 수만은 없는 @홍콩 스탠리 베이

# 도착지보다는 가는 길 풍경


홍콩의 스탠리 베이엔 별 것이 없다. 뭔가 잔뜩 기대할 만한 것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지금이야 관광객들로 붐비는 작은 시장(스탠리 마켓)이나 쇼핑 센터(스탠리 플라자)가 자리하고 있어 찾는 이들의 발걸음을 늦추지만, 이곳이 알려진 이유는 홍콩 도심을 떠나 조용하고 아늑한 해변 풍경을 즐기려는 사람들 때문이었으리라. 홍콩에서 가장 오래 된 건축물이라는 '머레이 하우스'도, 도교 사원인 '틴하우 사원'도 그렇게까지나 특별할 것은 없다. '스탠리'라는 관광지를 구성하는 사후 목록 중 하나일 뿐이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도착한 홍콩 스탠리의 풍경


늘 그렇듯 도착지보다는 가는 길 풍경에 새록새록 정을 붙이게 된다. 굽이굽이 좁은 산길을 돌아 달리는 2층 버스에서 바라보는 절벽 밑 바다도 좋지만, 2층 창가를 스치듯 부딪치는 나뭇잎들을 느끼는 즐거움도 못지 않다.


버스의 2층 자리는 여느때와는 조금 다른 시각을 선사한다. 키 큰 나무들의 우듬지와 나란히 눈을 맞출 수 있다는 점도 좋고, 위로 갈수록 풍성한 잎사귀들이 손 닿을 듯 차창을 어루만지는 매무새도 좋다.

한 굽이 넘어갈 때 다음 풍경을 알지 못한다는 점도 '기대'라는 이름을 빌려 좋다 말할 수 있겠다.



# 나선형의 미학


단 한 번밖에 가볼 수 없는 산을 굽이 돌아 오르는 일, 그것이 삶의 여정일 것이다. 문득 나선형의 미학을 떠올린다. 지난 번, 한국에서 10년 만에 만난 친구와 나누었던 이야기.


뱅글뱅글 제자리를 도는 듯하지만 평면적 차원에서 입체적 차원으로 조금만 틈을 벌릴 수 있어도 우리는 3차원 나선형 운동을 따라 수직 '상승'할 수 있으리라는 것. 이 틈을 벌리기까지 얼만큼 무수한 평면형 동글뱅이를 그려야 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


수직 상승하는 나선형 운동에 편입될 수만 있다면 그 각도가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인내의 시간을 거쳐 어느 순간 산등성이 어디쯤 목적한 바 (혹은 목적한 바 없는) 도착지에 다다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가끔씩 숨막히는 (그러나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고 마는) 진풍경을 마주하기도 하지만, 매 순간 감탄할 만한 장면이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어쩌면 대부분) 단조로운 풍경이 이어지기도 하며, 어느 때에는 그 지리멸렬한 풍경마저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망연자실 초점을 잃거나 졸음에 빠지기도 하는 것. 그것도 삶과 닮은 모습일 것이다.


 스탠리에 도착해서 무엇을 했던가. 보고자 했던 것을 확인하고 돌아서는 길은 단조로운 풍경과 다르지 않다.

돌아오는 길, 이번엔 굽이굽이 내리막길을 따라 이른 석양에 눈부시게 드러난 공동 묘지를 발견한다. 스탠리는 이미 저쪽에 있고, 나는 다시 이쪽으로 돌아와 있다. 그런데 그제서야 나는 스탠리를 다녀왔구나, 하고 느낀다. 그곳에서 그곳을 느끼지 못하고, 그곳에서 이곳으로 넘어왔을 때 느끼는 그곳의 정취.


스탠리에서 돌아오는 길. 황혼 무렵 창밖으로 보이는 공동 묘지.


목적한 바 어디를 간다 한들, 크게 다르지도, 특별히 별다를 것도 없는 일상성에 편입되는 것, 그게 삶의 지속성이리라. 그리고 문득 깨달을 수 있다면, 내가 있는(혹은 돌아온) 자리가 바로 '별다름'을 만들어낼 수 있는 그 공간임을 알아챌 수 있다면, 그제야 나는 어딘가에 다녀온 의미를 추스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녀올 때마다 조금씩 틈을 벌려 나선형의 각도를 조금이나마 위쪽으로 들어올리는 것. 내가 스탠리를 다녀온 이유도 그런 것일 테고, 사람들이 여행을 하는 이유도 그런 것일 테다.


제자리인 듯하면서도 제자리일 수만은 없는 움직임, 그러한 운동성을 지향하기 때문일 것이다.


(2016-5-18)


https://youtu.be/eVrpYqM1-k8

오는 길에 어느 레코드 가게에 들러 데이브 브루벡의 에센셜 앨범을 한 장 샀다. What a Travelin' B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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