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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l 18. 2020

잠 못 드는 밤, 찰리 헤이든을 듣다

잠에 대한 단상

마일스 데이비스는 말했다. "음악에 대하여 말하려 하지 말라. 음악은 느끼는 것이다."


근심으로 잠 못 들던 때. 찰리 헤이든(Charlie Haden)을 들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였을 것이다. 특히 두 개의 앨범. 하나는 피아니스트 행크 존스(Hank Jones)와, 다른 하나는 팻 메스니(Pat Metheny)와 듀오를 이룬 앨범이다. 그들의 연주를 들었다,라는 표현보다는 그들의 호흡을 느꼈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찰리 헤이든과 행크 존스의  듀오 앨범 <Steal Away>(1995)


찰리 헤이든과 행크 존스의 듀오 앨범 <Steal Away>는 독특한 체험을 선사한다. Spirituals, Hymns and Folk Songs라는 부제가 알려주듯 영성이 느껴진달까. 나 같은 비종교인에게도 와 닿을 만큼.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울림. 화려한 스윙과 현란한 즉흥 연주에 지쳤다면 이 둘의 깊고 조용한 호흡에 귀 기울일 만하다. 찰리 헤이든의 심연을 울리는 베이스와 잔잔히 흐르는 행크 존스의 피아노 선율이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혀준다.


Sometimes I Feel Like A Motherless Child나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We Shall Overcome 같은 곡들을 들어보면, (굳이 위로니 힐링이니 하는 흔한 표현은 쓰고 싶지 않다) 알 수 없는 불안과 피로에 젖은 마음이 가만가만 어루만져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찰리 헤이든의 손끝에서 울리는 베이스 사운드는 흔들리지 않는 영혼처럼 견고하다.


찰리 헤이든과 팻 매스니가 함께한  <Beyond the Missouri Sky>(1997)


찰리 헤이든과 팻 매스니가 <Beyond the Missouri Sky> 앨범에서 들려주는 하모니는 어른을 위한 따뜻한 자장가 같다.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이에게 어서 잠의 은신처로 자리를 옮기라고 부드럽게 의식의 등을 떠미는 느낌이랄까. Our Spanish Love Song이나 The Precious Jewel은 언제 들어도 좋지만, First Song은 특히 밤에 진가를 발휘한다. 찰리 헤이든의 베이스는 눈을 질끈 감게 만든다. 웅숭깊다. 그 위로 팻 매스니의 꾸밈없는 기타가 흐르면 마치 깊은 밤 나지막이 흐르는 깊고 검은 강 위로 잔잔한 물결이 달빛에 반짝거리는 것 같다. (얼마 전 타계한 엔니오 모리꼬네의) <시네마 천국> 주제곡은 보너스이다.


철학자(이자 시인인) 서동욱의 책 <일상의 모험>에 실린 ‘잠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이 떠오른다. “잠잔다는 것은 기적처럼 구원을 준비하는 사건, 사악한 익명적 존재의 늪에 빠지지 않고 ‘주체’로 서 있을 수 있는 사건”이라고 말하는.


30페이지도 안 되는 이 짧은 글의 마지막 두 문장은 꽤 시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어쨌든 모든 것은 주체로 서 있을 수 있다는 이 소박한 성취로부터 출발하지 않겠는가? 모험의 신화가 끝장났고 구원의 역사가 종말을 고한 이 시대에도, 여전히 뭔가 빛나는 음모(陰謀)가 기다리고 있다는 듯 인간이라는 빈자(貧者)는 깊은 잠 속으로 들어선다.

- 서동욱, <일상의 모험>, '잠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모리스 블랑쇼는 이야기했다.

“잠을 자는 것은 우리에게 낮을 약속해주는 명백한 행위이다. 잠을 잔다는 것, 그것은 우리의 깨어 있음을 달성하는 놀라운 행위이다.”


낮을 약속해주는 잠,이라는 표현에 머무른다. 우리는 깨어 있기 위해 잠을 자는 것이다. 깨어 있음을 달성하는 중요한 행위로서의 잠. 잠으로 스며드는 양질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찰리 헤이든의 두 앨범을 듣곤 했던 밤들.


오랜만에 들어보는 <Beyond the Missouri Sky>의 마지막 곡 ‘Spiritual’이 끝나간다.

자야겠다. 깨어 있기 위하여.



*<일상의 모험>: 서동욱의 2011년 책인 <철학연습>이 대표적인 현대 철학자와 주요 개념을 농축하여 간결하게 정리한 후 구체적 삶의 주제들을 에세이 식으로 풀어낸 책이라면, 이 책은 그보다 훨씬 앞선 2005년에 저자가 보다 심도 있게 접근한 논문집 같은 느낌의 책이다. ‘태어나 먹고 자고 말하고 연애하며, 죽는 것들의 구원이라는 흥미로운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은 15개의 일상적 주제들(, 자기기만, 얼굴, 패션, 웰빙, 이름, 노스탤지어, , 예언 등)’이 중심이 되어 현대의 다양한 철학적 사유들을 초대하고 있다. 레비나스가 말한 일상적 삶은 구원에 대한 전념이다혹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글귀 그 진정한 실재란……단순히 우리의 삶이기도 하다라는 말을 빌려 일상 안에 미리 있는 구원을 모색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를 흥미롭게 따라가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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