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 3030 & 박상미의 <나의 사적인 도시>에 부쳐
2017년 7월 말의 어느 날. 3030이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온다. '전체 메모' 옆에 조금 작게 찍혀 있는 숫자. 최근 몇 년간 삼천삼십 개의 메모를 남겼다는 의미. 예전에 사용한 오래된 기종의 핸드폰에서 이미 몇 천 개의 메모를 통째로 날린 경험이 있는 내게, 3030이라는 숫자는 언제 또 날아갈지 모를 휘발 가능성의 표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끝내지 못한 일기, 몇 개의 단어로만 이루어진 메모, 불현듯 솟구친 문장, 훗날 암호 해독처럼 들여다보게 될 (게 분명한) 수수께기 같은 화두, 난데없는 감상, 메모할 당시 정황이 짐작되는 은유의 말들, 맺지 못한 시, 다급히 옮겨놓은 인용구, 갑작스레 떠오른 먼 기억 속의 한 장면, 간밤에 꾼 꿈의 조각들, 간직하고 싶은 타인의 글 등등.
곧 휘발되어 날아갈 말(또는 이미지)의 파편 한 조각이라도 애써 붙들어 앉히려는 마음에 다급히 조합된 글자들에선 애틋함이, 생각의 끈을 놓칠세라 마구 휘갈긴 문장들에선 초조함이 읽힌다. 배설하지 못하면 독이 될까 일단 뱉어놓은 말에선 절박함이 묻어나오고, 온갖 종류의 관심 주제에 대하여 스크랩해놓은 글들에선 수집벽이 엿보인다.
한때 열렬히 시청했던 ‘알쓸신잡’에서 소설가 김영하는 ‘작가란 말을 수집하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의 수집’이라는 말을 냉큼 수집한다. 글을 쓸 때,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문장을 쓸 때, 나는 가끔 상상하곤 한다.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발 밑에 묻혀 있는, 혹은 사물에 걸려 있는 무수한 말들 중 내게 성큼 다가온 단어들을 부지런히 채집하여 커다란 언어 채집통에 가지런히 넣어두는 것, 그리하여 필요할 때마다 적시적지(適時適地)의 말을 알맞게 꺼내어 온당히 부려내는 것.
채집(採集)이라는 단어를 들여다본다. ‘널리 찾아서 얻거나 캐거나 잡아 모으는 일’이다. 그렇다면 수집(蒐集)은? ‘취미나 연구를 위하여 여러 가지 물건이나 재료를 찾아 모음. 또는 그 물건이나 재료’이다.
둘 다 ‘모으다’라는 말로 수렴된다.
# 왜 모으는가?
그렇다면 왜 모으는가? 작가, 음악가, 광고업계 종사자 등 틈만 나면 언제 어디서든 메모를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미술가가 단 몇 초 혹은 몇 분에 걸쳐 빠르게 형태와 특징을 담아내는 크로키(croquis)나 간단한 초벌 구성안인 에스키스(esquisse)도 이와 같은 맥락일까.
영감 또는 심상의 가시적 포착이자, 구상의 첫 단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록 자체를 즐긴다는 쾌락의 측면도 있겠지만, 무언가를 만들어낸다(창조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 유용성 측면에서도 합당한 행위이다.
나는 왜 모으는가?
몇 년 전 우연히 받아본 MBTI류의 심리 검사 결과가 떠오른다. 이 분야 역시 좀더 세분화되어 진화하고 있긴 하지만, (긍정의 심리학이니 강점 확인이니 하는 추세에 맞추어) Strength Finder라는 큰 틀에서 별로 벗어나지는 않는 듯하다. 긴 질문지에 답한 후 받아 든 리포트에는 나를 설명하는 다섯 가지 핵심 테마가 정리되어 있었는데 그 중 눈에 띈 (이전 MBTI와는 조금 변별력을 갖는) 키워드는 ‘Inputs’ 즉 ‘모으기’에 관한 것이었다. 다음은 input에 관한 부분이다. (한글로도 번역해보았다.)
You are inquisitive. You collect things. You might collect information—words, facts, books, and quotations—or you might collect tangible objects such as butterflies, baseball cards, porcelain dolls, or sepia photographs. Whatever you collect, you collect it because it interests you. And yours is the kind of mind that finds so many things interesting. The world is exciting precisely because of its infinite variety and complexity. If you read a great deal, it is not necessarily to refine your theories but, rather, to add more information to your archives. If you like to travel, it is because each new location offers novel artifacts and facts.
당신은 호기심이 많습니다. 당신은 무언가를 수집하는군요. 단어, 사실, 책, 인용문 등 정보를 수집하거나 나비, 야구 카드, 도자기 인형 또는 세피아 사진 같은 구체적 사물을 수집할지도 모릅니다. 어떤 것을 수집하든 당신이 수집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많은 것을 흥미롭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는 무한한 다양성과 복잡성 때문에 흥미롭습니다. 당신이 많이 읽는 사람이라면, 이론을 다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아카이브에 더 많은 정보를 추가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당신이 여행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각각의 새로운 장소들이 새로운 공예품과 사실들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고 신통하다. 문자 그대로 나는 ‘words, facts, books, and quotations(단어, 사실, 책, 인용문)’을 모으고 있지 않은가. 흔히 생각하는 ‘수집가다운(특정 사물을 모으는)’ 면모와는 다소 다르지만 말이다.
뭐라 해야 하나. 구상물(具象物)이 아닌 추상물(抽象物) 수집이라고 해야 하나.
책은 어떤가? 엄연히 지각할 수 있는 형태를 갖춘 구상물이기도 하지만, 직접 경험할 수 없는 내용을 전달하는 추상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언어는? 언어는 구상물인가 추상물인가? 글자라는 가시적 형태로 지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구상물, 사물(구상물) 혹은 관념(추상물)을 지시하는 체계라는 점에서는 추상물일까?
나의 메모는 수집하는 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딱히 유용성을 염두에 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용한 것도 아니다. 언제 어떻게 어떤 목적으로 쓰이게 될지 ‘수집하는 현재’의 시점에선 알 수 없으나, 누가 또 아는가, 어느 순간 꼭 맞춘 듯 유용한 쓰임새로 모습을 드러내게 될지.
그게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모으는 행위’ 자체가 주는 소소한 충족감과 즐거움이 있기에 (미래의 실용적 가치 혹은 유용성 따위는 차치하고서라도) 개인의 내밀한 수집행위는 사적으로 꽤 유용한 셈이다. 은밀하고도 위대하게.
Why are they worth storing? At the time of storing it is often hard to say exactly when or why you might need them, but who knows when they might become useful? With all those possible uses in mind, you really don’t feel comfortable throwing anything away. So you keep acquiring and compiling and filing stuff away. It’s interesting. It keeps your mind fresh. And perhaps one day some of it will prove valuable.
그것들은 왜 모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언제, 왜 그것들이 필요한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언제 유용하게 쓰일지 누가 알겠는가? 가능한 모든 사용을 염두에 둔다면, 어떤 것도 버리지 않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이다. 그래서 당신은 계속해서 자료를 수집하고 편집하고 정리한다. 일단 재미있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신선하게 유지시켜 준다. 아마도 언젠가 그 중 일부는 가치 있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 '다시 쓰기'를 지향하는 메모의 미학
메모랜덤memorandum, 메모아르memoir와 같은 단어들이 주르륵 머리 속을 지나간다. 늘어선 단어들을 살펴본다. 비망록(備忘錄)이라는 말처럼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는 것이라면 가치(를 두는) 시점은 미래에 있을 것이다. 현재의 유용성과는 상관없이 일단 끌어 담아 간직하고픈 욕구라면 이는 소유적 본능에 가까울 것이고. 쓰는(기록하는) 순간의 즐거움 자체를 위해서라면 쾌락을 추구하는 유희적 본능에 기반할 터이다. 그 동기가 본능을 따른 직관이든, 이성에 기반한 유용성이든, 혹은 둘 다이든, ‘메모’가 '습관'이 될 때 그것은 그 자체로 개인의 소중한 아카이브가 된다. 어쩌면 이 은밀하고도 위대한 보고(寶庫)가 훗날 ‘다시 쓰기’를 위한 결정적인 단초 혹은 1차 자료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번역가이자 에세이스트인 박상미가 자신의 책에서 ‘팰림프세스트Palimpsest’에 관해 언급한 것이 떠오른다.
이 단어(팰림프세스트Palimpsest)는 한때 내가 좋아했던 단어로, 쓴 글을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쓴 문서라는 뜻이다. 주로 양피지에 쓰고 지우고 쓴 문서를 가리키는데 (…) 쓰고 지우고 쓰고 다시 지우고 쓰고…… 이러한 반복적인 행위는 은유의 폭이 크고, 과정과 시간이 물리적이고, 시각적으로 드러난다는 측면에서 미학적으로도 매력적이다. 얼굴 위로 잠깐씩 미묘하게 개인적인 비극이 비치듯, 양피지 위에 형태를 드러내는 오래된 글자는 아름답다.
고어 비달Gore Vidal은 메모아르memoir와 자서전autobiography의 의미를 구분하면서, 자서전은 사실에 충실해야 하는 반면 메모아르는 자신이 기억하는 대로 쓰는 것이라고 했다. 기억을 팰림프세스트Palimpsest에 비유한 것은 적절해 보인다. 기억은 사실과는 차이가 있는, 시간을 거쳐 구성된 세계이다. 선택하고, 삭제하고, 지워지고, 다시 프레임하고, 지워졌던 것이 결국 희미하게 되살아나는 기억의 구성 과정은 썼다 지우다 다시 쓰는 고대 문서의 형태와 닮았다.
- 박상미, <나의 사적인 도시>, ‘흔적 위에 다시 쓴’ 중에서
‘다시 쓰기’를 지향하는 모든 메모는 잊지 않기, 그저 묵혀놓기, 재구성을 담보로 한 선택과 삭제 그리고 리프레이밍의 여지를 씨앗처럼 품고 있을 것이다. 시간의 무늬를 가늠하는 흔적과도 같이.
나는 이 글을 ‘메모 3030’이라는, 달랑 두 글자와 네 자리 숫자로 이루어진 메모에서 시작했다.
(2017년 7월 27일 광저우에서 메모하여 8월 11일 타이베이에서 맺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