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쓰게 된다: 메모 사용법

환기와 상기: 김중혁의 <무엇이든 쓰게 된다>에 부쳐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 메모할 때 vs. 메모를 판단할 때


소설가 김중혁은 그의 책 <무엇이든 쓰게 된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메모를 할 때의 나보다는 메모를 판단할 때의 내가 더 믿음직스럽다."


맥락은 다음과 같다.


메모의 시작은 창대하지만 끝은 언제나 미미해지고, 흐지부지 매듭이 만들어진다. 메모란 처음부터 미완성을 전제하고 쓰는 글이어서 더욱더 미미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메모는 씨앗을 심는 일이다. 메모로 적은 생각에 매일 물을 주지 않으면 곧 말라버린다.

(…) 어떤 생각이 들었을 때 펜의 올가미로 생각을 낚아채지 못하면 어쩌나. 금방 날아가버리면 어쩌나. 시간이 갈수록 생각을 대하는 생각이 바뀌었다. 사라질 생각은 어차피 사라질 운명일 것이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할 생각은 어떤 방식이로든 살아남을 것이다. (...) 오는 생각 막지 않고, 가는 생각 막지 않았다.

(...) 생각하는 대신 스크랩을 한다. 자료를 무조건 모아둔다. 사진도, 마음에 드는 문장도, 기사도 모아둔다.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모아둘 뿐이다. 어느 날 어떤 글을 써야 할 때가 되면 그제야 모아두었던 스크랩을 뒤진다. 그때부터 생각이 시작된다. 거대한 자석을 들고 온 동네를 헤집으며 고철을 수집하는 마법사처럼, 생각의 파편을 천천히 끌어모은다. 메모를 할 때의 나보다는 메모를 판단할 때의 내가 더 믿음직스럽다. 메모는 취한 채로도 한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한다. 울면서도 한다. 시간이 흐르고 그 메모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내가 다시 판단한다.

- 김중혁, <무엇이든 쓰게 된다>, 2_창작의 시작, ‘붙잡아두면 생각은 썩어버린다’ 중에서



# 써야 할 때 vs. 쓰고 싶을 때


그가 말한 “어느 날 어떤 글을 써야 할 때”라는 표현은 어쩐지 당위와 의무에 가깝게 느껴진다. 내게는 “어느 날 어떤 글을 쓰고 싶을 때”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것처럼 문득 어떤 단어가, 문장이, 사진이나 기사가 슬쩍 나를 건드리고 간다. 당장에 와락 일어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들은 어떻게든 자료로서(메모나 스크랩의 형태로) 저장된다. 그러나 자료는 자료일 뿐이다. 한동안 자료로 묻혀 있던 것들은 대부분 자료로서 수명을 다한다. ‘어느 날 어떤 글을 써야 할 때’ 참조로 불려 나온 자료들은 그제야 빛을 볼 것이다.


그러나 ‘써야 할 때’가 (전업 작가처럼) 으레 오는 것은 아니다. 나 같은(글쓰기가 직업이 아닌) 경우라면 ‘써야 할 때’를 기약하며 저장 창고를 불리는 것보다는,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초발심(初發心)이 정각(正覺)을 이루는*”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 바람직할 터인데. 물론 이러한 경지는 소위 용맹정진(勇猛精進)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초발심(처음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그대로 계속하면 문득 정각(正覺)을 이루게 된다는 뜻. 누구나 처음 발심할 때의 그 마음으로 정진하면 문득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원불교대사전)


용맹정진도,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도, 내게는 모두 ‘아직도 가야 할 길’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내 깜냥에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메모를 판단할 때의 내가 더 믿음직스럽”기 위해서라도 메모 저장고를 늘 머리 가까이 달아두고 들락거리는 수밖에. 즉 잦은 ‘접속’을 통해 섣부른 판단일지라도 이를 거듭하는 것. 거듭하는 동시에 가라앉혀 솎아내는 것. 예컨대, 이것이 단지 초발심(初發心)인지, 마음을 탁 내어놓고 집중해서 정각(正覺)- 즉 한 편의 완결된 글 - 으로 밀고 갈 수 있는 것의 성질인지 판단하는 것.


처음 와 닿을 때엔 (너무 어렴풋해) 몰랐던 감각이 ‘접속’의 반복을 통해 새롭게 깨어나고 확장된 의미로 환기되는 순간이 온다면 아마 그때가 “써야 할 때”일 것이다. 쓰고 싶다고 다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쓰고 싶을 때가 곧 써야 할 때와 일치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김중혁이 말한 “어느 날 어떤 글을 써야 할 때”라는 표현에 괜한 시비를 건 셈이다. 써야 할 때,를 타자에 의한 강제, 즉 외부 조건으로 규정한 것은 나의 선입견에 불과하다.


‘쓰고 싶은 때’는 자연스럽게 ‘써야 할 때’를 견인하는지도 모른다는 깨달음. ‘써야 할 때'는 '쓰고 싶을 때'가 '이제는 써야 할 때'로 무르익어가는 과정 중 어딘가에(아니 어디에나) 놓여 있는 게 아닐까.


메모를 통한 환기와 상기로 무엇이든 쓰게 되기를.


2011년 김중혁의 유쾌한 첫 산문집 <뭐라도 되겠지>를 읽고 나는 그의 유쾌한 팬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간 그의 소설을 몇 권이나 사두고는 읽지 않고 계속 미루다가 최근에 나온 그의 산문집을 기다렸다는 듯 냉큼 사 읽은 것은 유쾌하다기보다 괴이한(이기적) 팬심에 가까울 것이다. 어쩌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자료'로서의 단어나 문장 혹은 정보나 이미지를 취하기 위한 알량한 방편에 더 가까운 것이었는지도 모르고.


뭐라도 읽지 않으면 뭐라도 쓰는 인간,이라고 (어느 인터넷 서점의 요청에 의해) 나 자신을 소개했던 프로파일을 생각해본다면, ‘무엇이든 쓰게 된다’는 제목은 ‘뭐라도 되겠지’ 이후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 일관된 습성을 유지해온 내게 마라톤 코스 중간 지점의 음료대이자 주문처럼 느껴진다.


주문(注文)이든 주문(呪文)이든. 오늘 이렇게 뭐라도 쓰게 된 것처럼, 뭐라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환기(喚起)와 상기(想起)의 나날이 계속 이어지기를.


메모를 통해.


(20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