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운세: 명(命)과 운(運)

한창훈 소설 <오늘의 운세>에 부쳐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해였나. 소설가 S가 소개한 단편 <밤눈>을 통해 한창훈이라는 소설가를 알게 되었다.


1인칭 화자(손님 '나')가 거의 숨다시피 초점 인물(술집 여주인)의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 작품. 주인공(여주인)의 고단한 개인 서사가 구수한 사투리로 물 흐르듯 펼쳐지는 전개가 일품이다. 소위 전형적인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보이는 이야기. 그런데 여주인의 이야기에 적절한 추임새를 넣어주며 스토리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역할로만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였)던 1인칭 화자(손님 '나')가 돌연 자신의 감상을 슬쩍 내비치는 장면이 나오면서 뭔가 맥이 쑥 빠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조금 망설이다가 나는 S에게 말한다. 1인칭 관찰자의 갑작스럽고도 어설픈 감상적 개입이 이 소설의 (굳이 찾으라면 찾을 수 있는) 아쉬운 흠결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S의 반응을 살핀다. (뜻밖에도) S 역시 그 부분이 아쉽다고 말한다. 그가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바람에 나는 문학작품을 대할 때 가동되는 나만의 '지적질'에 모종의 탄력을 받은 기분이다. 문학과 예술 주변을 얼쩡거리는 나 같은 사람에게 '지적질'은 (‘애정’과 더불어) 딜레탕트로서 갖추어야 할 자세가 아닐까 하는 맹랑한 생각도 해보면서.


어쨌든 소설가 한창훈이 각인되는 순간이었고, 아마 그때부터 그의 작품 중 하나인 <오늘의 운세>가 나의 '읽기 목록'에 올라왔을 것이다. 그의 첫 소설집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1996)에 수록된 단편이지만 나는 '아시아'에서 나온 바이링궐 에디션으로 읽고 싶었다.


일단 제목에 끌렸다. 그날그날 신문에 실리는 '오늘의 운세'를 나 역시 습관처럼 매일 살펴보기 때문만은 아니었고,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과 비교하며 읽고 싶다는 생각 때문만도 아니었다.


'운(運)'이라는 단어에 나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던 때였다. 운명(運命)을 다루는 ‘명리(命理)’라는 학문에 매력을 느껴 대여섯 권의 관련 서적을 읽고 얕게나마 공부를 한 상태였다. 그래서 '운'이라는 신비롭게 꿈틀대는 소재를 문학적으로 어떻게 풀어내고 있는가 하는 호기심이 더 컸다고 봐야 할 것이다.



트럭을 몰며 계란을 파는 주인공 용표의 하루는 순탄치 않다. "아무쪼록 눈조심, 입조심, 손조심. 그는 집 나설 때 아로새겼던 다짐을 다시 한번 떠올"리지만 꼬이는 일들은 연이어 일어난다. 절정은 교통경찰에게 딱지를 떼는 장면이다.


"계란차는 우측으로, 계란차는 우측으로."


순찰차의 호명에 트럭을 세우고 낭패를 당하는 용표. 수완을 발휘해 뇌물 오천 원으로 해결이 되는가 싶더니 만 원을 받고 거스름돈 오천 원을 돌려주기로 한 경찰이 그대로 줄행랑을 치면서 반전이 일어난다. 이번엔 거꾸로 용표가 트럭을 몰고 순찰차를 쫒는다. 오천 원을 떼어먹은 경찰을 향해 던지는 통쾌한 목소리.


"빽차는 우측으로, 빽차는 우측으로."


결국 경찰로부터 만 원을 고스란히 돌려받은 주인공. 순간의 사태로 다시 되찾은 돈은 일상의 불운에 함께 얽혀 있는 가족을 위해 쓰기로 한다. 웃기면서도 다소 서글픈 이 쾌거는 이 작품의 핵심으로 보인다. 문학평론가 강경석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다.


"용표의 불운들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 아니지만 그의 마지막 행운은 스스로 쟁취한 것이란 점이 중요하다. 이 소설은 일상적 불운을 행운으로 전도시키는 하층민 특유의 자발성과 낙천성을 넓은 시야와 균형감 있는 서술로 유머러스하게 묘파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강경석


명(命)은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을 운전하는) 운(運)은 당신의 소관이라고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간 내가 이해했던 명리(命理)의 핵심 메시지처럼.


첫 번째 질문을 던진다.

"오늘의 운세는 던져졌지만 이를 운용하는 것은 누구인가."


이 작품이 아시아 바이링궐 에디션 내의 카테고리 중에서 ‘유머’로 분류되어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유머,로 분류된 작품들 중에는 전성태의 <새>나 (쉽게 예상할 수 있을 만한 작가들인) 이기호, 김중혁, 김종광의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출판사에서 유머,라는 카테고리를 규정하는 변은 다음과 같다.


“식민지, 전쟁, 분단, 독재 등 정치적 폭압과 절대적 궁핍 속에서 한국인은 좀처럼 삶을 상대화할 수 없었고, 그래서 차가운 웃음은 많았으나 유머는 흔치 않은 것이었다. 20세기 후반 한국사회의 눈부신 발전 속에서 조금씩 ‘타자’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여유를 가지면서 21세기의 한국문학은 그렇게 맹목을 버리고 유머를 끌어안기 시작했다.”


이런 맥락에서 한창훈의 소설을 평하는 다음과 같은 글은 의미심장하다.


"거두절미하고 말해 한창훈의 소설은 참 재미있다. 그러나 그의 소설 곳곳에서 빛나는 재미는 몸 가벼운 위트나 얄팍한 재치 따위와는 격이 다르다. 그것은 삶의 뼈저림과 고단함을 온몸으로 부딪쳐 겪어낸 자만이 비로소 알아챌 수 있는 성숙한 지혜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한창훈만큼 팍팍한 일상 속에서 의뭉스럽게 웃음의 미학을 찾아내는 재능 있는 작가를 보지 못했다."- 진정석


나는 두 번째 질문을 던진다.

"삶의 뼈저림을 웃음으로 치환하는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어떻게 재능이 되는가."


삶의 고단함이 (던져진) ‘명’이라면, 이를 다른 형질(예컨대 웃음)로 바꿔내는 지혜는 ‘운’일 것이다. 바로 나와 당신이 운용해야 할.


뭐 그런 생각.


(2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