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고기는 고마웠어 Nov 08. 2018

[공사 시작 23일째] 주류 리스트와 이웃바 정탐

- 11년차 회사원 술가게 창업기 (2018. 11. 7.)

주류 리스트를 정하고 주류 업체와 계약을 할 때이다. 온더무브의 주된 주종은 와인과 맥주 그리고 약간의 위스키. 와인은 워낙 선택의 범위가 넓기 때문에, 우선 맥주와 위스키에 집중하여 목록을 정하는 것으로 전략을 정했다. 맥주는 10-15종, 위스키는 5-6종 정도의 단촐한 리스트를 만드는 것이 일차 목표이다.


그런데 업체로부터 수입 맥주리스트를 받으니 그 종류의 숫자가 무려 464개. 평소에 맥주를 그다지 즐겨하지 않는 태희 언니와 나로서는 그 중에서 10-15종을 골라내는 것은 그 자체로 무리임이 분명하다.


"어떻게 하지... 일단 아사히, 칭다오 같이 우리가 아는 맥주로만 갈까?"

"그래도 좀 특이하고 맛있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긴 한데... 종류가 너무 많아서 어렵네."


고민을 거듭하다가, 맥주 덕후 우현 오빠에게 SOS를 청하기로 했다. 대학교 과 선배이자, 같은 직장에서 몇 년을 돌돌 같이 구르면서 동거 동락 하던 오빠. 친하다 못해 서로의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갈 정도로 가깝게 지내던 오빠이다. 몇 년 전부터 맥주에 빠졌는데, 약간은 편집증적인 성격에 맞게 온갖 맥주에 대한 데이터를 정리하며 맥주의 세계를 체계적으로 음미하고 있다.


"오빠, 잘 지내죠? 저 바를 하나 열려고 하는데, 맥주좀 추천해 주실 수 있어요?"

"응. 지금은 바쁜데, 낼까지 정리해줄께."


다음날 카톡으로 엑셀 표가 하나 날아왔다. 라거, 밀맥주, IPA, 에일, 흑맥주로 구별한 뒤 각각의 기본 맥주와 특이 맥주를 추천하는 리스트이다. 그 중에는 미국에서 요즘 핫하다는 SAM '76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맥주를 원활하게 공급받을 수 있을지는 또 다른 관건.  


"와, 오빠 바쁘시다면서 언제 이렇게... 이 신세는 맥주로 갚을께요!"

"응.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얘기해."


맥주 추천 리스트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감이 있다. 일단, 이 리스트를 후보 업체들에게 보내서, 최종 견적과 조건을 요청하였다.


다음은 위스키 리스트. 우선 고려하고 있는 것은 비교적 화려한 향의 아란, 무난하고 매끈한 맥캘란, 그리고 피트향이 제법 강한 라포익. 하지만 3종 세트로는 좀 허전하지 않을까 하여, 다른 주변 가게들은 어떤 위스키 라인을 가지는지 답사를 가보기로 하였다. 우선 선택한 곳은 비교적 오래된 을지로 3가의 조그만 바. 단촐한 위스키 라인과 와인 라인을 가진, 주인장의 개성이 듬뿍 담긴 바이다.


"언니, 여기 분위기 넘 좋다. 여기는 위스키가 5가지네."

"그러게, 근데 여기 내추럴 와인 제법 많네. 나는 오늘 와인이 마시고 싶어."

"언니 위스키 마시러 온거 아니었어?"

"뭐 다섯 종류밖에 안되는데, 은하 너 혼자로도 충분 하자나. 이번 기회에 내추럴 와인도 탐색해보지 뭐"


비 예측성이 이 언니 매력이지... 하며 나는 미즈와리를 한 글렌모렌지로 오늘의 한잔을 시작한다. 태희 언니는 내추럴 기법으로 만든 쇼비뇽 블랑으로 개시. 다음은 샤도네이를, 그 다음은 가메이를 하신다고 오늘의 음주 계획을 세우셨다.


바에 앉아서 홀짝이며 우리 술가게의 바를 생각한다. 바 부스 부분은 태희 언니와 내가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 이곳이 술가게의 상징이자 심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니, 언니는 어떤 바 부스를 가지고 싶어?”

“약간은 비좁아서 모르는 사람들도 조금은 부대끼고, 그래서 혼자서도 같이 있는 거 같은 곳. 조금은 말을 섞고 친해 질 수도 있는 곳. 그런 느낌?”

“나는 어떤 장면이 떠올라 언니. 한 세평 공간. 바 테이블, 그 위에 줄지어 서있는 와인병들, 바의 의자는 안락하지는 않지만 일단 앉으면 위태하지 않은 곳. 조명은 아늑하고 취기 어린 뺨을 가려주는 적당한 어두움. 옆사람과는 너무 가깝지 않아서 부담스럽지 않지만, 연인이라면 살짝 몸을 내밀면 키스할 수도 있는 그런 곳.”

"와, 그래 그거지!"


기분 좋아진 태희 언니의 큰 손짓에, 세 번째 잔이었던 가메이를 담은 와인잔이 넘어지며 퍽하고 깨져버린다. 어머낫,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잔은 변상해 드릴께요. 아뇨 괜찮습니다. 사과와 이해가 담긴 정겨운 대화 속에서, 우리 바의 와인잔은 굽이 없는 O잔으로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이제 우리 바의 모습이 조금씩 갖추어져 가는 것 같다.


[공사 진행 현황 - 퇴근 길에 잠깐 들려서 확인. 바 부스의 형태가 갖춰지고 있고, 옥상부분 난간이 만들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사 시작 18일째] 가게 이름은 뭘로 할까요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